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94화 (294/432)

294화 - 제54장. 상정한 계획, 의외의 변수 (4)

* * * *

하오문.

강호에서 그들의 지위나 무력은 가장 바닥의 조직으로 치부되지만, 그들이 자리 잡은 영역을 가장 높은 가치 기준으로 치환하면 강호에서 가장 거대한 방파나 다름이 없었다.

흔히 개방의 규모와 그 정보력의 힘을 이야기할 때 ‘천하에 거지 없는 세상이 없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호사가들 가운데서도 하오문에 대해 변태적인 관심을 가진 자들은 그들을 가리켜 ‘천하에 사람 없는 세상은 없다’고 말한다.

힘이든 지식이든 부든 권력이든, 사람 사는 사회에서 상위의 계층에 놓인 자들은 언제나 소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언제나 다수다. 그리고 하오문은 그 다수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강점이었다. 파락호, 시정잡배, 기녀, 도둑 같은 자들뿐만 아니라 하급 관리, 상인, 농부, 거지 등 평민 계층의 다양한 삶을 사는 자들을 모두 포용한다.

이것이 갖는 진정한 존재의의, 그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그리고 천무방과 천무경이 그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강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였던 것은 이곳 변방 나라의 수도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루라는 시간의 흐름.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일이라는 건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일상의 시선으론 보이지 않는 곳의 시간이란 암약하는 자들에 의해 다른 느낌으로 흐르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의 시선엔 오늘만큼 긴장감이 맴도는 흥경의 풍경이 아니 보일 수가 없었다.

조정이 열리지 않았던 날, 광안전의 용상에 이인효가 용포를 입고 앉아 있었고 그의 곁에는 진도건이 홀로 그를 지키고 있었다.

바깥엔 내관들이나 호위병들이 최소한의 인원만 갖춘 채 자리를 비우도록 했다.

그곳에서 이인효는 두렵고도 고독한 심경으로 명상을 해거나 때로는 책을 보거나 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의 기울기나 바닥에 음양이 줄다리기하듯 구획을 나누며 움직이는 과정 등을 모두 지켜보게 된 날이었다. 그 지루하고도 숨이 막힐 듯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도건은 단 한시도 그의 인내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날 유일한 그의 위안이었다. 그리고 해가 서서히 기울면서 광안전 문밖으로 붉게 물든 황혼의 하늘이 엿보일 때,

“폐하! 전령이 왔사옵니다.”

기다렸던 전령이지만, 또 그만큼 떨리는 순간이다.

“밖에서 고하라!”

미리 준비된 대로 이인효가 소리쳤다. 그리고 준비된 듯한 전령의 보고가 들려온다.

“제국충무왕 이언종이 흥경에 도착하면 바로 폐하를 알현할 수 있도록 입궁을 청하였사옵니다! 현재 황검당이라는 왕하호위(王下護衛)를 대동하여 상경하고 있고, 흥경에 입성하는 시점으로 유시 말(약 7시 경)을 예상한다고 하옵니다!”

이인효와 진도건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인효가 굳게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라 전하라!”

“예, 폐하!”

그 답변을 듣고 이인효가 다시 진도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그자의 접근은 느껴지지 않는가?”

“예.”

“자네는 정말 그들이 황제 시해라는 역모를 저지를 것이라 보는가?”

“그렇습니다. 어제 사금령이 찾아와 경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이인효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나라 간 전쟁이 아니라면 일국의 황제를 암살할 생각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네. 물론 짐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이기 때문에 이토록 두려운 것이겠지만 말이야.”

이인효는 설마 칼날이 자신에게까지 닿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는 듯했다. 이런 시기에서 갈팡질팡할 여지를 남겨두는 건 좋지 않았기에 진도건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그들에게 황제 시해는 최후의 수단이 아닌 차선 정도에 불과한 일입니다.”

진도건도 단지운의 야심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시도하는 일들의 행간을 미루어볼 때, 이곳 서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충분히 황실 전복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인효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고개를 들고 진도건을 보았다.

“중서령에게 전한 건 걱정 없겠지?”

그의 물음에 진도건이 중서령 한회열을 다시 떠올렸다.

그의 천거로 진도건이 호위무사로서 정식 임명을 받을 때, 그들 세 사람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한회열은 조정대신 가운데서도 연배가 가장 높은데 충성심도 높고 평소 행실도 검소하여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다른 생각을 안 할 위인이라는 것이다.

진도건이 이인효와 처음 대면할 때 중서령을 떠올렸던 건 아샤 감푸가 중서령 소속이라는 점이 떠올라서였는데, 이인효와 한회열의 사적인 대화를 듣고 있던 진도건은 한회열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했었다.

“중서령을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만큼 다른 쪽으로 발설하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잘 진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는 믿을 만한 인물이지.”

이인효도 진도건이 한회열에게 전달한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견을 내어준 진도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사단을 해결하기 위해서 벌어지게 될 유혈사태 속에서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 황실의 안위도 있지만, 백성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불필요한 희생이었다. 그것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지금까지 고생해서 쌓아 올린 그의 덕망과 치세는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은 진도건도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지점이었다.

사천에서의 무림 전쟁으로 인해 성도 백성들이 휘말린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비록 환도마종의 환진으로 인해 백성들 대부분이 기절하는 선에서 그치긴 했지만, 성 전체가 휘말린 일이었다. 무림인들의 싸움 속에서 이유도 모르고 비명횡사한 백성들도 그리 적지 않은 거로 알고 있었다.

이인효는 용상 위에서 광안전의 열린 문 바깥으로 저무는 황혼에 점점 붉어지는 하늘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할 때, 이인효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심경이 담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광안전의 문을 닫고 모두 물러가거라.”

끼이익……!

서서히 닫히는 광안전의 문과 그와 함께 차분히 걸음을 옮기면서 촛불을 켜는 진도건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마침내 때가 다가오고 있음에 황제 이인효도 호흡을 고르며 조금씩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결국 해가 저물었다.

감춰진 진실을 아는 자들은 긴장감이 맴돌 저녁 하늘엔 어둠에 많이 잡아먹혀서 사나흘 뒤면 그믐달이 될 것 같은 하현(下弦)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손톱만한 크기로 밝게 빛나려는 달을 구름이 이따금 가렸지만, 그 부족함을 흥경 내에 걸린 횃불과 화로가 힘을 보태어 시내를 밝히고 있었다.

시내를 채운 여러 가옥이나 점포, 전각들도 이런 불꽃들의 일렁임에 생겨난 그림자를 곳곳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렇게 낮은 곳에 생겨난 불빛은 지붕 위로도 그림자를 드리우며 사람들의 시야에 숨은 사각지대를 만들곤 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으나 살계를 펼친 살수 중 일부는 바로 그런 곳에 숨어있었다.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 몸을 낮추고, 숨을 죽이고, 살기를 감춘다. 그리고 목표물이 진입할 남문을 바라보면서 혼란 속에 스며들 준비를 한다.

이언종의 행진은 딱 예상된 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단지 그를 호위하고 있는 황검당의 전력이 어느 수준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만이 남아있었다.

천무방이 전력을 확대 개편한 이후로 황검당은 당주인 이혁성의 특기를 살려 만들어진 소조직이었다. 숫자도 50명에 불과한 데다가 검림의 특징을 베낀 듯한 검객들만 모아놓은 구성은 사실상 아류에 지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아무리 천무방이 조직한 황검당이라고 할지라도 똑같은 50명을 두고 보면 당연히 검림 쪽이 황검당보다 더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 보는 것이 상식적인 시각이다.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에 살문의 전력이 모두 모여있는 만큼 살계로 총력전을 펼치면 충분히 제어하고 처치할 수 있을 거로 보는 것도 당연한 시각이었다.

혼란과 어둠은 살수들의 편이었으니.

살수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남문 쪽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에게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 소란은 금방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확인되었고 살수들은 저마다 암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둥!

남문의 지붕 아래 지휘소에서 북소리가 흥경 내로 울려 퍼졌다.

둥!

조금 쉬고 곧바로 또 한 번.

…둥, …둥, …둥!

다섯 차례까지 이어지고 멈췄다.

살수들은 그 북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고민했다.

남문에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대로의 좌우로 대오를 갖춰 서는 것을 보아하니 제국충무왕의 입성을 알리기 위한 신호처럼 느껴졌지만, 분명 살문이 흥경 내에 상주하던 시기 동안엔 듣지 못했던 북소리였기에 의아한 지점이 있었다.

그들이 갖는 의아함처럼 분명 이 북소리는 의도된 것이었다.

남문을, 바깥을 향한 살수들의 등 뒤로 북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그들 모르게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다.

첫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지던 시점부터 황궁과 가까운 내성의 백성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차례로 집이든 점포든 들어가면서 거리가 비워지기 시작했다. 점포들도, 가옥들도 그렇게 사람들을 들이고서는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두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조금 더 바깥쪽의 백성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거리를 비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세 번째 북소리, 네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이런 움직임은 점점 바깥쪽으로 확장되듯 퍼져나갔다. 그렇게 형성된 고요한 분위기가 흥경 내를 충분히 감싸고 있음에도 살수들 대다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비로소 살수들도 북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들이 있던 구역에서도 백성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면서 거리를 비우는 모습들이 눈에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등 뒤로 적막이 쌓일 대로 쌓였음을 알아차리고 돌아보았다.

침묵에 휩싸인 흥경의 거리.

이곳이 과연 한 나라 수도의 저녁인가 할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침묵이 바람결에 흐르고 있었다.

신살수 단혼쌍렴도 박전은 그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입에 욕을 담는다.

“이런 씨부랄!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이런 대도시에서 펼치는 살계란 백성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불안과 혼란을 폭발시켜 그 속에 숨어들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의 반응이 이토록 거친 것이다.

대체 누가 이 흥경에 모인 모든 백성을 상대로 이만한 계획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그 의문이 머릿속을 스칠 때, 제국충무왕 이언종이 곁에 한 사내와 두 여인만을 곁에 둔 채 남문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언종 외 유일한 사내, 두 자루의 검을 허리에 찬 이혁성이 내공을 실어 목청 높여 소리친다.

“천무방 황검당은 성내에 암약하는 살문의 모든 살수를 찾아 주살하라!”

그의 외침이 터지기가 무섭게 성벽을 타고 또는 성문을 지나 50여 명의 황색 복색을 갖춘 검객들이 남문 근처 시가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풀어내는 살기는 그림자 속에 숨었던 살문 살수들을 너무나 명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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