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90화 (290/432)

290화 - 제53장. 인종 황제와 두 친왕(親王) (5)

이인우를 배려한 것인지 빌게포첸은 월왕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걷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다 다시 조금 걷는 등을 반복하면서 마치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시가지 쪽에서 들려오는 일상의 소음들을 귀에 담는 것 같았다.

다만 사색을 즐기는 건 좋은데 굳이 승려나 제자도 아닌 자신을 이렇게 끌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속에서 답답함을 지우긴 어려웠다.

‘하아, 빨리 돌아가고 싶구나. ……응?’

그때 이인우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와 빌게포첸은 연못과 수로를 따라 이어진 흥경 외곽의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골목길로 진입하는 지점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인우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아샤 감푸!”

아샤 감푸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인사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반기며 걸어올 때, 빌게포첸은 이미 이인우보다 먼저 아샤 감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와 함께 있는 남자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차분히 돌린 눈으로 응시하는 시선의 방향에서 서로 인사하는 이인우와 아샤 감푸의 어깨너머로 장포를 머리까지 둘러서 마치 자신을 감추고 있는 듯한 행색의 건장한 장한(壯漢)을 보았다. 그리고 그 건장한 장한, 안효철도 자연스럽게 빌게포첸을 쳐다보게 되었다.

“월왕 전하.”

아샤 감푸가 인사하는 모습에 이인우의 시선이 그의 뒤편으로 향했다.

고서점이 눈에 먼저 들어왔는데 그다음으로 안효철에게도 시선이 머물렀다. 이인우가 아샤 감푸를 발견했을 때는 그가 안효철과 대화하고 있던 모습도 같이 보았었기 때문에 눈길을 안 줄 수 없었다.

“자네가 고서점에 있는 모습이야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이런 자와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구먼. 그래, 누군지 물어봐도 되는가?”

“아, 그게…….”

아샤 감푸가 말꼬리를 흐리며 돌아보자 곧 안효철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 위로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가 역력하다.

안효철은 그런 아샤 감푸와 이인우 그리고 빌게포첸을 모두 한 번씩 보았다. 그리고 이인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소개도 없는 무례함이었으나 이인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효철의 위아래를 살폈다.

“자신을 꼭꼭 숨긴 행색이 수상하지만, 당장 내 오늘이 편안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감세.”

“……조만간 사죄 겸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그 말에 이인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안효철을 쳐다보았다. 대답이 나온 것도 의외였지만, 인사를 하러 온다는 말도 재밌게 들렸다. 오전에 중서령 한회열이 호위무사를 천거했던 일이 잠깐 떠오르기도 했다.

이인우는 피식 웃고는 안효철에 더 관심을 두진 않았다. 그저 아샤 감푸가 반가웠을 뿐, 그는 여전히 월왕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이인우와 아샤 감푸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안효철은 옆으로 조금 움직여서 이인우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빌게포첸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그도 안효철을 의식하여 은근히 바라보고 있었다.

‘날 의식하고 있군.’

안효철은 빌게포첸의 정체를 알았지만, 빌게포첸은 안효철이 누군지 몰랐다.

화경 또는 그에 준하는 수준끼리라면 서로의 존재를 사전에 인식해두지 않는 이상, 상대의 기력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의식적으로 기감을 정밀하게 조준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하는 수준은 대단히 높아서 어쩌면 평범한 필부로 느끼게 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안효철이 인식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그는 분명 빌게포첸보다 유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안효철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장(魔將)의 갑옷, 그 저주를 짊어진 자여.”]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전음의 내용.

이 귀에 꽂힌 전음의 주인은 분명 빌게포첸, 성혈신마의 것이었다.

* * * *

어쩌면 진도건이 고원성에서 흥경까지 계속 기감을 확장한 상태로 달렸다면 그들의 존재를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한시라도 빠르게 흥경에 도착하는 것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농가에 설마 살문의 살수들이 쉬고 있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침 살수들이 쉬고 있던 농가들은 대게 관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평상시의 기감은 어중간하게 닿지 않았고 그렇게 살문 살수들로선 운이 좋게 진도건 등을 지나침으로 인해서 손쉽게 남하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계획한 대로 살수들은 적정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제국충무왕 이언종이 50명가량의 호위대를 이끌고 상경하는 걸 발견했을 때, 4인의 신살수 중 하나인 양인귀(兩刃鬼) 허공(虛恐)은 홀로 관도 한가운데를 막아섰다.

달려오는 기마대를 막는 건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함께 따라온 살수들도 살검을 휘두르니 호위대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이언종은 그렇게 허공과 살문 살수들에게 납치되었다.

허공은 미리 계획한 대로 이언종을 데리고 산속 깊이 들어갔다.

그를 가둬놓을 동굴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나무 기둥들을 대어 동굴 안쪽에서도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게 두었고 입구는 문까지 만들어 설치했다. 살수들도 미리 정해진 위치에 들어가 보초를 세우고 주기적으로 동초(動哨)도 돌게 하였다.

그렇게 며칠 혹은 1, 2주까지 충분한 시간을 둔 채로 편히 쉬면서 이언종을 회유하고 협박하는 지루한 일만 치르면 됐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덜컥!

“하오문이…….”

“또, 뭐!”

허공이 버럭 성질을 부리자 인살수 심돈(沈敦)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의 보고를 제대로 듣기도 전에 허공은 손에 들고 있던 집게를 눈앞에 들고 흔들면서 계속해서 말로 쏘아붙여 댄다.

“야이 새끼야! 내가 하오문 같은 쓰레기들이 엮인 보고 따위를 들어야 하겠냐? 그런 떨거지 새끼들은 느그들끼리 알아서 처리하란 말이야!”

허공이 화를 내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하오문에게 자신들의 움직임을 추적당하고 있다는 보고, 그들을 처치했다는 보고가 반복해서 반 시진 간격 정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금의 상황이 민감하게 다뤄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림의 거물을 사냥하는 것도 아니고 하오문 조무래기를 사냥했다는 보고를 계속해서 듣는다는 게 그동안 허공의 자존심을 묘하게 건드렸던 것이다.

더군다나 허공은 의자에 결박당하여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언종을 막 고문하려던 참이었다.

그를 말로 협박하고 회유하는 건 이미 안 들어먹을 듯하니 며칠 더 헛심 켜지 말고 본격적으로 고문하여 그의 심지를 꺾으려고 한 것이었다.

허공은 씩씩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불같은 눈길이 닿자 이언종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허공은 의자 팔걸이에 묶인 이언종의 손을 붙잡고는 소지를 들어 꽉 쥐었다. 그리고 손톱을 뽑기 위해 집게를 들이미는데 심돈이 다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지금 저희가 사냥당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허공이 행동을 멈춘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돈을 노려보았다.

“하오문에게 다른 놈들이 붙어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일살수 다섯, 인살수 둘이 당했습니다.”

“흑살수들은 뭐하고?”

“어르신께 어떻게 할지 여쭤보라고 하셔서 온 것입니다. 지금 하오문놈들이 뭔가 저희 위치를 감지하고 있는 거 같은데, 당장은 쉬이 접근하거나 큰 움직임을 보여주는 게 없으니 저희가 치고 나갈지 안으로 유인해서 처리할지 판단을 요청한다고 합니다.”

“이 씨부럴…….”

허공이 손에 든 집게를 꽉 움켜쥐었다가 내려놨다. 그리고 이언종을 보며 콧수염 밑으로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제왕 전하께선 운이 좋구려. 퉤! ……가자.”

허공이 동굴 밖으로 휙 나가버리자 이언종은 두려움에 가득 차 의자 위에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고문이 시작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그의 몰골은 충분히 엉망이었다.

호위대가 살수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부관 주치는 그를 탈출시키려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선 살수들이 자신만 살려두고 나머진 모두 죽이려는 걸 깨닫자 절망스럽고 치욕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마치 포식자가 사냥감을 다루듯 이리 굴려지고 저리 굴려지면서 자신이 대백고국 황실의 친왕 신분이라는 사실마저 망각할 정도였다.

‘내 섣부른 판단이 일을 그르치게 했는가? 주치와 호위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었는가? 아아……!’

이언종이 스스로 자책과 탄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허공은 동굴이 있는 언덕 위에 올라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탐색했다.

하지만, 그도 당장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쉬이 감지되는 위험한 기척은 없었다.

직접 나서서 살피느냐, 흑살수들을 보내 살피느냐.

선택의 기로에서 문득 그의 귓가에 희미한 소음이 감지되었다.

“……들리느냐?”

“들리다뇨?”

“……조용히 하고 귀를 기울여보아라. 너라도 듣지 못할 소리가 아니니. 피리 소리다.”

심돈이 허공의 말을 듣고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들립니다.”

과연 심돈의 귀에도 아주 희미하게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새 지저귀는 소리로 착각했었지만, 찬찬히 들어보니 자연적인 운율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심돈의 대답도 허공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피리 소리에 집중하면서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었다.

‘거슬려…….’

이런 깊은 산중에서 피리 소리는 분명히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게 난다.

다시 한번 고민한다.

직접 나서서 살피느냐, 흑살수들을 보내 살피느냐.

이젠 신경을 쏠리게 만드는 요소도 발생하였으니 결정을 내린다. 이언종을 고문하려면 외부의 방해가 없어져야 할 것 아닌가?

“동쪽과 북쪽을 담당하고 있는 흑살수들에게 전하라. 저 피리 소리를 추적하고 필요하다면 제거하라고.”

“알겠습니다.”

허공의 명령에 심돈이 자리에서 빠르게 이동했다.

살문의 구유무영보는 인살수 이상의 살수라면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한다. 속도도 물론이거니와 소음조차 감추는 귀신의 족적을 그대로 구사해낸다. 또 허공과 같이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신살수들과 달리 흑살수는 언제나 몸을 감추고 다니는데, 흑살수 이하의 살수들은 살문 비전의 혼유향(魂油香)이라는 걸 상시 몸에 지니기에 동지들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살수들 간의 연계를 강화해주는 도구인 것이다.

얼마 뒤 흑살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흑살수는 모두 여섯 명이었으며 그중 흑살수 세 명이 휘하의 인살수, 일살수들을 거느리며 피리 소리를 좇기 시작했다.

나무를 타고 있는 다람쥐들도 그들의 기척을 지나치고 나서야 위화감을 느껴 도망칠 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은밀했다. 무림 고수가 청각에 극한으로 집중하더라도 그들이 듣는 건 숲속에서 들을 수 있는 여느 자연적인 소음뿐이었다.

그 속에서 피리 소리가 점차 그들에게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그 피리로 연주되는 구슬픈 운율은 살수들의 차분했던 심장박동을 조금씩 억누르는 것 같았다.

‘찾았다!’

마침내 살수들은 피리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그곳은 가까이에 작은 개울이 흐르는 곳이었다.

과거에 나무꾼들이 왔다 간 곳인지 산 아래 방향으로 나무들을 베어가 버린 탓에 인위적으로 형성된 산길이 나 있었다. 그런 나무꾼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끊긴 지점에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 중 한 명은 그루터기에 앉아 피리를 불어 그들이 듣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 여인은 모두 아름다웠으나 서로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다.

피리를 부는 여인은 대단히 고혹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고 또 그만큼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피리 소리는 마치 유혹하는 손짓처럼 느껴져서 구유무영보로 귀신과 같이 은신한 살수들은 심령이 피리 여인에게 떠나가려는 듯 흔들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피리 여인의 옆에 선 여인은 검객이었다. 복색은 한족도, 여기 북방민족의 것도 아니었는데 남쪽의 광동, 복건(福建) 지방 사람이 봤다면 왜인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피리 부는 여인이 검은색과 붉은색 그리고 망사 재질과 속살이 많이 드러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면 이 왜인 여인은 하얀색 바탕에 분홍빛 벚꽃을 수놓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용모도 빼어난데 차가운 서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녀들을 발견했을 때, 살문의 살수들은 처음으로 숨죽인 채 잠깐이나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외진 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여인이 둘이나 있다는 것에 색욕의 현혹이 있었지만, 동시에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게 되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