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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91화 (291/432)

291화 - 제54장. 상정한 계획, 의외의 변수 (1)

필릴리…… 삐이…….

흑산(黑刪)은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뭔가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에 보이는 두 여인의 미모나 자태도 아름다워서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들려오는 피리 소리의 선율은 그 이상으로 넋을 잃고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집중해서 보고, 집중해서 들었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누군가의 접근을 무방비로 허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푹!

피리 선율 속으로 스미듯 들리는 섬뜩한 소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까운 나뭇가지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인살수 인무(刃霧)의 몸이 앞으로 기우는데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온 피 묻은 검과 등을 타고 오른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며 등골이 오싹해진다.

“흩어……!”

경고를 날리는 것조차 끝맺지 못하고 등을 노리는 위협에 반응하여 다급히 몸을 돌렸다.

채챙!

산림으로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백광을 뿌리며 날아드는 검이 살수의 흑도에 가로막혔다.

“크억!”

하지만, 흑산과 달리 사방에선 살수들의 비명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늘에 잘 구분도 되지 않았지만, 이따금 서산에 걸린 햇살을 지나치면서 보이는 누런 복색의 검객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살수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나마 인살수 몇몇과 흑살수들만이 기민하게 반응하여 심장 대신 흑도를 내주었다곤 해도 거의 열댓 명의 살수들이 동시에 쓰러지는 건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더 생각할 여유 따윈 없이 흑산의 귀신 같은 몸놀림은 포위망이라 여겨지는 공간의 바깥을 향해 잽싸게 움직였다.

‘빠져나……!’

하지만, 이번에도 의식의 흐름조차 끝맺지 못한다.

퍽!

흑산은 순간 가슴과 등의 중심부가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절로 쳐들리는 고개와 왠지 모르게 붉게 흐려지는 시야로 자기 가슴에서 분출되는 핏물을 꼬리에 문 채 빠져나가는 검을 보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시야, 마지막 기억이었다.

쿵!

나무에서 떨어져 땅에 처박히는 건 흑산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몰려온 십수 명의 살수들이 모두 절명하여 그렇게 아래로 우수수 떨어져 댔다.

그 잠깐의 시간 속에서 모두가 쓰러져나갈 때, 또 다른 흑살수 흑리(黑利)는 흑산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흑산이 비교적 바깥쪽에 있었다면 흑리는 이미 선봉 격처럼 가장 앞선 채로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빠져나간다는 경우의 수는 애초에 위협에 반응했을 때부터 포기했다.

대신 이 참극의 원흉이라 여겨진 피리 부는 여인의 목이라도 쳐야 이 원(怨)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돌진하는 흑리의 눈빛이 피리 부는 여인의 눈빛과 마주친다.

순간 허공에 대고 휘둘려지는 피리.

삐익!

손목을 이용한 한순간의 빠른 움직임과 기류의 조절을 더해 피리로부터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키는 것.

그것으로 인하여 흑리의 접근이 공중에서 잠깐 멈칫하는 순간, 피리 여인의 옆에 있던 여류 검객이 앞으로 전족을 내밀며 검을 뽑는다.

쉬릭!

때마침 그 자리를 비추고 있던 햇살을 새하얀 십자 검광이 경쾌한 파공음 속에 가르며 그대로 흑리의 상체를 관통했다.

가볍게 비켜서는 두 여인을 지나쳐 흑리의 몸이 땅에 처박힐 땐 이미 머리와 팔 하나가 분리되어 뎅그르르 굴러다녔다.

마지막 살수가 죽자 두 여인을 중심으로 황색 복장을 한 검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혁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두 여인 앞에 섰다.

피리 여인이 이혁성을 보며 생긋 웃었다.

“에마양을 옆에 붙여줬을 땐, 반신반의했는데 제가 보기엔 당주님보다 검이 더 빠른 것 같은데요?”

“과찬입니다.”

피리 여인의 옆에서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이는 여인은 바로 왜인 여류검객 앵화검 에마였다. 본래 한문식인 ‘소진’이란 이름으로 천무방에 가입했었으나 이제는 왜식 발음으로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아무리 검이 빨라도 난약요음(蘭葯妖音)을 쫓아가긴 힘들지.”

2년 전, 난약파가 참극을 겪으면서 문파가 와해되는 일이 겪었다. 당시에 살아남은 세 명의 제자들은 새로운 장문인을 중심으로 잠시 뭉쳤었으나 그마저도 올해 들어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난약요음.

그것은 실질적으로 마지막 남은 난약파 음공의 전승자이자 마지막 장문인 여희선의 별호였다. 그리고 그녀가 찾은 곳은 사패소룡비무제 때 인연을 맺은 천서은의 천무방이었으니 태원에 도착한 게 불과 한 달 전, 천서은이 진도건과 검림에서 사천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젠 당주님의 판단이 빨라져야 할 때예요. 흥경의 내 친구에게 보조를 못 맞춘다면 망신 살지도 몰라요?”

여희선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이혁성이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야 없지.”

이혁성이 주변의 당원들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모여든 건 이혁성, 여희선 등을 포함하여 19명, 나머지는 다른 지역을 포위하고 있었고 그들의 은밀한 움직임은 꽤 신뢰할 만하다.

“계획대로 전개한다.”

냉철한 목소리에 황검당의 검객들이 빠르게 흩어진다. 수풀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바람 소리와 겹쳐 스산하게 들렸다.

미약하게 들려오던 피리 선율이 끊어졌을 때, 그 소리를 감지했던 다른 살수들은 ‘처리가 끝났구나.’라는 생각으로 정리하고 조금 안심했다. 특히 열댓 명의 살수들이 두 명의 흑살수와 연계하여 움직였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 조치를 확실하게 신뢰했다.

오직 허공만이 점차 경계심을 높이고 있었다.

‘방금 피리 소리 마지막이…… 아주 잠깐이지만 급격히 변했다. 변고(變故)가 틀림없어.’

미세하게 들려왔던 데다가 단말마에 가까운 변화였기에 어쩌면 그냥 무신경하게 지나쳐서 이언종을 고문하러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아니, 정말 몸을 돌리기까지 했다.

정말 본능적인 감각이 다시 복기해보라는 신호를 보내며 몸을 멈춰 세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스스스…….

허공이 흠칫 놀라 시선을 위로 들었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리며 주변까지 모두 돌아보았다.

사방 숲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허공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위협이 주변을 둘러치고 공포가 서서히 엄습해오면서 그들의 목을 옥죄고 있음을.

이런 적이 어디 흔한 일인가?

어둠 뒤에 숨어 표적의 목숨을 노리는 게 살수들의 업이거늘, 되려 자기들이 사냥당한다는 생각이 드는 이 상황이 익숙하지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제기랄, 오늘이 재수 옴 붙은 날인가?’

허공은 생각을 빠르게 굴렸다.

임무 완수를 위하여 이언종을 데리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지만, 혼자 몸이라면 충분히 생환할 자신도 있었다.

‘절충점을 찾아야지. 크크!’

허공이 발걸음을 떼었다.

절충점이란 게 별거 있나?

‘이언종을 죽이고 튀면 되는 거지.’

허공이 다시 움직여 동굴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붙잡기 위해 손을 내밀다가 갑자기 멈칫한다.

“……벌써 들어왔다고?”

허공이 혀를 차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피리 소리가 끊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기까지 침입을 허용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분노가 일었다.

몸을 비스듬히 돌려 뒤를 돌아보는 허공의 시선에 얼굴을 가리는 수풀을 손으로 밀어내며 모습을 드러내는 이혁성이 있었다.

“이언종은 거기에 있나 보군.”

“그렇다면?”

“충고하나 하지. 다시 문을 열기 위해 내게 등을 보이면 넌 반드시 죽는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바에야 격렬하게 저항하다 죽는 게 그나마 원이 덜할 것이다.”

“큭큭큭! 미치겠군. 이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고.”

“살문 신살수 양인귀 허공.”

이혁성은 허공을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신살수란 본래 자기의 살업을 공개적으로 행하는 자들.

넷의 이름이나 성격, 외모적인 특징은 적어도 강호에 적을 오래 두고 정보에 관심을 기울여본 자라면 모를 리 없었다. 하물며 흥경에서 살문을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던 이혁성과 황검당이 그 정도의 정보나 용모파기를 확인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허공은 자신을 대단히 높게 치는 자였으나 최소한 자신을 낮잡아보는 자들을 경계하는 좋은 습관은 있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이나 명성을 확인한 이후로는 다시 태도가 돌변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날 아는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네 정체나 밝혀봐라.”

“천무방 황검당 당주 비뢰검 이혁성.”

그런 의미에서 이혁성이 자신을 밝히자 허공이 끌끌 웃음을 흘린다.

황검당 자체는 천무방의 개편된 조직으로서 기억하고 있는 사항이지만, 이혁성이란 인물 자체는 그의 젊은 나이만큼이나 이제 떠오르는 신성 정도의 두려워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다.

살문에서 신살수들에게 천무방주 천무경은 표적 논외였으며 삼장로 가운데 백두기는 신살수 서넛이 모이면 사냥할 수 있는 자로 분류된다. 장태환과 지금은 없는 노지신은 신살수 둘로 사냥할 수 있는 자로 분류되었으며 그 이하 당주들은 남궁평만이 신살수 하나로 힘들 수 있다라는 가정을 할 뿐 모두 신살수 단독 임무 할당에 ‘가(可)’ 판정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대가리에 핏기도 덜 여문 새끼들이.”

복색으로 먼저 짐작했으나 이혁성이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확하게 누군지 파악되었으니 경각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스릉!

허리에서 뽑히는 살문의 흑도.

챙!

다시 그의 손안에서 둘로 나눠지는 가늘고 낭창거리는 양인(兩刃).

그 세검(細劍)으로 목표물의 살가죽만 육포를 뜨는 귀신같은 칼솜씨가 지금의 양인귀 허공을 만들었다.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속으로 파고드는 두 세검의 검은 칼날은, 그 연약해 보이는 외형 뒤에 가공할 살상력이 있으니 그 앞에서는 방심해도, 하지 않아도 죽음 앞에 절대 자유롭지 않다.

이혁성은 허리에 두 자루 검을 차고 있었다. 한 자루는 오른손으로 정수(正手)로, 다른 한 자루는 왼손을 역수(逆手)로 파지한다.

허공이 그가 원래 쌍검수였는지 잠시 기억을 되짚어본다.

“좋은 판단이다.”

“흥!”

이혁성의 말에 허공이 코웃음을 쳤다.

자기 앞에서 저런 거드름을 피운 자들 가운데 죽음을 피한 자가 없었다.

이혁성이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가며 달려들 자세를 갖추는 순간, 허공도 구유무영보를 펼치며 거리를 좁혀간다.

순간 허공의 눈앞이 번쩍거리며 소름이 쫙 돋았다.

정말 본능적으로 허리를 옆으로 꺾자마자 한줄기 섬광이 그의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시야에 보이는 모습은 정면으로 돌진해오는 이혁성과 앞으로 뻗었으나 비어있는 왼손이었다.

‘빠르다!’

비뢰검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쾌검의 달인이라더니.

좌수투검(左手投劍) 후, 우수발검(右手拔劍)인가?

찰나의 순간이 허공의 감각 속에 느리게 이어진다.

거리는 이미 서로의 간격이 교차하기 직전.

허공도 검의 빠르기로는 신살수 중에 최고 수준이었으니 두 자루 세검으로 수싸움에서 충분히 앞설 자신감이 있었다.

월식무흔도의 원형에서 발전된 형태의 초식이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허공의 두 세검에서 펼쳐지기 직전에 그는 다시 한번 눈앞에 보이지 않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큭!”

정말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옆구리에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무언가가 갈빗대까지 뚫고 관통했다는 느낌이 확 엄습해오는 순간, 허공의 눈에 이혁성의 왼손에 정수로 파지된 검을 발견했다.

‘……투검이 아니라 이기어검!’

그 생각이 미치는 순간, 이혁성의 우수발검과 어느새 돌아온 왼손의 검이 검광을 꼬리에 물며 날아들었다.

정상인 허공이었다면 반응하고 대응했을 텐데, 이미 자세가 무너지고 옆구리 근골이 박살 나면서 그럴 기회를 상실해버렸다.

서컥!

‘씨ㅂ…….’

하늘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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