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92화 (292/432)

292화 - 제54장. 상정한 계획, 의외의 변수 (2)

단호한 십자 검광 앞에 허공의 육신이 피를 뿌리며 절단이 난 채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이혁성은 위협 없는 자유로운 몸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검집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아직 왼손 안에 남은 어색함 때문에 손을 쥐었다 폈다 한다.

“자네의 특기를 살려 왼손에도 검을 들어보는 게 어떤가? 자네의 그 능력이라면 찰나를 노린 필살의 암수(暗數)를 설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자네가 고전할 상대라면 그 적은 그만큼 이미 고강한 무공을 소유한 강적이라는 것. 그 싸움 이전에 기력을 아낄 방법을 모색해두는 것이 자네가 후회 없이 전력을 펼칠 조건을 마련해두는 의미로 생각해보게나.”

“……반정협객의 입에서 암수를 논할 줄은 몰랐습니다.”

문득 좌수검도 자연스럽게 다루던 진도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근히 퍼질 대로 퍼진 혈마검귀 진도건의 명성이나 실력에 대한 소문은 이혁성이 생각한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천무방에서 그가 장태환을 상대로 보여준 검기도 감탄스러웠던 걸 감안해도 말이다.

경쟁의식은 원래도 품고 있었으나 과거엔 그가 앞서서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쫓아가는 처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혁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황검당은 빠르게 이곳에 있는 살문 살수들을 포위섬멸할 것이다. 그렇게 아직 진행 중인 상황 속에서 그가 허공과 싸우는 모습을 본 자는 없었다.

제이검(第二劍)과 이기어검술을 활용한 필살의 암수.

비뢰교천(飛雷交天).

누가 보고 말고를 굳이 의식하는 건 아니었으나 수싸움에서 앞서려면 아무도 모르는 쪽이 낫다는 생각 정도는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이혁성의 발걸음이 허공의 시체를 지나쳐 곧바로 동굴로 향했다.

끼이익…….

문을 연 이혁성의 무표정 얼굴에 미묘한 표정 변화가 일었다.

어떻게 했는지 한쪽 손의 결박을 결국 풀어낸 채로 날카로운 쇳조각을 쥐고 다른 손의 결박을 끊으려다가 들켜버린 줄 알고 몸이 굳어버린 이언종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냐?”

이혁성은 이언종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천무방 황검당주 이혁성입니다. 제국충무왕 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그…… 사, 살수는?”

“제가 처치했습니다. 나머지도 정리 중입니다.”

“하아!”

이언종이 큰 걱정거리가 씻은 듯 내려가는 걸 느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혁성이 다가가 그의 결박을 풀고 상태를 살폈다. 이리저리 구른 덕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머리카락이나 복색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때맞춰 도착하여 고문할 시간은 막은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내 경거망동했다가 낭패를 볼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군.”

“이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이혁성과 이언종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다른 황검당 검객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여희선과 에마만이 이곳에 도착하여 동굴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는 이언종을 향해 예의를 갖추었다.

이혁성의 시선이 잠시 다른 숲 쪽을 에둘러 돌리자 여희선이 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살수들이 살아 도망가지 않도록 강 분타주께서 독려하시는 바람에 다른 당원들은 잔당들을 쫓으러 갔어요.”

강 분타주란 하오문의 녕하분타주 강소동(姜小東)을 말하는 것이었다.

살문이 움직이면서 농가에 사는 하오문도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죽이고 간 것을 강소동이 오래지 않아 발견하고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즉시 추적에 능력이 있는 문도들을 소집하여 살문의 행적을 쫓았는데 때마침 천무방 황검당이 이곳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접촉하여 포위진을 짜도록 도움을 준 것이었다.

강소동의 하오문은 지금도 이 산자락 외곽에 포진하여 신호탄을 터뜨릴 준비를 한 채 혹여나 빠져나가는 쥐새끼가 없는지 감시하는 중이었다.

“저희는 바로 이동하죠. 전하께서는 흥경으로 가실 것이지요?”

“그, 그렇소.”

이언종은 여희선의 고혹적인 미모에 잠깐 당황하여 말이 더듬어 나왔다. 살수들이 가득했던 숲속에 어울리지 않는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 덕분에 이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상기할 수 있었다.

“이 당주, 흥경에 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때까지 날 지켜줄 수 있겠소?”

“흥경의 황궁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혁성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확신에 가득한 대답을 들려주자 이언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끄덕였다.

* * * *

광안전이 황제가 대소신료들과 국정을 논하기 위한 곳이라면 하녕궁(夏寧宮)은 황제가 머무는 처소였다. 채진걸은 한동안 하녕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새로 온 호위무사가 황제를 따라 하녕궁에 입궁하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전까지 그를 곁에 두다가 멀리하게 된 이유를 모르지 않았으므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둘째였다. 같은 호위무사로서 근무처가 궁궐의 담장을 기준으로 갈라져 버리자 혹여 황제가 다른 의도를 품은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 먼저 앞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채진걸은 황궁 북쪽에 있는 서호로 향했다.

익숙한 위치로 가자 서호변 물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쪽배가 눈에 들어왔다.

채진걸은 쪽배 위에 올라타고 반쯤 물에 잠겨있던 장대를 건져서 배를 밀기 시작했다.

채진걸을 태운 쪽배가 쭉쭉 나아갔다. 호수 가운데에 떠 있는 듯이 있는 작은 섬과 그 위의 정자에 앉아서 낚시하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채진걸의 쪽배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노인의 낚시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섬에 올라가 조심스러운 몸짓과 걸음으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낚시 중인 노인이 바로 월하사신 사금령이었다.

“사 대인을 뵙습니다.”

“저번에도 귀찮게 하지 말라 그랬거늘.”

목소리만 들어도 한기가 느껴져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알아는 두셔야 할 것 같아서 한 말씀만 올리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흠.”

“황제가 새로운 호위무사를 등용해서 제가 아닌 그자를 하녕궁에 들였습니다. 소인이 강호에 적을 두지 않아 새로운 명성들엔 귀가 어두워 혹시나 아는 이름이실까 하여…… 진도건이란 자라고 합니다.”

“……자네, 곧 해임되겠구먼.”

“하하……. 그럼 소인은 물러나겠습니다.”

채진걸은 다시 그 조심스러운 몸짓과 뒷걸음질로 물러난 후 쪽배를 타고 서호 밖으로 빠져나갔다.

낚싯대를 까닥거리면서 채진걸이 멀어져서 작아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사금령이 영혼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혈마검귀라…….”

* * * *

이인효는 침상에 앉아서 앞에 선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불과 어제만 해도 열린 창문으로 숨어들어와 경계 가득한 태도로 마주 보았었는데 지금은 호위무장으로서 당당하게 정식 관복을 착장하고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우습지 않으냐? 어제의 첫 조우를 떠올려보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지 말이야.”

“불편하시겠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때 편해진 어심으로 정사를 보시옵소서.”

“불편할 리 있겠느냐? 적어도 요 며칠간 짐이 가장 신뢰할 자는 자네일 텐데 말이야.”

이인효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제 진도건과 안효철이 떠나갔던 날 밤, 침입자가 없었음에도 그는 잠을 제대로 설쳤다.

곁을 지켜주는 자가 아무도 없는 지금 이 시점에 혹여나 월하사신이 찾아와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간신히 잠들어도 이내 악몽으로 깨길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눈앞의 남자가 정말 사금령을 처치해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만성적인 병으로 남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간을 보내왔기에 설령 바라는 바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는 진도건 등을 원망할 생각 없었다.

실패한다면 그들도 목숨을 잃을 터인데 원망한들 무슨 소용일까?

진도건을 흡족하게 쳐다보던 이인효의 시선이 무심코 그의 머리카락과 눈빛에 머물렀다.

“진도건, 자네는 색목인이나 혼혈인가?”

“한족입니다.”

“흐음, 하긴 그런 얼굴을 하고 있긴 하군. 그런데 색목인이라 해도 그렇게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붉은색은 아마 찾아볼 수 없을 걸세.”

이들에게 대백고국, 중원인에게 서하라고 불리는 이 나라는 감숙을 관통하는 비단길을 점유하여 그 무역에서부터 얻는 상업적 이익 등이 나라 경제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인효도 서하의 인종 황제로서 서방의 사신이나 상인들을 여럿 보았기에 색목인들의 외견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외견에서 진도건의 그런 모습은 결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진도건은 차분히 할 일만 하고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황제의 궁금증을 마냥 모른체하며 내버려 두기엔 어려운 자리라는 것도 알았다.

‘뭐라고 말할까……?’

진도건은 잠시 고민했다. 이인효는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이 조금 이어지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힘들다면 답할 필요 없네.”

아무리 어질기로 세평이 좋은 이인효였지만, 황제라는 직위에서 자연스럽게 배양되는 드높은 자존심은 감출 수가 없다.

조금 삐진 듯한 황제의 얼굴에 진도건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사정이 길어서 다 말씀드리긴 어려우나…… 귀신에 씌어 이리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귀신?”

이인효는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어서 꽤 놀랐다.

“그렇습니다. 피를 닮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귀신을 품었더니 이리되었습니다.”

“그럼 자네는 진도건인가? 아니면 빙의된 진도건인가?”

“……그냥 진도건입니다.”

“어, 흠흠! 미안하군. 짐의 질문이 참 유치했구먼.”

민망해하는 이인효의 얼굴을 보던 진도건은 문득 혈마가 지금의 말들을 듣고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불현듯 혈마의 태도가 떠올라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그 귀신에 빙의하였다면 절대 폐하께 예의를 갖추는 일 없이 대단히 건방지게 굴 것이옵니다. 혹여나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노여워 마시고 그러려니 넘어가 주십시오.”

“하하, 하…… 그런가? ……혹시 장난치는 겐가?”

이인효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묻자 진도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진심입니다, 폐하.”

“허허허……!”

이인효가 젔다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침상 옆 작은 협탁 위에 놓은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그런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던 진도건의 고개가 살짝 좌측으로 틀어지며 시선도 따라 쏠렸다.

“폐하, 신 채진걸이옵니다.”

막 찻잔을 입술에 대어 고개를 들려던 이인효가 그 목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채진걸이 하녕궁에 들어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나 보통 삼중문 바깥의 내관이 그를 부르기 때문에 직접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의아하다.

“무슨 일이냐?”

아직 이 일에 익숙하지 않은 진도건 대신 이인효가 바로 답문했다. 그러나 이내 돌아온 대답에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사금령 대인께서 폐하를 알현하길 청하옵니다.”

이인효는 주먹을 꽉 쥔 손을 떨며 잠시 문 쪽을 노려보았다.

‘이리 대놓고 궁내를 활보할 줄이야!’

단 한 차례 보았음에도 그때의 인상은 아직도 두려움으로써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황궁을 찾지 않은 자가 이런 식으로 대놓고 방문을 알릴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무심코 돌아가 진도건을 찾았는데 그의 고개가 살짝 끄덕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인효도 끄덕거리며 긴장감에 말라버린 침을 억지로 꿀꺽 삼켰다.

“들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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