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 제53장. 인종 황제와 두 친왕(親王)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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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건이 정식으로 황궁에 입궁하였을 때, 안효철은 조용히 흥경의 아침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수삼 일 안으로 크게 싸울 것이라는 진도건의 예측을 이해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성혈신마라……. 어떤 적일지,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군.’
안효철은 가끔 짧은 잠을 청하거나 운기조식 겸 명상을 할 때면 사천에서 겪었던 강적들과의 전투가 떠오르곤 했다. 광혈신마 혁무술과의 싸움도 격렬했으나 단지운과의 짧은 충돌 속에서 받은 마도의 강렬한 인상은 과거 천무경과 비무했던 기억을 덮을 정도로 깊게 남아있었다.
탈혼갑의 저주를 받아들인 후, 탈혼갑과 신체 피부가 하나가 되어버린 듯한 상태는 여전히 이질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움직임에 불편함이 있진 않았다.
단지 오물에 축축하게 젖어버린 옷을 계속 입고 있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언제든지 목숨을 갈구하는 듯한 저주의 손길이 주는 간질거림이 불쾌함으로 상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천에서의 발작 이후로 그 같은 일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안효철은 그것이 완전히 치유되거나 해소된 상태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는 곧 코앞으로 앞둔 싸움이 만약 패배로 이어진다면 탈혼갑에게 모든 생명력을 빨려 죽었던 스승과 같은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얼마간 길을 걷고 나니 그가 잠시 멈춰 선 곳은 일전에 찾았던 고서점이었다.
안효철은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치고 고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 아이쿠! 안 대협, 아니십니까? 들어오십시오.”
“차 한 잔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요.”
고서점주는 안효철을 반기며 고서점 뒤편에 있어서 바깥의 시선이 닿지 않은 자신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좁은 단칸방이었지만, 누울 수 있는 좁은 단상도 놓았고 협탁 하나와 작은 의자 세 개 정도가 있어서 같은 하오문도나 손님을 모시고 차담을 나누기도 하는 곳이었다. 고서점주는 안효철을 벽에 가려지는 안쪽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그는 잠시 찻물을 준비하여 안효철과 마주 앉았다. 그가 앉은 위치는 딱 단칸방의 문 쪽에 있어서 바깥에 혹시 손님 등이 오는지 돌아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점주의 이름을 묻지 않았군.”
“소인은 오지홍(吳志鴻)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여긴 하오문의 거점으로 쓰이는 곳인가?”
“거점은 따로 있습니다. 여긴 거점보다는 현지에서 발생하는 날것의 정보를 모으거나 혹은 거점에서 온 사항을 최종 분출하는, 저희 용어로 전구지(傳口地)라고 합니다.”
안효철은 찻물을 홀짝 들이키면서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아샤 감푸는 조정에서 일어나는 날것의 정보를 여기에 전달해주는 것이로군.”
“그런 셈입죠. 중서성의 참상관이 고서점을 찾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니 딱 적당한 것이지요.”
“오늘 진도건이 황제의 호위무사로 천거 받아 입궁하였는데 그건 들었는가?”
“그건 몰랐습니다. 허허! 안 대협께서 물어다 주시는 정보를 받게 될 줄이야. ……허면 작전을 위한 행동인 것입니까?”
“그렇지.”
“황제를 지켜야 하는 일. 역시 어제도 옆에서 들으며 느꼈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슬으슬 떨립니다.”
오지홍이 자기 어깨를 두 손으로 안으며 부르르 떨자 안효철이 피식 웃었다.
“훗. ……그럼 내가 정보를 하나 물어 줬으니 그 대가로 나도 하나 여쭤보지.”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고원성의, 제국충무왕 이언종이나 황검당에 대한 소식은 아직 전해진 게 없는가?”
“아…….”
안효철의 질문에 오지홍이 탄식에 가까운 신음과 함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사실 저도 조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고원성 정도 거리는 전서구를 날리면 두어 시간 내에 정보가 정리되어 들어오기 마련인데 아직 이렇다 할 정보가 없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저희 측 인원들에게 사고가 발생했을 거라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말이죠.”
“……이미 사단이 벌어졌을 거라는 얘기군. 살문의 살수들에 의해 정보의 길이 끊어졌다…… 그런 것인가?”
“그렇습니다. 곧 충원되고 다시 조사되긴 하겠지만, 분명 난맥이 있을 것입니다.”
“흐음…….”
안효철이 오지홍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보의 길이 끊어졌다는 건…… 살문과 이언종이 마주쳤다는 얘기. 아마 가까이 있던 하오문도들은 살수들에게 이미 살해되었다는 얘기겠지.’
좁은 시간 폭 안에서 사태가 급변하고 있다 보니 가정을 둘 여지는 별로 없었다. 다만 찝찝한 것은 황검당이 하오문이든 이언종이든 어느 쪽과도 아직 접촉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효철의 생각이 조금 길어지는 사이, 앞에서 차를 홀짝이던 오지홍이 인기척을 느끼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가 있는가?”
한 중년인이 기웃거리면서 고서점에 들어오고 있었는데 오지홍이 그를 보고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양배(羊培)야, 마침 잘 왔다. 이쪽으로 와라.”
“마중도 안 나오고. 거기 누가 있나?”
양배라 불린 중년인이 단칸방까지 다가와 기웃거리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다가 안효철을 보고 흠칫 놀랐다.
“뭘 그리 놀라냐? 네놈 주제에 어디 생전에 천하오절 중 한 분이신 안효철 대협을 볼 수 있겠느냐?”
“어이쿠! 소인이 몰라봬서 죄송합니다요.”
“아닐세. 누구인지 소개나 해주시게.”
“소인 양배라고 합니다.”
양배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하오문인가?”
그 물음엔 옆에 있던 오지홍이 끼어들어 대답한다.
“녕하분타(寧夏分舵)와 전구지를 연결해주는 녀석입니다. 원래 아침 일찍 올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한참 늦었으니 뭐라도 갖고 왔을까 싶어 반긴 것이지요. 자, 양배야. 안 대협께서 기다리던 정보를 가지고 왔느냐?”
“물론이지. 아, 물론입니다요.”
양배의 대답에 안효철의 눈빛이 번뜩였다.
“뭔가?”
양배는 품에서 주섬주섬 종이 꾸러미들을 꺼내더니 그중에 몇 개를 골라 협탁 위에 펼치면서 대답을 이어갔다.
“제국충무왕 이언종이 지지난밤 전후로 흥경의 전령과 금나라 완안홍균의 밀사를 차례로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 낮에 호위대만 이끌고 흥경으로 올라오다가 길목에서 살문을 만나 호위대는 다 죽고 이언종은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안효철이 표정을 굳히며 묻는다.
“어제……! 그 소식이 이제야 확인되다니. 이거 심각한 것 아닌가?”
“그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어째서?”
“저희도 살문 놈들에게 당해 피해가 있었는데 그 비슷한 시기에 이미 황검당과 접촉한 소조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주 이혁성의 요청으로 황검당 검객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저희 조직을 총동원하여 흔적을 수색하는 작업을 펼쳤고 다행히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다는 내용까지 여기 이 전서에 적혀있습니다.”
양배가 내민 전서를 안효철도 꼼꼼히 읽으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과연 그의 말 그대로 적혀있었는데 이대로라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군. 잘하면 예상대로 흘러가겠어.”
안효철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리자 오지홍과 양배도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을 수 있었다.
황궁을 빠져나온 이인우는 묘하게 가슴이 뛰고 있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했다.
특히 황제와 중서령 한회열이 나눈 대화와 그 사내가 지나쳤던 그 순간의 위화감이 머릿속에서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마치 강제로 만들어낸 차분한 분위기에 돌이 떨어져 파문이 일어나는 듯했다.
이인우는 황궁을 함께 빠져나온 대신들과 차례로 헤어졌다.
이인우가 상념에 젖은 채 월왕부로 향하던 길을 걷던 중, 멀찍한 곳에서 뭔가를 보고 잠시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한 사람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월왕부를 얼마 안 남겨두고 도심 대로를 조금 벗어난 위치에 숲과 정자, 연못이 남아있는 장소였다. 거기에 한 승려가 뒷짐을 진 채 연못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찌 여기까지 나와계십니까?”
이인우가 승려 바로 옆까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때 승려의 손에서부터 가벼이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연못에 떨어지는 걸 보았다.
돌멩이를 잡아먹은 수면 위 원점을 중심으로 원형의 파문이 일었고 그 아래 잉어들이 놀라 지느러미를 펄떡이며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인우는 조금 전까지 걸어오면서 받았던 그 느낌이 눈앞에서 실체로서 펼쳐지자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승려가 쳐다보고 합장하며 인사를 했다.
“아미타불! 조정이 끝났나 보군요.”
“송구스럽지만, 라마께서 이렇게 월왕부를 나오시면 제 아내와 아이의 안위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자들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니 그때와 같은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겉보기에 예순 정도 되어 보이는 노승에 그리 크지 않은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에 안와골(眼窩骨)이 깊어서 자연스럽게 드리운 그늘에 빛나는 눈빛이 묘한 흡입력을 가진 그런 모습.
붉은 승포를 걸친 이 승려가 바로 성혈신마 빌게포첸이었다.
빌게포첸은 감히 이인우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물이 아니었다.
빌게포첸은 이인우에게 오늘날의 천마신교에 대한 백기군 증원 계획을 실행하도록 제의한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살문 살수들로부터 가족들을 지켜주는 수호자라는 모순된 사람이었다.
빌게포첸의 솔깃했던 첫 제안을 이인우가 거절하고 그가 돌아갔을 때, 그다음 찾아온 것은 스스로 주지화(朱持火)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살수였다. 빌게포첸의 태도는 정중했었으나 주지화는 시종일관 위협적이었다. 특히 검은 복면과 몸에 달라붙는 검은 옷으로 치장한 살수들이 부인과 아기를 지키는 호위무사를 포위했을 때는 일국의 친왕이자 추밀원사로서 분기탱천했었다.
하지만, 이인우의 분노는 부질없었다.
호위무사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죽어버렸다. 부인의 목엔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 그로부터 흐른 피가 하얀 옷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거로도 모자라 아기의 얼굴에까지 묻었을 때는 그의 자존심도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때마침 빌게포첸이 나타나 그 살수를 죽이고 가족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이인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하며 벌써 목을 매달았을 것이었다.
“본인의 처지가 이래 된 지 한 달을 훌쩍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저 할 일 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해서 제 처지에 적응한 게 아닙니다. 놈들이 수틀려서 또다시 칼을 들이밀면, ……그때는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변에 다른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이인우는 솔직한 심정을 담아 하소연한 것이었으나 빌게포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이어진 말은 듣기에 아리송한 말이었다.
“적체된 업보가 곧 끝나갑니다. 빈승도 짐을 덜어내기 전에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으니 월왕께선 이해해주시지요.”
이해해달란 말에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일국의 친왕을 협박하고 있는 주제에 이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은 채 두어 달 가까이 견디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요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냉엄한 현실이다.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그러시죠.”
속으론 ‘어서 월왕부로 돌아갑시다.’라 생각하면서도 이인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빌게포첸 옆에서 같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