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 제53장. 인종 황제와 두 친왕(親王) (1)
진도건의 표정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파병 내용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소?”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예를 들면 파병의 성격이라던가 진군 경로 같은 것 말이오.”
아샤 감푸가 신중히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보니 뭘 우려하시는지 저도 알 것 같군요. 파병 성격은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이번 파병의 지휘관이 마구트 장군입니다. 대단히 호전적이어서 선봉이 아니면 절대 서지 않는 장군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간 백기군(白旗軍) 파병이 이뤄지면서 만인장 이상의 장군급은 편제에 포함된 적이 없었는데 이번이 처음으로 지휘관에 배정받았더군요. 무엇보다 고원성을 통과하는 경로로 알고 있어서…….”
백기군은 ‘대하국 깃발을 내린 군대’, 다시 말해서 출신을 감추기 위해 그 나라 깃발이 아닌 아무런 표식 없는 하얀 깃발을 든 군대라는 의미였다.
아샤 감푸가 한 말의 내용은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관중을 침공하겠다는 계획이로군.”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삼국이 평화로운 시기에 관중을 침범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고, 두 분이 여기까지 온 건 이미 금 황제도 백기군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되면 금의 군사력이 서하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송도 약해진 금의 국경을 노릴 수밖에 없게 되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될 위험이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군이 관중을 유린하는 걸 두고 볼 리도 만무할 테고…….”
아샤 감푸와 고서점주가 차례로 위험한 지점들을 조목조목 짚는데 하등 틀린 말이 없었다.
진도건이 두 사람의 얘기를 듣다가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아샤 감푸를 보며 묻는다.
“흐음. 혹시 이 소식이 일찍 고원성으로 전해질 수 있소?”
“고원성 말입니까? 거긴 월왕 전하의 아드님이신 제국충무왕 전하께서 원주도호부로 계신 곳인데……. 도호부도 추밀원의 관할이니까 황궁에 있는 제국충무왕 전하의 사람이 전령을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어제 움직였을 수 있겠군.”
“그렇겠죠.”
진도건과 안효철의 시선이 마주쳤다. 새벽에 흥경으로 올라오는 길에서 야영 중이었던 병사 한 명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병사가 전령일 것 같다는 판단도 함께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좀 더 복잡해졌습니다.”
진도건이 안효철을 보며 말했다.
“그 병사가 추밀원 결정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라면 이언종의 심리가 매우 흔들릴 수 있겠어. 이언종 전하의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가?”
“올해 스물다섯입니다.”
아샤 감푸가 바로 대답했다.
“지성의 높음은 나이와 상관없지만, 젊은 혈기는 주체하기 어려운 법이네.”
“황검당의 호위와 상관없이 뛰쳐나올 수도 있다고 보는군요.”
“자기 주관도 강해 보이니 그럴 확률이 높겠지.”
안효철이 확신에 가까운 판단을 내리고 있으니 진도건도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완안홍균과 제갈무문으로부터 얘기를 듣고 출발할 때도 이 사태는 이미 폭풍전야의 단계에 와있으며 곧바로 격랑이 휘몰아칠 것으로 짐작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상황을 전제하여 계획을 세워도 결과를 예측하기도, 어찌어찌 예측해도 그것대로 흘러가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잠깐…….’
문득 진도건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황이 더 꼬여버렸지만, 극단적으로 몰릴수록 그 후일도 명확하게 흘러가겠지요.”
안효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보시오, 점주.”
진도건은 안효철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서점주를 불렀다.
“예.”
“고원성에도 하오문도가 있소?”
“물론입니다. 언어가 통하는 지역이라면 어디든 저희 조직은 항상 존재하지요.”
“그럼 즉시 전서구를 띄우든 해서 고원성의 동료들에게 전하시오. 현재 천무방의 황검당이 제국충무왕 전하를 보호하기 위해 고원성으로 이동하는 중인데 그들을 빨리 불러들일 수 있도록 하시오. 그리고 만약 제국충무왕 전하가 성 밖을 벗어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소식이 늦지 않게 황검당에 전달할 수 있도록 조치를 부탁드리오.”
“천무방의 요청은 상부의 지시나 다름없지요. 말씀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소인이 할 일은 없습니까?”
고서점주의 말이 끝나자 아샤 감푸가 끼어들어 물었다.
“이미 많은 역할을 해주셨소. 단언하긴 어려우나 며칠 내로 사태가 급변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오. 침착하게 일상을 유지하시면서 안전을 챙기시길 바라오.”
“제게도 뭔가 지시를 내려주면 했는데 아쉽군요.”
“보다시피 당장 이곳엔 나와 안 대협 둘 뿐이니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아지면 곤란해지지 않겠소?”
“그것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수긍하는 아샤 감푸와 고서점주에게 진도건이 포권을 취했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겠소이다.”
“아무쪼록 이 문제를 잘 해결해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진도건이 고서점을 나오자 안효철도 순순히 따라 나왔다.
진도건이 앞서서 움직이는 데로 안효철도 그의 뒤를 쫓아서 골목을 돌았다. 여전히 살문의 시야를 피해서 움직이는 것이었으니 얼마간 이동 후, 잠시 발걸음을 멈추자 안효철이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아까 내가 물었던 말에 얘기해주겠나? 극단적으로 몰릴수록 명확해진다니?”
“안 대협께선 이언종이 반드시 움직일 거로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건 저희가 예상한 일반적인 상황을 벗어난 것인데 역지사지로 살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그건 어쩌면 이언종을 고원성에서 끌어내기 위한 계책일 수도 있습니다.”
“그 상황이 계책이다?”
“예.”
“설명해보게.”
“아시다시피 이언종은 황제의 친왕으로서 신임이 두터운 인물입니다. 비록 월왕 이인우가 자신의 아버지이고 또 추밀원사라 하더라도 같은 친왕의 자격을 가진 이상, 자신의 도호부와 고원성을 지나서 관중을 침략하는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안 대협께서도 이언종이 움직일 거로 생각한 것처럼 그들도 같은 예측을 했을 것이고 아마 그 기회를 이용해 이언종의 신병을 억류하려 들 것입니다.”
“억류? 암살이 아닐 것이란 확신이 있는가?”
“살문이 이인우를 관리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서하 황족들의 신병을 관리하여 그들로부터 군사적 증원을 유도하는 것에 역할이 있는 것이지 황실 전복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황실을 전복하려는 무리수를 둘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은 작금의 인종 황제든, 월왕 이인우든, 제국충무왕 이언종이든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살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우리가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이언종을 황검당에서 구출하여 흥경으로 올라온다면 살문은 그걸 막기 위해 무리수를 둘 것입니다. 아마 황검당을 상대하기 위해 살문의 전력을 대거 이동시킬지도 모르고요.”
“월왕부로 접근도 용이해질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진도건의 설명을 듣고 나자 안효철도 흥경에 입성하기 전까진 흐릿했던 향후의 상황들이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안효철이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진도건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머리가 잘 굴러가는군.”
“그렇습니까?”
진도건도 웃으면서 괜히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렸다.
상단전의 개화에 적응할수록 진도건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른 계산과 판단을 수행할 수 있었고 그것은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역에 접근하고 있었다. 진도건의 이런 발전된 경험이 혈마에게 녹아드는 것처럼 다른 방식의 사고와 판단을 하는 혈마의 그것도 진도건에게 영향을 주어서 여러 의미로 경계를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그런 통제 범위를 벗어난 보이지 않는 변화를 자신은 느끼기 어려웠으나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여러 형태의 감정이나 느낌 등으로 변화의 자극을 받고 있었다.
진도건에게서 영감을 얻고 발전을 꾀하는 영은성과 최현걸의 감화(感化).
진도건이 품는 내적인 고민이나 일신상에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 천서은이 보내는 걱정.
그리고 동료와 연인에게서 비롯되는 일종의 족쇄에서 벗어나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진도건이 보여주는 판단의 깊이에 안효철이 느끼는 감탄까지 이 모두가 같은 맥락 위에 있는 것이었다.
* * * *
진도건과 안효철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새벽에 그들이 본 병사는 추밀원에서 사무를 담당하던 낭사(郎舍) 하나가 이언종에게 보낸 전령이었다.
당연히 병사가 품은 전언엔 추밀원에서 전개된 회의 내용과 다음 날 월왕 이인우가 황제에게 재가를 얻을 계획이라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진도건 등이 아샤 감푸를 만나 대화하던 같은 시간에 원주도호부에서 이언종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뭣이? 마구트가 5만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넘어 관중으로 갈 것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이언종의 진노는 대단했다.
기실 감숙 지역은 진령과 육반 두 산맥의 장벽으로 인하여 금의 지배력이 서하의 지배력과 모호하게 충돌하는 곳이었다. 과거에 송을 상대로 서하가 감숙 지배권을 모두 가졌었으나 금이 송을 물리쳐 남쪽으로 쫓아내고 중원의 패권을 쥐었을 때는 서하도 천수와 난주 등을 덩달아 내어주었다.
하지만, 금이 천수와 난주를 대하는 태도와 관중의 진창, 장안 두 성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감숙의 두 성은 내줘도 그만일 정도로 지리적으로 산맥에 가려진 것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관중 평야로의 침략은 곧 금의 본토라 할 수 있는 화북으로 길이 열리게 된다는 뜻이기에 금 황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접근이었다.
“이렇게 되면 금과 전면전까지 확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뻔한데 추밀원의 멍청이들은 대체 뭘 한단 말이냐?”
“고정하십시오, 전하.”
주치가 이언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이곳 원주도호부를 관리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곳에 군사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모두 전하의 재량에 달린 것이니 마구트 장군이 오더라도 내보내지 않고 묶어두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사옵니다.”
이언종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너무 무른 판단이다. 이 성은 국경과 가까운데 여기에 군사가 몰리면 금의 황제도 의심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선제적으로 조치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아마 흥경에서 군사를 편성하기 시작했을 테니 곧 간자들에 의해 금 황제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군이 완전히 편성되기 전에 막아서 아예 출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야.”
이언종은 머릿속으론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판단을 끝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계산은 끝내지 못했다.
천마신교와 살문의 존재 문제가 해결되기엔 진도건 등도 이제 흥경에 도착했을 것 같았고, 그들이 얘기했던 황검당의 도착도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당연히 진도건 등이 떠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서 이언종도 벌써 문제가 해결되었길 기대하는 게 무리란 걸 알았다. 그러나 흥경에서 도착한 전령이 전한 소식 때문에 스스로 조급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황제 폐하께 군의 편성을 연기하도록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아, 일단 그리하자꾸나. 여봐라.”
“예, 전하.”
“네가 예까지 오느라 수고가 참 많았는데, 나를 위해서 다시 한번 흥경으로 가줘야겠다. 일단 황제 폐하께 올릴 상소문을 쓸 터이니 바깥에서 쉬면서 기다리다가 여기 부관이 전해주거든 가지고 바로 출발하여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주치는 기다렸다가 내가 상소문을 써서 주거든 저 병사에게 충분한 포상금까지 함께 줄 수 있도록 하여라.”
“예, 전하.”
전령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도호부를 나가는 사이에 이언종은 자신의 집무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붓을 들어서 상소문을 일필휘지의 기세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