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96화 (296/432)

296화 - 제55장. 음마(陰魔) 그리고 월하사신(月下死神) (1)

이인우는 아샤 감푸와 이들이 어떤 이유로 연결되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목숨뿐만 아니라 어쩌면 무너진 신임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는 계기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고맙기도 했다.

안효철이 부인을 이인우에게 보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따르시지요. 이미 추밀원까지의 길에 적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고, 고맙소.”

이인우는 부인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자신의 아기를 한 번 보았다. 앙앙거리면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지만, 다행히 신변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이인우는 그 둘을 데리고 급히 월왕부를 떠나 추밀원으로 향했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안효철은 빌게포첸을 돌아보며 묻는다.

“정말 내게 제안한 대로 해줄 줄 몰랐군.”

“옛 토번 제국과 이 대하, 대백고국이란 나라는 ‘미으냐(mjɨ-njaa:탕구트/당올족이 자신을 부르는 말)’로서 뿌리가 같습니다. 천마신교에서 이 나라를 이용하는 건 좋으나 황제를 시해하여 수백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하기 어려운 법이지요.”

안효철은 그의 말을 듣고 이 상황이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남는 의문점이 한 가지가 있었다.

“이젠 그 대답을 들어야겠소. 당신은 이 갑옷, 탈혼갑에 대해 알고 있소?”

“탈혼갑이라, 지금은 그렇게 부르고 있나 보군요. 허나 그 이름도 처음 발견한 천마조사에 의해 붙여진 것이지 실체적인 이름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실체가 뭐지?”

“소승도 모릅니다. 단지 의심할 뿐이지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타당한가?’”

“무슨… 의미지?”

“의미를 찾은들 소용없는 일입니다. 만류귀종이라, 이미 이 세상에 나타난 ‘마’는 천지간에 온갖 형태로 그 피를 뿌리고는 이제 다시 심부로 모이는 중입니다. 그대도 그 흐름에 휘말린 사람 중 하나. 오직 소승이 내어줄 수 있는 건, ……죽음으로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겠지요.”

빌게포첸과 안효철, 둘 사이에 묘한 적막이 흘렀다.

빌게포첸의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읊조리던 말은 그 의지가 드러나니 피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월왕의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그의 집까지 부술 수 없는 노릇이지요.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고 민가와 거리도 떨어져 있으니 마음껏 저항하기에 부족함이 없으실 겁니다. 가시지요.”

빌게포첸이 흡사 이미 승기를 잡은 사람처럼 이야기하자 안효철이 헛웃음을 흘렸다.

빌게포첸은 등을 보이는 걸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앞서서 걸어갔다. 그리고 안효철도 기습 따위 생각하지 않고 그의 뒤를 차분히 걸어갔다.

월왕부의 긴 담벼락도, 근처의 민가도 끝이 나면서 두 사람 앞으로 서호변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두 사람은 그 한가운데로 이동하여 대치하고 섰다.

“그대가 저항하기엔 충분치는 않은데?”

조금 전의 말을 받아치는 안효철의 말을 듣고 빌게포첸이 껄껄 웃음을 흘렸다.

“허허……. 마장의 갑옷을 맹신하시는군요. 마장의 검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을…….”

안효철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얼굴엔 어느새 기분 나쁜 표정이 슬며시 올라오고 있었다.

“반쪽짜리인지 뭔지……. 알게 뭔가? 내가 쌓아 올린 무(武)가 천하에서 가장 잘 드는 명검이거늘.”

펄럭!

안효철이 온몸을 덮고 있던 장포 자락을 쥐고 벗어던졌다. 그러자 그 속에 감춰졌던 전신을 감싸는 비늘과도 같은 철갑의 위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상대가 탈혼갑의 진짜 정체를 아는 상대라면 굳이 감춰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빌게포첸도 탈혼갑을 실제로는 처음 본 것이었기에 안효철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빛냈다.

‘저것이 칠흑마장의 갑옷……. 음!’

빌게포첸은 탈혼갑에 시선을 더 둘 수 없었다.

안효철의 투기가 그가 생각했던 수준 이상으로 급격하게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디 놀아봅시다.”

“아미타불.”

말과 대답.

동시에 움직이는 칼 같은 반응.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쇄도하여 포환처럼 공중에서 충돌했다.

꽈앙!

흥경의 시가지에서 발생한 변화들과 남문에서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또 한 측.

사금령은 황궁 내 광안전을 내려다볼 수 있는 불탑의 꼭대기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끌끌끌! 모든 걸 손에 쥐고 흔들어 보려고 했지만, 저 사막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리는구나. 결국에 손에 남는 거라곤 공들여 모아 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살계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남문 쪽 상황의 결말은 불 보듯 뻔했다. 또 월왕부 쪽에서 조금 전 들린 굉음은 뭔가 예기치 않은 사단을 맞닥뜨렸다는 소리일 지도 몰랐다.

이제 정상적으로 남은 것은 그의 손에 달린 일 하나뿐이라는 점은 이미 이곳에서 살문이 얻어갈 수 있는 기대치는 대부분 무너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사금령의 얼굴은 결코 조급한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금령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광안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황제 이인효가 광안전에서 진도건과 함께 있다는 걸 쭉 지켜보고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광안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주변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진도건이 언제든지 오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보여서 가소로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적막한 광안전의 풍경이 어쩐지 스산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조차 최고의 살수가 느낄만한 기분이 아님에도 말이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긴 하군.’

사금령은 오늘 내내 여유로웠으나 광안전을 내려다보면서 갑작스레 느껴진 기분은 또 생소하다.

후우웅……!

어두운 밤하늘, 바람이 차게 불었다.

불탑 지붕에 있던 사금령의 존재가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

채채챙! 챙! 채챙!

황검당 검객들의 돌격은 전격적이었다.

억눌린 혼란이라는 수면 위로 살수라는 숨은 자들의 존재가 또렷하게 떠올랐기에 살문은 그들이 원하지 않던 전면전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드러난 일살수들은 바람 앞 등불처럼 그 많은 목숨이 허무하게 꺼져갔다.

‘이 자식들, 우리의 습성을 잘 알고 있어……!’

후위에 숨어서 빠른 판단의 요구를 압박받던 박전은 살수들을 찾아내는 황검당의 움직임에 치를 떨었다.

수준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

천무방이 검림을 흉내 내어 황검당을 조직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던 걸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에 비치는 황검당의 ‘황검(黃劍)’이란 ‘황(黃)조롱이’와 같이 먹이를 사냥하는 맷과의 맹금(猛禽)과도 같았다.

피융!

그때 다른 쪽에서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남문을 똑바로 바라보고 날아가는 불꽃, 그것을 본 박전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신호의 의미는 명징했다.

즉시 개별적 대응을 멈추고 이언종 살해에 전력을 다할 것, 그리고 목표 달성이 확인되면 즉각 해산하여 생존에 전념하라는 의미였다.

이는 살문이 처리하는 살업의 기준을 세우면서 동시에 최악을 상정하게 될 때 최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상기하는 목적이 담겨있기도 했다.

령(令)이 섰으니 움직임은 명확하다.

퍼퍼펑!

여기저기서 작은 폭음이 터지더니 짙은 연무(煙霧)가 퍼지기 시작했다. 일시적으로 시계를 차단당한 황검당 검객들을 두고 흑살수와 인살수들이 구유무영보를 펼치기 시작하자 연무가 기괴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백무살막(白霧殺幕).

살문의 살수들은 희뿌옇게 가려진 시계 속에서 피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훈련이 된 자들이었다. 혼유향도 하나의 방편이었지만, 사금령에 의해 결정화된 마정의 파편을 인살수 이상들이 이어받으면서 상호 존재가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 능력은 눈을 완전히 가리고도 존재 위치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

이 또한 좁은 범위의 혼란이었으니 이 안에서도 살문의 월식무흔도는 치명적이다.

푹!

스컥!

“끄윽……!”

소름 돋는 소음과 단말마의 비명이 연무 안에서 울려 퍼졌다.

‘이것들이 목표에 집중하라니까……!’

박전은 지붕을 타고 연무의 영역을 뛰어넘으면서도 살수들이 백무살막의 기회를 이용하여 상대하던 적들을 쓰러뜨린다고 여기고 울분이 치미는 걸 느꼈다. 하지만, 꽤 넓은 연무를 뛰어넘어 이언종을 포함한 네 명이 선 위치까지 도달했을 때쯤엔 그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백무살막 속 살수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뭐?’

갑작스러운 상황에 박전이 멈칫하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연무 쪽을 돌아보는 그를 향해 이언종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혁성이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은봉 서파파 선배께서 황검당의 무복을 입으셨다.”

그 말에 박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십오 년 전, 살문은 큰 암살 계획을 결행에 옮겼으나 실패하고 큰 피해를 보았다.

그것은 바로 구룡문주 금태하 암살 기도였는데, 당시 금태하의 명성과 구룡문의 세력 확장이 급속도로 커질 때라 호북의 주변 문파들의 원성이 가장 격할 때였다. 당시 살문주였던 무정도(無情刀) 형망(荊忘)은 승부욕이 대단해서 호북성 문파들의 공동 의뢰를 받아들이고 금태하 단 1인을 상대로 신살수와 흑살수 대부분을 동원하여 암살을 기도했었다.

하지만, 금태하는 그때 이미 화경에 이르고 무공이 급성장한 상황이였다. 그는 대단히 강했어서 자신을 노렸던 살수들 삼분지 이를 때려죽였고 형망도 심각한 내상을 입고 도망쳐야 했다.

회복이 어려움을 깨달은 형망은 다음 살문주를 신살수 금봉(金蜂) 예령(豫零)에게 이양하려 했지만, 예령은 조직을 맡기 싫어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금령이 다른 신살수와 계획을 짜고 형망을 죽인 후, 역시 금태하의 공격으로 내상을 갖고 있던 예령까지 암살하면서 살문의 실권을 장악했었다.

박전은 그때 당시 사금령을 따랐던 흑살수로서 그 계획에 가담하여 예령과 함께 암살하려던 은봉 서파파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서파파는 살문과 사금령을 저주하면서 도망쳤지만,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강호에 나타나지 않아서 살문은 그녀가 은퇴했거나 죽었다고 여기고 잊고 살았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황검당의 소속으로 나타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파파의 존재를 듣자마자 박전이 잠깐 혼란스러워할 때, 폭죽의 의도대로 백무살막을 뚫고 나온 살수들도 몇 등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박전의 시야에 한 사람이 괴성을 지르면서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크악! 이 망령 주제에!”

바로 천살성 기효산이었다.

그는 이미 두어 곳 찔리고 스쳐서 상처가 있어 보였는데 그런 기효산의 모습을 보고 박전은 새삼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금봉은봉 부부를 사금령과 함께 암살하려 한 다른 한 명의 신살수가 바로 기효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효산이 나온 자리에서 작은 체구의 노파가 뾰족한 검을 까딱거리면서 나타났다.

“푸흘흘! 내 남편을 죽이고 나도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간 아주 세상 편하게 살았나 보구나. 그 한심한 실력이 발전도 없이 그대로여.”

서파파가 연신 웃음을 흘리면서 은자검을 겨누자 기효산이 그녀를 보고 이를 빠득 갈았다.

“이 노망난 년이 여태 죽지도 않고……!”

“내 남편의 원수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어찌 순순히 관짝에 누울 수 있겠느냐? 오직 네놈들을 척살할 날이 내 힘이 다하기 전에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느니라.”

서파파의 목소리가 증오로 점철되어 가늘게 떨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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