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98화 (298/432)

298화 - 제55장. 음마(陰魔) 그리고 월하사신(月下死神) (3)

채채챙!

공중에서 두 사람의 도검이 빠르게 교차했다.

그때 이인효는 완전히 누울 듯 주저앉은 상태로 고개를 쳐들어 위를 보고 있었으니 금속의 불꽃이 번쩍거리는 사이로 꿈틀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까앙!

그때 격렬한 금속의 비명과 함께 그림자 하나가 튕겨 나갔다.

그렇게 이인효의 곁에 착지한 사람은 다행히 진도건이었고 최초 진도건이 서 있던 광안전 중심까지 밀려난 그림자는 다름 아닌 사금령이었다.

사금령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어떻게 찾았지?”

그의 물음에 진도건이 잠시 긴장했던 목을 좌우로 꺾었다. 뚝! 뚝! 하는 근육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용상이 있는 단상에서 걸어 내려왔다.

“솔직히 놀랐소. 당신이 불탑에서 내려왔을 때, 잠깐 기척을 놓쳤거든.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았소? 내게 모습을 보이면 안 됐었다고.”

“뭐?”

사금령의 머릿속에 지난 기억이 스쳤다. 그리고 동시에 비록 진도건의 이야기가 불충분한 설명이었다고 해도 끝내 오판한 사람은 진도건이 아닌 사금령 자신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괴물같은 마교주조차 내가 만든 월음포살문(月陰怖殺門)에서 내 본체를 찾지 못했거늘! 정녕 그것이 날 찾는 열쇠가 되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군!’

깨달았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금령은 그가 상상했던 힘을 손에 넣었고 만들고자 했던 현상을 뜻대로 일으킬 수 있었으며 또한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

일인흑신(日忍黑神)의 살문 계급을 나눈 호칭들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일살수의 일(日)이란, 살수로서의 능력이 아직 양지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숨길 수 없는 미숙함을 의미했다.

인살수의 인(忍)이란, 미숙함에서 벗어나 칼자루를 품고 기회를 기꺼이 기다릴 인내하는 힘을 갖춘 살수를 의미했다.

흑살수의 흑(黑)이란, 살수로서 능력이 무르익어 이젠 어둠에 숨고 스스로 그림자가 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걸 의미했다.

신살수의 신(神)이란, 살수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무공의 수준도 경지에 이르러 살인에 있어서 음양(陰陽)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경지를 칭송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신살수들이 과연 그런 칭송적 의미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냐고 묻는다면 사금령은 부족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보다 더 높은 무공과 살인기술을 갖춘 그조차도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천하오절과 비교한다면 진도건이 전날 지적했듯이 정면에서 맞붙어서는 죽일 수 없음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살수는 음지에 숨긴 칼날이다.

그들의 지향점이 살업에 있어서 그 어떤 방해도 장애가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최소한 천하오절과 같은 무공을 보유하거나 그들조차 어쩔 수 없는 살인기(殺人技)를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강력한 무공의 방벽조차 뚫을 수 있는 칼과 양지에서조차 몸을 숨길 수 있는 음지를 스스로 펼쳐낼 수 있다면 그런 살수는 분명 존재하는 것만으로 모두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살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스스로 신살수를 초월한 ‘사신(死神)’이 아닌 그 연장선 어딘가에 있을 뿐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금령이 살문을 천마신교에 바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비록 당장에 욕심을 모두 채울만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어도, 적어도 자신의 이명엔 부끄럽지 않은 마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훅!

살문에서 특수하게 제작한 유약(泑藥)으로 도신을 검게 칠한 기다란 장도의 칼끝이 진도건을 겨냥한다.

“네놈의 거만함이 흡사 단 교주를 보는 듯하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애송아.”

“진실을 외면하는 당신이 우매한 것이오.”

진도건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똑같았지만, 사금령의 귀엔 조롱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실소가 절로 나온다.

“푸흐흐흐! 좋다. 보아라, 월하사신이 여기에 있노니! 사신이 인도하는 죽음의 행마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마기를 폭발시킨다.

싸늘함이 겨울의 그것처럼 짙어지는 한기가 광안전 안을 마치 팔한지옥(八寒地獄)으로 만들 것처럼 얼어붙게 했다.

진도건도 자신과 이인효를 지키기 위해 기운을 방출하니 두 사람 주위로 붉은 혈기가 소용돌이쳤다. 점점 더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는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지만, 파지직거리며 터지는 붉은 전류의 흐름에 절벽에 부딪친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완전히 막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물리적인 충격뿐이지 그 본질적인 차가움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어서 이인효의 떨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밖으로 쫓아내야…….’

잠깐 황제의 상태에 진도건의 생각이 미쳤을 때, 사금령이 왼손을 뻗으며 주먹을 쥐었다.

월음포살문 포열륜(皰裂輪).

공간을 아우르던 한기가 밀집되더니 진도건과 이인효 주변으로 고리를 이루듯 띠가 형성되었다. 그것이 이분(二分), 삼분(三分) 되고 회오리치면서도 서로 엇갈리듯 교차하자 냉기의 파편이 사방에서 터졌다.

이 모든 것이 펼쳐지는 데 불과 수초의 시간.

“흐앗!”

기합일성과 함께 사금령이 왼주먹을 활짝 펼치는 순간,

차차차창!

사금령의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뜨여진다.

새하얀 고리들이 일순간 터져나가면서 수십여 개에 달하는 얼어붙은 칼날들이 이인효와 진도건 그리고 광안전 전체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붉은 벼락이 고리를 타고 흐르더니 그가 만들어낸 모든 칼날이 산산이 깨어져 여풍에 서리처럼 흩날리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펼쳐낸 진도건의 파천혈마공 기운이 사금령의 마공을 박살낸 것이었다.

놀란 표정을 한 사금령의 눈앞에서 진도건이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진도건의 그 말 한마디에 사금령은 일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진도건이 쇄도했다.

팟!

좌수 장심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혈마진기와 꼬리를 무는 붉은 전류.

그것은 흡사 벽뢰장과 같은 형태, 혈뢰장(血雷掌)이다.

꽈앙!

추위와 두려움에 덜덜 떨던 이인효도 화들짝 놀랄 정도의 굉음이 터져나가며 사금령이 광안전 정문 밖으로 튕겨 나갔다.

진도건은 이인효를 잠깐 돌아보았다.

“주변에 다른 살수는 없습니다. 이곳에 머무시어 돌아오는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소서.”

대답 한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뭔가에 억눌려 있던 이인효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진도건은 곧바로 사금령을 쫓아 광안전 밖으로 나갔다.

사금령은 광안전 앞 화강암 반석으로 평평하게 닦은 공터 한 가운데서 자신을 추스리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진도건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또 있나?”

계단을 내려오면서 소리치는 진도건의 목소리에 사금령이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네가 혈마의 힘을 취했다고 내 앞에서 기고만장하느냐? 내 음마(陰魔)의 힘을 얕보지 마라아!”

사금령의 마지막 목소리는 고함과 같았다. 그리고 이내 그로부터 엄청난 한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면서 사위를 덮었다.

월음포살문 수련화옥(睡蓮花獄).

아직 완연한 겨울이 되기엔 한두 달이 더 있어야 함에도 혹한의 추위가 사금령을 중심으로 일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팔한지옥의 육층(六層)에 이르면 도달한다는 올발라지옥(嗢鉢羅地獄:utpala/수련 또는 청련靑蓮)의 추위를 발현한다는 의미가 ‘수련화옥’이란 명칭에 담겨있었다.

진도건은 숨을 마셨다가 하마터면 폐가 얼어붙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을 느꼈다.

이 정도라면 수화불침(水火不侵)의 경지에도 도전해볼 수 있는 그런 강추위로 느껴졌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 감상일 뿐이다.

사방팔방의 공기가 얼어붙고 서리들이 모여서는 다시 응결하여 수십 개의 칼날이 만들어져 날아드는 순간, 사금령이 그랬든 진도건도 파천혈마공의 진기를 밖으로 폭발시켰다.

쩌쩌쩌쩌쩍-!

사금령에 의해 얼어붙은 것들이 진도건에 의해 산산이 깨어져 나간다.

진도건이 섬뜩한 혈기를 군자검의 검은 칼날에 둘러 휘두르자 다급하게 반응한 사금령의 서리 낀 검은 장도와 충돌한다.

채챙!

쩌적!

두 사람의 도검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철의 비명들 사이로 사금령에 의해 분출된 서리가 부서지는 소리까지 혼재되어 퍼졌다.

그것은 마치 사금령이 살문 전체를 천마신교에 바치는 것으로 얻은 힘에 대한 기대감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으아아아!”

사금령이 마치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쳤다. 그리고 이번엔 그걸 본 진도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처음엔 그가 흩뿌려댔던 한기에 가려졌기 때문인 줄 알았다.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마치 얼어붙어 동상에 걸린 듯 사금령의 피부가 푸르딩딩하게 변했는데 그 위로 붉은 혈선이 도드라져 보이더니 군데군데 하나둘씩 터져가기 시작했다.

마치 얼어붙기 시작하는 호수의 수면 위에 핀 붉은 연꽃잎(紅蓮花)처럼…….

파스스……!

입고 있던 옷마저 얼어붙었는지 사금령의 움직임에 상하의 일부들이 부서져 나갔다. 그 아래로 드러난 피부에 핀 홍련화 아래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다 다시 얼어붙으면서 보기 기괴하고 끔찍한 모습을 드러낸다.

“크아아악!”

다시 한번 토해내는 비명과도 같은 고함과 동시에 사금령을 중심으로 엄청난 냉기를 품은 어둠이 밤하늘 은하수(銀河水)처럼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아직 황검당 검객들이 살문 살수들을 쫓으며 흥경의 가옥들 지붕 위아래로 질주하는 사이, 신살수 박전을 가볍게 해치운 이혁성은 서파파와 눈이 마주쳤다.

“살문주를 보려고 하시오?”

“흘흘! 직접 놈까지 잡을 능력이 이 늙은 몸엔 없으니 최소한 놈의 최후는 지켜봐야 속이 풀리지 않겠나?”

그녀의 말에 이혁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에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신살수를 맡았다가 병사들에게 인계해주겠나?”

“예, 당주.”

에마가 고통에 부들부들 떠는 기효산에게 가는 동안 이혁성은 여희선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살문이 모두 정리가 되는 동안 전하를 모시고 남문 병사들과 함께 있으시오.”

“다녀오셔요.”

이혁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서파파를 보았다.

“함께 갑시다.”

“그러세.”

이혁성과 서파파는 곧장 경공을 펼치며 대로를 질주했다.

거리를 절반 정도 좁혔을 때는 서쪽의 황궁보다 북쪽의 월왕부에서 더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천무경과 같은 천하오절의 싸움을 견식할 기회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이혁성의 관심은 안효철의 무투보다 진도건의 검법과 진일보했다는 무위에 대한 궁금증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서파파를 배려하는 듯 따라가는 이유였다.

두 사람의 신형이 황궁 성문을 뛰어넘었다. 그 아래 당황하는 수비대가 있었지만, 사전에 어떤 이유로든 접근을 불허하든 황명의 언질을 받은 터라 오히려 감히 두 사람을 뒤쫓지 못했다.

이혁성과 서파파는 격전 소리가 가까워짐에 바로 근처의 높은 불탑 지붕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이내 뛰어올라 지붕 위로 착지하자 진도건과 사금령이 광안전 밖으로 나와 싸우는 광경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이혁성은 진도건이 이장로 남태환과 비무를 벌일 때, 그의 검기를 조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혈마의 기운을 뿌리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본 것이어서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어째서 그의 명성이 천하오절 바로 아래에서 발돋움하려는지 이해가 가는 광경이었다.

“저건……!”

그때 옆에서 서파파가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이혁성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같이 온 서파파는 진도건보다 사금령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엔 남편의 원수를 향한 증오심보다 안타까움이 엿보여서 의아했다.

“……어째 저렇게 변했을꼬? 저건 사금령의 싸움이 아니야……!”

서파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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