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 제52장. 제국충무왕 이언종 (4)
대화의 흐름은 서서히 마무리에 접어드는 듯했다.
이언종은 성내의 경비 강화와 혹시 모를 증원군의 이동에 대해 성을 넘지 못하도록 주치를 시켜 군사들에게 전파하도록 보냈다. 그리고 그가 지시를 내리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세 사람은 소소한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강호 무림의 허상과 같은 얘기에 대한 이언종의 질문이 있었는데 얘기를 해줘도 잘 믿지 않는 듯했다.
곧 주치가 돌아오자 진도건과 안효철도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대화 즐거웠네.”
“떠나기 전에 전하께 한 가지 더 당부를 드리려고 합니다.”
“말해보시게.”
“전하께서 작금의 사태를 우려하시는 건 국력의 손실이라는 잠재적 가치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병사 개개인의 목숨도 소중한 것이겠지만, ……그만큼 전하의 목숨도 소중히 다루셔야 합니다.”
“분위기 좋게 잘 얘기하다가도 떨떠름한 얘기를 이렇게 또 던지는구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마교도 분명 전하의 의견을 누르고, 이곳 고원성과 도호부를 넘어 군사를 보내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 부관이 잘 호위할 거로 생각하지만, 이곳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도성으로 올라가시는 게 아니라면 적들의 암수 앞에서 병사들로만 호위를 꾸리시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반드시 황검당과 당주 이혁성이 도착한 이후에 움직이십시오. 그들만이 전하를 안전하게 도성까지 호위할 수 있습니다.”
이언종과 주치는 진도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주치도 무공을 익혔고 꽤 높은 수준의 내공을 갖춘 자였으나 그의 삶은 서하의 좁은 영토에 국한되어 있었다.
주치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언종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자 입을 꾹 다물었다.
“하하하하! 진도건, 그대는 그 사람들의 실력을 대단히 신뢰하나 보군. 난 그만큼 여기 주치 부관과 우리 강군의 전투력도 대단히 신뢰한다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자네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대백고국을 위한 것, 절대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을 것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가시게. 주치는 성문 밖까지 데려다주고 오라.”
“알겠습니다, 전하.”
진도건과 안효철은 앞서서 움직이는 주치의 뒤를 따라서 도호부를 나섰다.
진도건과 안효철은 흥경까지 말을 구해서 가기로 했고 주치는 기꺼이 군마 두 필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말고삐를 쥐고 이동하여 북문에 이르자 주치가 두 사람이 말에 오르는 것을 잠시 지켜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제국충무왕 전하께서 웃어넘기시긴 했으나 마지막 그 걱정은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었소.”
“그렇게 여기시오?”
“우리 군사들의 전투력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히 크시오. 징병제를 하고, 여군도 모집하며 포로조차 가리지 않고 징용할 정도로 우리 대하는 군사력 증강에 언제나 진심이었소. 과거 무열황제(武烈皇帝:서하 1대 황제 경종景宗)께서 북송과 전쟁에서 연승하여 화친을 대가로 하국왕 책봉과 함께 오히려 세폐를 받았을 정도였소.”
“그건 군사력 문제가 아니오, 주치 부관. 호위를 전쟁의 논리로 판단하는 건 무림인들 상대론 의미 없는 짓이오.”
“소장을 무시하는 것이오?”
주치가 발끈하자 진도건은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주치의 사고방식이 일군의 장수로서는 충분할 수 있어도 강호무림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에 대해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을 때, 안효철이 무거운 눈빛으로 주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주치 부관.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전하의 호위를 더욱 강화하게. 그리고 황검당이 오거든 호위를 완전히 위임하시게. 만약 그들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전하가 성도로 가려고 하시거든 자네가 할 일은 호위단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왕명을 거역해서라도 전하가 황검당을 기다리도록 하는 것일세.”
“이 주치와 대하군을 무시해도 너무 무…….”
“내가 이곳을 점령하고자 한다면 나에게도 1만의 군사가 있어야겠지만, 이곳을 파괴하는 일뿐이라면 나 혼자로도 족하네. 그리고 이언종 전하를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필요한 시간은 반 각이면 충분하지.”
주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놀라서 놀란 게 아니라 그 허황된 오만함과 불경스러움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부릅떴던 눈이 풀리고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얼어붙어 버렸다.
안효철이 잠깐 동안 자신의 투기를 드러내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북문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도 얼어붙어 버릴 정도로 봉변을 당했고 말들은 놀라 앞발을 들며 요동을 치기도 했다. 물론 몇 초 뒤 사라졌지만, 그 잠깐의 일로 주치도 더는 반박하려 들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안효철이 주치의 눈빛을 읽었다.
분함, 공포, 황망…….
주치의 복잡한 감정을 읽어낸 그가 마지막 걱정을 담아 목소리를 내었다.
“이언종 전하께 무례하게 군 점, 용서를 구하네. 허나 오늘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한 충고를 새겨듣는다면 불필요한 화를 피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야.”
주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없이 눈동자만 아래로 내렸다.
안효철은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돌렸다.
“가지.”
“예, 이럇!”
진도건과 안효철이 말을 달려 멀찍이 떠나는 와중에도 주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두 사람이 떠나간 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 있다가 돌아갔는데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오직 자신만 알 일이었다.
“괜찮겠죠?”
한참 말을 달리던 진도건이 옆에서 달리는 안효철을 힐끗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황검당이 일찍 도착하길 바라야겠지.”
제갈무문과 만났을 때, 그가 황검당이 이미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설명했었기 때문에 두 사람도 처음엔 그 사실 자체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진령산맥과 육반산맥을 넘어 고원성에 도착하기까지 여정을 걸어오면서 태원에서 출발했을 황검당이 비슷한 시기에 고원성에 도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무의미한 거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진령산맥의 험준한 산세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천무방이 있는 산서 태원에서부터 이곳 고원까지 거리는 진도건 등이 이동한 거리보다 배는 더 길었다. 그리고 그 경로엔 정말 장대한 구릉지가 펼쳐져 있어서 단순히 방향만 잡고 가로지르는 것 자체도 무척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선 언제쯤 도착할지 알 수가 없으니 좀 찝찝함이 남습니다.”
“일부러 강한 자극까지 주면서 경고를 했으니 생각이 있다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걸세. 무용한 걱정은 그만하고 서둘러 흥경으로 가서 상황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일세. 자네가 느끼기로 고원성에 마기를 느끼진 않았지 않은가?”
“신경 쓸 만한 기척은 없었습니다만, 상대가 살문이니 조금 걱정이 됩니다. 저도 처음 겪는 상대라서요. 안 대협께선 놈들을 상대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날 암살할 생각은 보통 안 하지 않겠나?”
“……하긴 그렇겠습니다.”
진도건이 수긍하면서 피식 웃었다.
천하오절을 암살하려 한다니.
어쩌면 그것은 일국의 황제 암살과 같은 불가능에 가까운, 그 동일 선상에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하 황제에까지 암수를 뻗치려는 살문은 대체 어떤 작자들인가?
살문의 은신술은 가공할 정도라는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살문주 월하사신은 그 정체를 본 자가 강호 통틀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그가 직접 목표한 자는 반드시 시체로 발견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흑살수들은 일신의 무공도 뛰어날뿐더러 서넛이 모이면 절정고수가 목표여도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신살수들은 아예 얼굴을 드러내놓고 활동할 정도로 살수 세계에선 전설적인 존재들이었다.
주치에게 강하게 경고를 하긴 했으나 어쨌든 이언종의 목숨을 노리려는 시도가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두 사람이 도호부에 들어갈 때 보았지만, 자연스럽게 상시 수천의 군사가 도호부 주변을 호위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갖춘 자도 여럿 있었다. 그런 곳에서 살문의 목적이 이언종의 살해인지 구금이나 납치인지는 알 길이 없어도 조직적으로 호위를 와해하는 사전적인 조치가 없다면 고원성 안에 있는 이원성을 노리는 건 어려운 일이라 여겨졌다.
가장 최선의 조건은 이언종이 적은 숫자의 근위병을 편성하여 성 밖으로 나오는 상황일 것인데, 그래서 두 사람이 이언종과 주치에게 황검당을 기다리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부디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마음 한쪽으로 바라는 두 사람을 태운 두 필의 군마는 흥경을 향해 익숙한 길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행은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고도 없이 닥쳐오는 법이었다.
어느덧 높게 떠오른 달이 서산으로 기울어갈 깊은 새벽녘.
사위가 어둠이 그득하여 간신히 달빛에 시계를 의지해야 할 상당히 늦은 시각.
진도건과 안효철은 고원성과 흥경을 연결하는 길의 중간쯤 위치한 중녕현(中寧縣)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 황하를 따라 계속해서 달리고 있을 때였다.
따그닥따그닥-!
황하를 따라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강과 조금 거리를 벌린 채 모닥불이 작은 불씨를 피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은 말 한 필과 병사 한 사람이 모닥불 앞에서 잠을 청하다가 그들이 일으킨 말발굽 소리에 잠에서 깨는 모습을 보았다.
병사는 잠깐 경계를 하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진도건 등이 거리를 두고 그냥 지나칠 것을 깨달았는지 다시 모포 아래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어설프게 덜 뜬 눈으로 지나가는 걸 기다린 후 다시 남은 잠을 청하려는지 드러누웠다.
그 모습까지 다 본 진도건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는데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도성에서부터 내려가는 전령인가……?’
함께 달리던 안효철도 진도건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왜 그러나? 아까 그 병사 때문에?”
“예. 아무래도 도성에서 나온 전령이 아닌가 싶어서요.”
“전령?”
그 말에 안효철이 조금 전에 병사가 잠에서 깨어나 상체를 일으키면서 모포가 흘러내릴 때, 갑옷 일부가 드러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원성에서 일반병이 입었던 갑옷은 견갑이 비어있던 것에 반해 그 병사는 견갑까지 두른, 좀 더 격식을 갖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흐음.”
명확히 드러난 것은 없어서 안효철도 뭐라 얘기할 건 없었으나 진도건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지점이 있었다.
진도건도 전령이 아니겠냐는 추측이 한계여서 의견이 더 이어지진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계속 말을 달려서 해가 중천 가까이 떠오른 정오 무렵이 되자 서하의 가장 큰 도시이자 성곽을 지닌 흥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도건은 흥경의 성문을 지날 무렵에 안효철만이 들을 수 있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기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