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88화 (288/432)

288화 - 제53장. 인종 황제와 두 친왕(親王) (3)

이미 지나간 어느 날 깊은 새벽녘.

이인효는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의 심한 오한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은은하게 타오르는 몇 개의 촛불이 비추는 침소의 한가운데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서슬 퍼런 한기와 날 선 살기에 말문도, 숨도 턱턱 막혀옴을 느낄 때, 그자는 거만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뜻을 말하고 있었다.

“황제께선 앞으로 월왕 이인우의 기안을 재가하도록 하시오.”

짧지만, 분명한 요구.

엄연히 국정 간섭을 하겠다는 것이었기에 일국의 황제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네놈은 누군데 감히 짐의 침소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그따위 말을 하는 것이냐?”

지엄한 기세로 내지르는 호통은 침입자를 꾸짖음과 동시에 밖에 있을 그의 호위무사인 자소검(紫霄劍) 채진걸(采鎭傑)을 호출한다.

드르륵!

채진걸은 밖에서 졸고 있다가 호통 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황제의 침소에 정체 모를 노인이 이인효를 향해 서 있는 걸 보고 앞뒤 잴 것도 없이 바로 검을 뽑았다.

“노부의 이름은 사금령. 강호에선 나를 월하사신이라 부르지.”

그때 노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며 채진걸을 멈추게 했다.

사금령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으나 월하사신이 살문의 문주라는 것 정도는 채진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호위무사라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상대할 수 없는 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인효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황제께선 앞으로 월왕 이인우의 기안을 재가하도록 하시오.”

사금령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채진걸 따위 신경 쓰지 않는지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다 침소 문지방을 넘기 직전, 잠시 멈춰서더니 이인효를 흘끔 돌아보며 말한다.

“월하의 사신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은 없소이다. 부디 이 몸이 다시 이곳을 찾게 하지 마시오.”

잠시 말을 이어갔던 이인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느낀 치욕스러웠던 감정을 되새기고는 다시 눈을 떠 진도건과 안효철을 바라보았다.

“그대들도 본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가로 짐에게 그런 요구를 할 참인가?”

“……폐하께 무례를 범한 사금령과 그의 살수들을 처치하고 나면 소인들이 범한 오늘의 무례를 용서받는 것 외에는 이 나라의 국정이 원래대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옵니다.”

진도건이 다시 납작 엎드려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말과 행동에서 이인효는 눈앞의 남자를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짐은 황궁에 주로 머물기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많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짐이 알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명료하게 알려다오.”

진도건은 다시 상체를 바로 세우고 차분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셔야 할 것은 첫째로 월왕 이인우는 현재 살문과 천마신교의 고수에게 자신과 가족의 신병을 구속당한 상황입니다. 그가 반금파라는 점을 천마신교가 이용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가 협박에 굴복하여 파병과 관련된 기안을 폐하께 올리는지, 아니면 본인의 뜻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인지는 폐하께서 추문하여 판단하시옵소서. 일단 그의 신병은 여기 계신 안 대협께서 구출할 예정입니다.”

“동생의 일은 알아서 할 것이고, ……강호의 명성은 잘 모르는데 그대는 혼자서 이인우를 구출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돕는 다른 자들이 있는 것인가?”

“혼자 할 것입니다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생의 처와 그 아들이 위험해질 수 있을 거란 말인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계속 얘기해다오.”

안효철의 대답을 듣고 표정이 무거워진 이인효가 다시 진도건을 보며 얘기를 청했다.

“두 번째로는 고원성 원주도호부에 있는 제국충무왕 이언종을 살문이 노리고 있습니다. 예상으론 폐하께 상소를 오리기 위해…….”

“잠깐, 도성 밖의 조카까지 노린다고? 어째서?”

“아마도 오늘 제국충무왕이 관중 평야를 침략하려는 추밀원의 계획을 보고 받고는 반대 상소를 올리기 위해 상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마신교나 살문은 하나라에서 이뤄지는 파병 계획이 틀어지는 걸 원치 않으므로 일을 지연시킬 만한 장애 요소를 미리 차단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인효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오늘이라면…… 오전에 동생이 올린 추밀원의 기안에 직인을 찍었는데……. 그간 계속 같은 내용이었기에 면밀하게 살피지 않은 날이 하필 오늘이라니……!’

이인효는 슬하에 아직 후계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 이인우가 일찍 아들을 얻었을 때 몹시 기뻐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게 장성한 조카 이언종은 열정이 넘치고 강직하여 어려서부터 그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래서 친왕의 지위와 함께 제국충무왕의 봉호를 하사한 것도 다 황제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래도 살문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로 추측하지만, 이언종 전하를 보호하기 위해 제가 속한 천무방이란 곳의 예하 조직인 황검당이 전하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 폐하께선 심려 놓으십시오.”

“안전이 확실시된 것도 아니니 괜히 짐을 위로할 필요 없다. 계속 얘기하라.”

“예, 폐하. 어쨌든 그로 인해 사태는 수삼 일 내로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황검당이 이언종 전하를 보호하여 상경한다면 살문은 그걸 막기 위해 전력의 중심을 그쪽으로 옮길 것이고 그럼 월왕부의 감시도 옅어질 것입니다. 그때 안 대협께서 남은 적들을 제압할 것입니다.”

“사금령이 짐을 찾아올 텐데 그건 어찌하려느냐?”

“소인이 폐하를 지킬 것이옵니다.”

“동생을 지켜주는 사람은 천하오절 중 한 사람인데, 자네의 실력을 짐이 믿어도 되는가?”

이인효가 안효철을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의 대화가 오가는 건 전적으로 사금령과 그가 이끄는 살문을 대적하려는 행위를 하기 위함이었다. 사금령이 늘어놓았던 엄포를 떠올려본다면 당연히 천하제일을 다투는 고수들이라는 천하오절 중 한 사람이 자신을 지켜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인효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사람은 진도건이 아닌 안효철이었다.

“그는 마교에 상극과도 같은 자. 마교의 수족이 된 살문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그의 능력은 천하오절보다 배는 더 훌륭합니다. 사금령의 살기가 감히 폐하의 옥체에 닿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절대 그를 곁에서 멀리 두지 마십시오.”

“그 정도인가?”

안효철의 장담하는 어투에 이인효가 다시 한번 진도건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한족의 사내, 적발과 적안이 도드라지는 특징적인 용모와 별개로 황제인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그 기백이 젊은 나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새삼 대단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좋다. 짐에게 할 말이 또 있는가?”

“아까 얘기하셨던 채진걸이란 자는 어디 있습니까?”

“조정에 들거나 외유를 나갈 때나 불러서 곁에 둔다네. 이미 사금령이 제 마음대로 침소에까지 침입한다는 걸 알았고, 그자를 막지도 못하는데 가까이 둘 필요성을 못 느껴서 호출할 때 아니면 근위소 같은 데서 쉬라고 하였네.”

“알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내일 조정 때 중서령이 소인을 천거하도록 하시옵소서. 그러면 곁에 두시기에 자연스러울 것이옵니다.”

“하하! 좋다. 내 그것을 위한 친서를 써주겠노라.”

진도건의 기발한 생각에 이인효가 웃음을 지었다.

이튿날.

하나라 정전(正殿)인 광안전(廣安殿)에서 조정 회의가 열렸다. 조정은 약 한 시진 가까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끝낼 때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시간 속에서 이인효는 이인우의 표정을 틈틈이 살펴보고 있었다.

“추밀원사는 군 편성이 잘 돼 가는가?”

이인효는 조정 대신들의 발언들을 가만히 듣는 체하다가 이인우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이인우가 어깨를 움찔 떨며 용상에 앉은 자신의 친형이자 인종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모레 오전 중엔 집결을 완료하여 출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지휘관은 누구인가?”

“장군 마구트입니다.”

“흐음, 추밀원사는 들으시오.”

“예, 폐하.”

“그동안 추밀원의 계획으로 군사이동이 잦았는데 조만간 점검할 필요성이 있어 보이오. 그동안 추인된 계획들을 정리해두도록 하시오. 사나흘 뒤에 짐이 원할 때 개별 보고를 받도록 하겠소.”

이인효의 명령에 이인우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의도지……?’

이인우는 자신이 혹여 불안한 기색을 내비칠까 두려워서 모은 두 손 뒤로 얼굴을 가린 채 허리를 숙였다.

“추밀원사 이인우, 황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인효는 고개를 끄덕이곤 조정대신을 둘러보았다.

“그럼 대신들 중 더 할 말이 있는가? 없으면 오늘의 조정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조정이 해산되면서 대신들이 하나둘씩 광안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인우도 돌아서서는 심기가 불편해진 표정으로 걸어가서 막 광안전의 문지방을 넘어설 때였다.

문득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근위병의 옆에 한 사내가 검을 패검한 채로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자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이는데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평범한 검객처럼 보이기엔 어딘가 모르게 시선을 사로잡는 구석이 있었다.

“폐하, 신 중서령 한회열(韓回洌)이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때 광안전 안에서 중서령 한회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인우도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이냐?”

“소신이 우연한 인연으로 대단한 실력의 검객을 알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그간 호위무사에 대한 근심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한번 곁에 두고 살펴보시는 것이 어떠시옵니까?”

“그래? 중서령이 추천하는 자라고 하니 궁금하군. 기다리고 있다면 들라 하게.”

“예, 폐하. 검객 진가(進家)는 들어와 폐하께 예를 갖추어라!”

이인우는 둘의 대화를 끝까지 듣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엔 이인효와 눈이 마주쳐 허리를 숙여 다시금 예의를 갖추었다. 그런 그때 한 사람이 그를 스칠 듯 가까이 지나치며 광안전 안으로 들어섰다.

가까이 다가올 때의 방향이나 아래로 보였던 복식이 근위병 옆에서 서 있던 검객이 분명했다.

처음 봤을 땐 보지 못했던 하얀 가죽으로 표면을 감싼 검집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그 잠깐 사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머리카락이었다. 끄트머리가 찰랑거리는 것만 보았는데 햇살에 노을빛처럼 붉게 반짝거린 것이 햇살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착각이 일었다.

이인우가 허리를 펴고 다시 광안전을 봤을 때 그의 눈동자엔 실내의 그늘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저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검객의 뒷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폐하의 곁엔 자소검 채진걸이 있는데……. 하긴 최근엔 예전만큼 가까이 두고 계시진 않았지. 그런데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군. 중서령이 천거하는 검객이라…….’

이인우는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광안전 앞 계단을 내려갔다.

이인우가 그렇게 떠날 때, 광안전 내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채진걸은 의아한 표정을 하고서 광안전 안으로 들어오는 검객을 보았다. 처음 들어올 땐 실내 그늘 때문에 느끼지 못했으나 햇살이 다시 비추는 구간을 지날 땐 그도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중서령이 천거하는 검객의 나이가 젊다고 여겨지는 건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만큼 특징적이지 않았다.

“그래, 그대 이름은 뭔가?”

“소인 진도건이라 하옵니다.”

황제의 물음과 검객의 답변에 채진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호에 적(籍)을 두지 않게 된 지 벌써 5, 6년 되어서 그런지 아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어렴풋한 느낌이 머릿속을 가렵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점들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황제가 그를 두고 새로운 호위무사를 기용할 태세라는 것이었다.

‘쳇! ……그나저나 이를 알리긴 해야겠지?’

그때 채진걸의 머릿속엔 황제의 침소에 숨어들어와서는 서슬 퍼런 살기를 내뿜었던 한 노인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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