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 제54장. 상정한 계획, 의외의 변수 (5)
황검당 검객들의 전개와 미완성이 된 살계를 구성하는 살수들의 충돌.
살문의 예상대로 황검당 검객들의 실력 자체는 검림의 검객들에 비하면 확실히 상대적으로 덜 예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검림 검객들이 ‘검도’라는 것에 치중하여 자신의 경지 향상을 추구한다면 황검당은 보다 실전적이고 실용성 있는 수단을 겸비하여 이런 특수 임무에 적합하도록 꾸려진 상태였다.
그것은 보통의 무림인보다 더 실용적이면서 치명적인 대비 효과를 저변에 두어야 할 상황을 빼앗는 결과가 되었다.
챙챙챙-!
푹!
“끄윽!”
곳곳에서 들려오는 칼부림 소리와 단말마의 비명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적막 속에서 가슴을 후벼 파듯 들려왔다.
흑살수 흑조(黑鳥)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발 빠르게 움직여 처마 밑 그늘 속에서 내려와 굳게 걸어 잠근 문 앞에 섰다.
흑조은 자신의 흑도에 공력을 불어넣어 즉시 문을 내리쳤다.
콰직!
나무판자로 이뤄진 문이 그의 공력을 버텨낼 재간이 없이 바로 박살 나 버렸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벌벌 떨고 있는 백성들이 아닌 창칼을 쥔 침착한 세 명의 남자들이었다.
슈슈슉!
문이 박살 나는 순간 곧바로 칼날과 창끝의 위협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윽!”
흑조의 무공은 그들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반사적으로 한걸음 크게 물러나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리고 그의 눈썰미로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민 세 사람이 평범한 백성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오문이구나……! 서하까지 세력이 뻗어있었던가?’
그들도 무공을 수련하니 당연히 보통의 백성들보다는 전투력이 있다 볼 수 있었으나 흑조의 기준에선 사실 별것 아닌 상대들이었다. 그러나 흑조가 다시 달려들려다가 멈칫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이 즉시 준비해둔 집기나 장롱 등을 쓰러뜨려 문을 막으면서 계획된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만 보더라도 의도는 명백했다.
하오문의 수준으로 흑살수는커녕 인살수도 버거운 근본적인 실력 차이가 존재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엄폐물들을 잔뜩 세워놓아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며 버티겠다는 심산이 뻔했다.
“어쭙잖은 것들이……!”
흑도를 휘두르자 세 가닥 도기가 엄폐물 위로 쏟아졌다.
콰지직-!
“크억!”
고작 목조로 된 엄폐물들이 월식무흔도의 도기를 막아낼 수 없었다.
하오문의 세 사람도 엄폐물들을 뚫고 나온 도기를 받아냈다가 상처 입고 쓰러졌다. 그런데도 백성들 앞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창칼을 놓지 않고 흑조를 겨눈다.
흑조의 눈엔 그것들이 우습게 보였다.
단숨에 목을 베어버리고 백성들을 쫓아낸 후엔 집에 불을 지르기까지, 아마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 동지들도 같은 의도의 행동들을 할 것이다.
저벅.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흑조가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로 다섯 개 암기가 꽂혔다.
흑조는 소름이 쫙 돋았다.
암기가 날아온 방향의 길 한가운데 작고 구부정한 체구의 노파가 한 명 있었다. 문제는 흑조가 암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망정이지 노파의 등장 자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
노파는 누런 복색을 입고 있어서 황검당이라는 자신의 소속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흑조는 거기에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은 호수부터 검극까지 삼각꼴로 바늘처럼 얇고 뾰족하게 첨단의 날을 세우고 있어서 누가 봐도 찌르는 데 최적화된 무기로 보였는데 그런 검을 사용하는 노파는 그가 알기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서파파(西皤皤)……!”
“흘흘흘!”
은봉(銀蜂) 서파파가 주름진 입술로 반달을 그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 익숙한 웃음소리를 들은 흑조는 한 번 더 소름이 돋았다.
흑조가 그녀를 알고 있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녀의 옛 소속이 바로 살문이었으며, 당시 지위가 신살수였기 때문이었다.
“빗나가다니……, 노부가 못난 후배들을 너무 얕보았구나.”
서파파가 자루 끝에 고리가 달린 작고 뾰족한 단도들을 걸어놓은 쇠줄을 손안에서 굴리며 중얼거렸다.
‘도망쳐야……!’
그 모습을 본흑조는 급히 몸을 돌려 전력으로 구유무영보를 펼쳤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귀신의 걸음 같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진 보법이었으나 흑조의 신형은 원하는 만큼 더 나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몸이 뒤로 활처럼 구부러졌다.
텁!
“윽!”
서파파도 구유무영보의 달인이었으니 어느새 쫓아와 그의 등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이미 성명병기인 은자검(銀刺劍)을 역수로 쥐고 높이 들었으니 어김없이 쇄골부를 파고든다.
푸욱!
“끄윽……!”
쇄골부에서부터 심장까지 단숨에 관통하여 즉사를 끌어내는 솜씨.
전설적인 살수의 솜씨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흘흘흘……!”
서파파는 암기로 흑조를 죽이는 데 실패했지만,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어 인살수나 일살수 일부의 죽음 또는 부상을 만들어낼 만큼 효과를 거뒀다.
즉, 이미 나이 지긋한 노파라고 수련을 게을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루에 고리가 달린 중지 손가락보다 조금 더 긴 길이의 작은 단검은 에마가 왜에서 쓰던 형태를 가져와 황검당 내에 전파한 것이었다. 황검당이 검객들을 모으긴 했으나 특수 임무를 맡을 것을 대비하여 당원들 가운데 쓸만한 기술들이 있다면 당내에 전파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이를 가장 잘 다룬 사람들은 서파파와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총관 서일헌이 그린 그림이었으며 이혁성이 기꺼이 수용한 결과물이었다.
비단 에마의 투검술 뿐만 아니라 서파파도 일찍이 천무방의 황검당에 가입하면서 살수 지식을 전파하기도 했다. 살수가 되기엔 부족해도 살수에 맞서 싸우기엔 충분한 지식이었으니 이런 것들이 집합된 결과물로서 지금 황검당 검객들이 직접 살수들을 찾아 노리는 방식을 전격적으로 펼칠 수 있는 이유였다.
이런 변주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한쪽은 남문 성루에서 직접 북을 쳤던 참상관 아샤 감푸와 고서점주 오지홍이었다. 아샤 감푸는 바로 어제 중서령 한회열로부터 진도건이 전한 서신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고서점에 가지고 가서 하오문에도 알렸다.
흥경 내 하오문도는 꽤 많은 편이었다. 그들은 밑바닥 백성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혓바닥에 힘을 줄 수 있는 신망이 있었고 또 아샤 감푸 외에 다른 하급 관리나 병졸들과도 충분한 인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오문은 그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들은 맡은 구역들을 한 가구도 빠짐없이 방문하여 이야기를 전파하고 갔다.
그 내용인즉슨,
“내일 술시경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니, 남문에서 울리는 □번째 북소리가 들리면 가까운 집이나 점포로 들어가서 절대 거리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또 가족들 외에는 이 이야기를 바깥으로 꺼내지 말도록 하며, 다른 사람들에겐 자기들이 직접 다니며 전하고 있다는 것으로 민심을 안정시켰다.
하오문은 살문 살수들 개개인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벌여온 살업 가운데서 집단적 움직임을 보인 사건들을 철저하게 분석해왔기에 어떤 방법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목표물을 죽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오문은 이언종 납치 사건 때 많은 동지를 잃었기에 살문에 대한 악감정이 극에 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살계를 훼방 놓아 달라는 주문에 자연히 적극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하! 성공했습니다, 참상관님!”
“이제 역적들을 처단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샤 감푸와 오지홍은 웃으면서 서로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확실히 황검당 검객들이 살수들을 압도하며 밀어붙이는 상황들이 그들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런 큰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성공시켰으니 아샤 감푸로선 그 희열이 남달랐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월왕부의 가장 높은 전각 지붕에 있던 자귀모는 내성부터 거리의 인적이 북소리마다 차례로 사라져가는 걸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곧이어 살문의 살계가 제대로 펼쳐지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이런 빌어먹을 ……이게 대체!’
자귀모는 이를 꽉 깨물었다.
살문은 서하 황실과 조정 공작 임무에 모든 전력을 투입하였다. 모든 살수를 이곳에 끌어온 것은 오늘 같은 방해를 조직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의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가장 편안한 길은 제국충무왕 이언종을 구금하고 황제 이인효와 월왕 이인우를 조종하는 길이었으나,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면 결국 남은 것은 이 나라에 거대한 혼란을 남기고 사라지는 길이었다.
자귀모는 바로 몸을 돌려서 몸을 날려 내원 쪽에 떨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빌게포첸의 옆에서 불안에 극에 달한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인우를 보았다.
스릉!
칼집에서 흑도를 뽑아들자 이인우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안타깝게 됐소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으니.”
“어, 어딜 말이오?”
“어디긴? 저승이지.”
“예?”
싸늘한 자귀모의 말에 이인우가 화들짝 놀란다.
자귀모는 이인우를 향해 한 발 떼면서 실내 쪽을 돌아보았다. 열려 있는 문 안으로 이인우의 부인과 그녀의 품 안에서 강보에 싸인 채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는 한 살 배기 갓난아기가 바로 보였고, 실내 그림자 속에서 그녀 좌우로 선 두 명의 인살수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모두 죽여라.”
자귀모의 명령에 인살수들이 일제히 칼을 뽑으며 부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붙잡았다.
“꺄악! 제발 아기만 살려주세요!”
“안 돼에-!”
부인과 이인우의 비명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자귀모도 한 걸음 더 이인우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꽈앙!
월왕부 전각 벽면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부인은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고, 막 부인에게 흑도를 꽂으려던 인살수들도 흠칫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무너진 벽 쪽에 고개를 돌렸다.
무너지는 벽면의 돌무더기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곤 바로 보이는 인살수를 덮쳐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던지 인살수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에 주먹이 꽂혀버렸다.
콰직!
주먹에 닿은 흉골이 모두 함몰되고 그 뼛조각들이 심장을 찢어발기며 그 자리에서 즉사.
다른 인살수가 움찔거리면서 즉시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검은 그림자가 다른 손으로 뿌린 주먹만한 돌이 그대로 안면에 꽂히는 바람에 그 여력에 밀려 머리째로 등 뒤 벽에 충돌, 두개골이 함몰되어 즉사했다.
정말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자귀모도 잠깐 1초 정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웬 놈……!”
바짝 경계하며 그 정체를 물으면서도 머릿속 기억은 빠르게 회전하여 엊그제 월왕부 앞쪽 골목에서 웬 갓 쓴 사내와 같이 있다가 금방 사라졌던 그 장면이 떠오를 때, 자귀모의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반응할 새도 없이 눈앞이 번쩍였다.
쾅!
“커헉!”
자귀모는 명치를 거대한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그대로 밀려나 월왕부 외원 벽에 꽂혀버렸다. 파묻힌 몸을 빼내기 위해 몸을 움찔거렸지만, 몸에 힘이 도통 들어가지 않았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검은 피를 게워내고 있었고 눈은 핏발이 터져 흰자위가 모두 붉게 물들었으며 가늘어진 호흡을 헐떡이면서 가까스로 숨을 붙잡고 있었다.
즉사했어도 무방할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그가 삶의 끈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은 그를 덮친 것이 빌게포첸이었기 때문이었다.
“끄르륵……!”
자귀모는 식도를 타고 끓어오르는 핏물 때문에 말을 뱉지 못했다. 그러나 의문과 괴로움 속 위에 입혀진 표정만큼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빌게포첸은 벽에 파묻힌 자귀모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는 자귀모의 시선을 잠시 받아내더니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으득!
강력한 손아귀 힘에 목이 가볍게 비틀렸다.
손을 떼자마자 툭 떨어지는 고개는 마침내 절명했음을 의미했다.
“아미타불.”
자신이 죽였지만, 그래도 넋을 위로하기 위해 염불을 외는 빌게포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인우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토번 고승의 모습을 하고서 무공은 강력하고 손속은 무자비한 면모가 오싹한 기분이 멈추지 못하게 했다.
그런 그를 빌게포첸이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부인과 아기를 데리고 추밀원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마구트 장군에게 일러 지금까지 편성 완료시킨 군사들을 풀어 황궁 바깥을 사수하도록 하십시오. 그게 월왕 전하께서 지금까지 부역(附逆)해온 일을 만회하는 길일 것이오.”
이인우는 빌게포첸의 말을 듣고 나서 오늘 오전에 아샤 감푸가 월왕부에 들어 보리수염주를 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근심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선 이자, …빌게포첸의 곁에 있어야 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칠 때, 월왕부 안쪽에 벽을 부수고 나타났던 검은 그림자가 부인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본 이인우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어제 고서점 앞에서 아샤 감푸를 보며 잠깐 마주치기도 했던 장포로 몸을 꽁꽁 싸맸던 정체 모를 반백의 초로인, 안효철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