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 제53장. 인종 황제와 두 친왕(親王) (2)
전령은 이언종의 상소를 들고 그날 저녁 고원성을 떠났다.
이르면 내일 정오 전후로 도착할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군 편성이 되기 전에 상소가 올라갈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언종은 전령이 떠나자마자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저 상소로는 부족하다. 내가 직접 폐하를 뵙고 읍소하여야 이 결정을 철회하실 것이다. 하지만……, 황검당은 대체 언제 온단 말인가……?’
병력의 편성이 완료되고 군이 출발해지면 그것 자체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의미일 지도 몰랐다. 그런 자명한 예측 속에서 이언종의 심정은 한 글자씩 써 내려갈수록 더 조급해져만 갔다.
그날 밤, 이언종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당장 움직일 수 없다는 그 조급함과 하루라도 빨리 황실의 결정을 돌려놔야만 한다는 제국충무왕이란 봉호에 걸맞은 책임감이 그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다시 아침을 맞이하여 세수로 피곤한 정신을 일깨우는 그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금 세종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완안홍균이 보낸 밀사(密使)가 고원성 원주도호부에 도착했다.
관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서둘러서 도호부로 나온 이언종의 손에 밀사가 전달한 서신이 펼쳐졌을 때, 그의 조급함은 마침내 폭발했다.
“하국의 정사(政事)가 저 먼 천산에 있는 불온한 세력에 의해 농단되고 있음을 위대하신 대금의 황제 폐하께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오. 그러나 황제 폐하의 배려가 오래갈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그대, 제국충무왕께선 하지 않으시길 바라오. 오랜 전란 끝에 우리 삼국은 상호 간에 화친을 맺고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데 간악한 무리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어 실망스러운 행태를 반복한다면 대금의 황제 폐하께서 어찌 하국의 황제를 신뢰할 수 있겠소? 부디 현명한 결정과 행동으로 양국 간의 신뢰가 깨지지 않도록 제국충무왕의 지혜와 충언을 빌려주시오. 대금 조왕 추밀부사 완안홍균.”
이언종은 완안홍균의 대리 친서를 받고서 더는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그는 밀사를 내보내고 주치를 돌아보았다.
“주치! 지금부터 흥경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말들과 호위대를 편성하라.”
“전하, 황검당이 올 때까지는 기다리시라는 진도건과 안효철의 당부를 상기하시옵소서.”
이언종이 듣고 잠시 멈칫했으나 그 말 한마디로 꺾일 만큼 뜻이 어설프게 서지 않았다.
“시기를 놓치면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제 보낸 상소가 올라가고 곧바로 내가 입궁한다면 폐하께서 더 강한 인상을 받으실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주치는 잠시 고민했다.
‘왕명을 거역해서라도 전하께서 황검당을 기다리게 하라.’는 안효철의 신신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도 대하국이 작금에 처한 볼썽사나운 현실에 심각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전하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주치가 더 말리지 않자 이언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 더 던진다.
“인원이 많으면 이동에 제약이 많을 것이다. 하루 내내 말을 탈 수 있는 체력을 가진 자들로 엄선하여 최소 인원으로 꾸려라.”
“예.”
주치가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언종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건 금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다. 더는 나라가 외부인들의 협잡에 농단되지 않고 기강을 바로 세우며 국력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얼마 가지 않아 병사가 들어와 준비가 끝났는 보고를 하였다. 그 사이 이언종도 관복에 더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칼을 허리에 찼다. 어쨌든 지금의 행동에 있어서 위험성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각오를 복장에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언종은 주치가 편성한 50명의 호위대를 보았다. 병사들의 면면이 그도 익히 알고 있는 무공이 뛰어난 자들이었고 각자 상태가 좋은 군마를 두 필씩 배분하여 흥경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준비한 모습이었다.
이언종이 말에 오르자 옆에서 주치가 따라서 말을 타며 입을 열었다.
“수문대장에겐 황검당이란 조직이 오면 사정을 전달하라 해두었습니다.”
주치의 말에 이언종은 긴장감이 등골을 스치는 걸 느꼈다. 도호부를 나오기 직전에도 그들을 떠올렸다가 불안감이 같이 들었는데 주치가 한 번 더 거론하니 머릿속의 불안감이 괜히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결정을 물릴 순 없지.’
황실의 친왕이 직접 내린 결정을 본인이 어찌 쉽게 뒤집을 수 있겠는가?
“출발한다!”
이언종과 주치, 50기의 호위대가 고원성의 대로를 관통하여 북문을 통해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들이 지나는 대로변에서 그리고 시장과 도호부 주변에서 하오문의 눈에 의해 차례로 관측되고 있었다. 반 각 뒤엔 성내에서 비둘기들이 많이 날아다녔으며 그것들은 곧 동쪽 구릉지 쪽으로 향했다.
한편 고원성 외에도 흥경으로 올라가는 길의 중간중간에 있는 농가들에도 하오문의 눈과 귀가 있었다.
이언종과 호위대가 관도를 통해 꼬리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리는 모습들이 차례로 관측되었고 그때마다 비둘기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곧 하오문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관도가 비스듬히 방향이 꺾이면서 좁아진 산세로 인해 중간 시야에서 벗어나는 길목에서 이언종과 호위대가 예상된 시점이 지나도록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오문도들은 서둘러 그 길목으로 향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끔찍한 참상의 결과였다.
사람과 말의 사체, 그 피들로 더럽혀진 관도.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이언종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끄으…….”
아직 산 자가 있었는지 신음을 쫓아서 움직였던 하오문도의 인상이 심히 일그러졌다.
두 다리가 잘려서 엄청난 양의 피가 그 아래로 흐르고 복부에선 내장마저 흘러나올 정도였음에도 지금까지 간신히 숨을 붙들고 있는 이유.
“저, 전하를…… 황검… 당에게…….”
주치가 간신히 손가락을 세워 서쪽 산세를 가리켰다. 그러나 곧 바들바들 떨던 팔이 힘을 잃고 툭 떨어뜨리니 그 모습이 참으로 애달프다.
마침내 숨을 거두어 황천을 건넌 주치였으나 얼굴에 남긴 후회스러운 표정까진 가져가지 못한 듯했다.
* * * *
그날, 흥경의 낮은 그간의 쌀쌀한 날씨와 대비되게 바람은 잔잔하고 햇볕은 따스했다.
이인효는 일부러 창문을 열어서 햇살이 침상을 비추게 하였다. 그리고 비단 손수건으로 눈만 가린 채 오침을 청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의 따스함은 체온을 적당하게 유지해주고 선선하게 스며드는 바람은 긴장감을 떨어뜨려서 설쳤던 밤잠을 대신해서 꽤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잠에서 깬 것은 불현듯 엄습해온 오한 때문이었다. 그 오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또렷해지는 정신 때문에 불쾌한 기분이 확 올라오는 듯했다.
“흐음…… 엇!”
신음과 함께 눈을 덮었던 손수건을 치우고 침상에서 일어나던 이인효는 깜짝 놀랐다.
그의 앞에서 두 사내가 바짝 몸을 낮춰 엎드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방립을 옆에 둔 채였는데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바깥으로 드러낸 손등에 비늘같은 갑옷이 감싸져 있는 게 보이는 등 각자 인상적인 특징을 가진 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바로 진도건과 안효철이었다.
이인효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잠깐 생각하고 있었다.
‘자객……이라기엔 엎드려있는 건 불경한 의도는 없다는 것인가?’
휘이이잉…….
문득 실내로 들어오는 바람에 열어둔 창문 쪽으로 시선이 잠깐 쏠린다.
“짐이 그대들이 침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셈이로군.”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이인효의 목소리에 진도건과 안효철은 살짝 상체를 세우려는 듯하더니 다시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소인들의 불경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이인효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당장의 상황은 두렵기도 하고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눈앞의 두 사람은 선명하게 자신들이 적이 아니라는 자세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스스로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이 우발적인 상황을 긍정적인 결과로 유도할 수 있을지는 명백하기에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짐은 지금 몹시 불쾌하다. 설령 짐의 목숨이 그대들의 칼 앞에 풍전등화라 할지라도 이 상황을 배려할 마음 따위 추호도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스스로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소상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소인은 진도건이라 하옵고, 제 오른쪽에 계신 분은 강호무림에서 천하오절의 지위와 더불어 철갑권왕이란 별호를 가지신 안효철 대협이십니다. 소인들은 대금 황제 폐하의 칙령을 받들어 현재 감숙에서 벌어진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라에 암약하고 있는 적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암수로부터 제 앞에 계신 황제 폐하와 두 친왕을 지키고자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침소에 들어왔사옵니다.”
진도건은 단숨에 이곳에 온 목적의 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돌려 말하는 것이 없으니 이인효로서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국정을 보면서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줄 사람들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인효는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강호의 일에 대해 짐이 아는 건 적으나 천하오절이 천하제일고수를 다투는 자들이라는 것과 창천맹이 어떤 조직인지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게다가 금 황제의 칙령을 받들었다라……. 좋다, 네 말을 신뢰한다고 치면 너는 여기에 암약하고 있는 적들이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지체 없이 말해보라.”
“현재 하나라는 감숙에서 천마신교라는 마교가 주도하는 전쟁에 군사를 증원해주는 결정을 반복해서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라 깃발을 달지 않고 신분을 감추는 것은 금나라와의 직접적인 분쟁으로 휘말리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것은 요행을 바란 결정이었고, 운이 좋게도 금나라는 요행을 수용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짐 앞에서 늘어놓기엔 상당히 건방진 말이지만, 틀린 것도 아니니까 계속해서 들어보지.”
“현재 추밀원사인 월왕 이인우는 반복해서 군사를 보내기 위한 기안(起案)을 올리고 있고 폐하께서는 이를 계속해서 재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선정을 베풀면서 평화를 유지해온 폐하께서 행하신 그간의 정책 기조와는 명백하게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자넨 경망스럽게도 짐에게 질문을 던지는 걸 참으로 좋아하는군. 그 이유가 자넨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안위를 위협받고 있는 것은 월왕 이인우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자들은 분명 폐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로 인한 위협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계시기에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바로 앉거라.”
진도건과 안효철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납작 엎드린 상태로 얘기해왔었다.
이인효가 비로소 그들이 바로 앉도록 허락하였으니 두 사람은 엎드리던 자세에서 상체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이인효의 용안(龍顏)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서하의 황제로서 올해 47세인 이인효는 어진 인상과 품위를 오롯이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치세에 서하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운 만큼 그의 기력도 충만해 보였으니 황제의 침소에 침입한 두 사람 앞에서도 태도에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런 이인효가 침입자들을 향하여 모순된 신뢰의 눈빛과 함께 그 붉은 입술을 열어 심중의 고민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한두 달 전쯤, 짐은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은 바가 있다. 그자는 스스로 살문의 문주라 하였으며 자신을 사금령이라 소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