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93화 (293/432)

293화 - 제54장. 상정한 계획, 의외의 변수 (3)

그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황제의 침소엔 긴장감이 무겁게 차올랐다.

밖에서부터 차례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두 차례 반복되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고 곧 문 앞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땐 정오에 먹었던 음식이 다시 턱밑까지 차오른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곧 문이 드르륵하고 열리자 진도건이 팔을 펼치면서 돌아섰고 희한하게 이인효를 짓눌렀던 중압감 대부분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이인효가 느꼈던 것은 지금 막 들어오고 있는 사금령의 살기에서 비롯된 것이니 진도건도 이를 인지하고 차단해버린 것이다.

사금령은 안으로 많이 들어오지 않고 출입문에서 세 걸음만 앞으로 나왔다. 채진걸은 감히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문 바로 앞에서 뒤서거니 있었다.

“폐하께서 새로운 호위무사를 들였다고 하여 인사나 해둘까 하여 왔습니다.”

“그, 그런가……?”

문득 이인효의 마음에 불안감이 싹텄다.

그날 사금령이 침소에 들어와 그를 겁박하였을 때, 채진걸이 사금령 편으로 돌아섰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기에 그를 하녕궁 안으로 들이지 않아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머릿속으로만 지레짐작했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혹여 진도건도 사금령을 마주한 이후로 그렇게 돌아서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혈마검귀 진도건이 여기에 나타날 줄은 몰랐군.”

“나도 살문주를 이런 식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진도건과 사금령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리고 그걸 사선에서 지켜보는 채진걸은 기세가 불꽃 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살문주를 앞에 두고 저리 침착할 수 있다니……!’

진도건은 소문으로만 듣던 살문주의 진짜 모습을 눈에 익히려는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그의 연배는 천무경과 비슷했는데 호리호리한 체형에 진도건과 비슷한 제법 큰 키를 갖고 있었다. 흰색의 얇은 복장 위로 검은색 복장을 한 겹 더 걸친 모습이었는데 등에 찬 보통의 칼 길이보다 절반 정도는 더 긴 장도(長刀)가 눈에 들어왔다. 평이한 듯 날 선 용모였으나 눈빛엔 표독한 빛이 가득하여 보통 심기로는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주눅 들게 할 것 같았다.

진도건처럼 사금령도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평범한 듯 사내다운 외모는 전형적인 호남아처럼 느끼게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예리하게 벼려지고 두들겨진, 장인이 공들인 명검 같은 기도가 중심에 선 느낌이었다. 그리고 과연 소문대로 그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눈썹, 머리카락 등 몸에 난 털오라기도 그와 같이 붉어서 그가 흘려보내는 기도와 섞여 마치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들려오는 행적이나 그 명성을 보았을 때 걸물이라는 인상을 받긴 했으나 꽤 침착해 보여 놀랍군.”

“아니, 꽤 놀랐소. 직접 모습을 드러내 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말이오.”

“후후후, 살수라는 내 업을 자각시켜주는가? 걱정하지 말게나. 본래 구유에 떠도는 사신이란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그 아래 그림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법이라네.”

사금령이 중얼거리는 말에 이인효가 뒤에서 듣고 어깨를 다시 떨었다.

‘흡사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얘기 같구나.’

사금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마검귀 진도건이라는 이름은 분명 강호에서 두드러지는 편이었지만, 언제나 세대에 걸쳐 소수로 등장하는 천재성을 가진 후기지수 정도로만 여겼다. 천마신교에 가입하여 그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받았을 때도 그저 특징적인 이야기들 뿐이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진도건이 여기에 느닷없이 나타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여유롭게 시간이나 낚으면서 때를 기다릴 줄 알았건만, 불어오는 바람 속에 피 냄새가 섞여 있었어.”

사금령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도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했다.

“기왕 직접 행차하셨으니 실력 행사도 좀 하실 거라 기대했는데.”

“클클! 어차피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운명. 급한 거 없네.”

“괜찮겠소? 내게 모습을 보였으니 당신이 임무를 완수할 길은 사라졌는데.”

진도건의 명백한 도발.

아무리 월하사신의 명성이 대단해도 자신을 넘어서 황제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라는 걸 사금령이 모를 리 없었다.

사금령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진도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기준에서 진도건은 월하사신의 정체를 알았으니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들렸다.

사금령이 다시 몸을 돌렸다.

채진걸이 문을 열고 사금령이 나가자 그도 따라 나가며 문을 닫았다.

“사신은 본디 죽을 자 앞에만 나타나는 법이라네.”

문밖에서 들려오는 사금령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가 궁궐 밖으로 나가길 기다리려고 일부러 시간을 두고 기다렸던 이인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도건에게 한 발 더 가까이 갔다.

“이젠 어찌하면 좋은가?”

“저자의 칼은 폐하께 닿지 않을 것이오니 심려 놓으십시오.”

“믿어도 되겠는가?”

“그렇습니다.”

진도건의 확신에 찬 대답에도 이인효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첫 대면 이후로 근 두 달을 보지 않았으니 그 두려움이 무뎌졌다는 걸 이번에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사금령은 두려웠고, 월하사신이란 이름 그대로 그의 죽음을 심판하러 아무 저항도 없이 그 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이인효가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어도 진도건은 꾸준히 침착했다.

그저 차분하게 사금령이 남기고 간 기척의 색을 읽어 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 * * *

살문으로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었다.

이른 아침.

흥경 남쪽 가까이에 있는 오충부(吳忠府)에 이언종이 호위 검객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언종은 황제 알현을 위해 그곳에서 관복을 정비하고 있다고 하였고, 호위 검객들은 50여 명으로 대부분이 무거운 황색 무복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본래 그들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소식은 이언종의 구금과 회유 시도에 대한 성과 보고였어야만 했다. 그런데 계획과는 반대로 흥경에 도착한 군 전령을 시작으로 그 내용이 관리들에게 퍼져나가는 걸 엿듣는 것을 첫 소식으로 알게 된 것이다.

월왕부.

월왕 이인우는 자기 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매우 긴장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의 집무실 안의 중앙 탁자엔 이인우 자신을 포함해 모두 여섯이 앉아 있었다.

토번 고승인 성혈신마 빌게포첸.

황제와 접촉했다고 알고 있는 월하사신 사금령.

그리고 신살수 셋.

유령살귀(幽靈殺鬼) 자귀모(紫歸慕),

천살성 기효산,

단혼쌍렴도(斷魂雙鐮刀) 박전(朴煎).

두렵다는 말로도 부족한 존재들 다섯이 모두 모여 자신을 앞에 두고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 내용도 충격적이었다.

‘아아, 올 것이 왔는가……?’

그들의 의도와 달리 이언종이 탈출해서 다른 호위를 대동하고 흥경으로 올라올 예정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땐, 이인우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흥경에 진입하고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고 살계(殺界)를 펼치자는 말을 듣는 순간, 오금이 절로 저려 왔다.

양인귀 허공이 데려갔던 인원들을 제외하면 살문들은 사실상 흥경에 모두 모여있었다.

군사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으나 추밀원사가 자신들의 손아귀 안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 투였다. 그게 현실이기에 이인우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살계를 흥경 내에서 대놓고 펼치겠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백성들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살문은 오히려 그들이 일으키는 혼란은 살문의 좋은 무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잘못하다가 나라가 끝장나겠구나. 이 모든 게 나의 업보 때문인가……?’

이인우의 머릿속이 번뇌로 가득 찬 사이, 사금령은 부하들의 위치를 지정하고 있었다.

“자귀모가 월왕부를 맡고 기효산과 박전이가 암도(暗刀)를 맡거라.”

“차라리 흑헌(黑獻)과 인살수 둘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무방의 개편된 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허공 놈이 당했다고 가정한다면 꽤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텐데…….”

자귀모가 의견을 말하던 중 그만이 알아챌 수 있는 순간에 사금령이 빌게포첸을 흘끔거리는 걸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귀모도 왜 자신을 살계에 포함하지 않고 월왕부에 두는지 깨달았다.

“시키는 대로 하거라.”

“……예.”

사금령은 천마신교에서 빌게포첸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토번 고승의 모습은 협상에서 신뢰도를 높여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화적 협상이 실패하고 강제적인 조치로 돌아섰다면 빌게포첸은 돌아가고 오롯이 살문에게 맡기던 혹은 다른 구주마종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살문이 천마신교에 가입하였을 때, 사금령은 구주마종의 특징들을 신속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성혈마종이 성혈교로서 독자적인 불교 교리를 유지한 채 천마신교 안에서 존속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물론 빌게포첸이 성혈신마로서 신강에서 얻은 악명은 보통이 아니었다. 적이라 판단한 자들에 대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불교도로서 ‘자비’라는 단어를 습관처럼 외우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불과 마가 공존’하는 그 모순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귀모를 굳이 월왕부에 두는 건 규정할 수 없는 불안감을 대비하기 위한 발상이었다.

“문주께선 일을 시행하실 겁니까?”

박전이 사금령에게 물었다.

“애송이가 도발했으니 응수를 해줘야지.”

“교주께서 문주님의 역할을 직접 명령했으니, ……역시 생각이 있다 봐야겠지요?”

“클클!”

기효산의 물음에 사금령이 대답은 하지 않고 웃음만 흘렸다.

분명 의미심장한 질문이었으며 내막을 짐작게 하는 웃음소리였다. 그것을 아무리 천마신교 사정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이인우일지라도 이들의 행간을 지켜본다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천하역적(天下逆賊)이로다!’

살문의 회의는 이후로 오래지 않아 끝났다.

이인우에게 들으라는 듯 진행된 회의였으니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인해 이인우 자신도 천하역적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절망스러운 사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살계를 전개할 신살수 둘이 밖으로 나가고 사금령도 월왕부를 떠났을 때였다.

“전하, 참상관 아샤 감푸가 지나는 길에 전하께 드릴 선물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고 하옵니다.”

이인우가 여전히 홀로 집무실에서 벌벌 떨고 있던 때에 밖에서부터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이 시국에 선물이라니……!’

하인의 말을 들은 이인우는 짜증부터 확 치밀어 올라왔다. 그러나 아샤 감푸는 그가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니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기며 월왕부 대문으로 나갔다.

“참상관 아샤 감푸가 전하께 문안드리옵니다.”

“그래.”

아샤 감푸가 인사를 올리자 이인우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줄 것이 있다고?”

“예, 이걸 받으십시오.”

이인우는 아샤 감푸가 내민 손을 보았다.

흔하디흔한 108개 보리수 열매를 엮어 만든 염주였다. 그것을 본 이인우는 오히려 불쾌해졌다. 그도 불교 신자여서 이미 집안에 서너 개 두고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있는 물건을 줘서 뭐하는가?”

아샤 감푸가 숙인 고개를 살짝 들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심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선 이자의 곁에 있어야 한다. 어제 저와 만났던 낭인이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설명에 불현듯 이인우의 머릿속에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조만간 사죄 겸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정체도 알 수 없게 온몸을 장포로 꽁꽁 싸맨 건장한 체격을 가진 초로의 낭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연이어 그날 자신이 누구와 함께 그 낭인과 여기 아샤 감푸를 만났는지 떠올렸다.

‘의미심장하다……. 혹시?’

뭔가 깨달은 눈으로 다시 아샤 감푸를 쳐다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꾸벅 인사한다.

“그럼 소신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조정도 없는 날이니 부디 심란하실 마음 잘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아샤 감푸가 떠나고 이인우는 다시 한번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원래 오늘은 조정이 당연히 열렸어야 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전날 밤에 황제가 대신들에게 전령을 보내 조정을 취소하겠다고 공문을 통보하는 바람에 열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인우는 신중한 해진 마음으로 몸을 돌려 다시 월왕부로 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은신해있는 살수들의 시선이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가득 찼던 절망 속에 왠지 한 줄기 빛이 들어서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정원 한구석 의자에서 염주를 굴리며 조용히 염불을 외는 빌게포첸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승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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