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 제52장. 제국충무왕 이언종 (3)
“제국충무왕 전하를 알현하옵니다.”
진도건과 안효철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절하는 것으로 예를 갖추었다. 무림인들이란 자기세상에 취해 사는 사람들로서 허리가 뻣뻣한 자들로 여겨졌으나 두 사람이 이렇게 바로 엎드리자 이언종이나 옆에 있던 주치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하가 금이나 예전 북송의 신하국의 지위에 있었고, 두 사람의 출신이 두 나라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만족스러워 할 만한 처신이기도 했다.
“일어들 나게나.”
이언종의 말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몸을 바로 세웠다.
이언종은 두 사람의 행동과 행색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장포로 온몸을 꽁꽁 싸맨 듯한 차림의 안효철이 엎드릴 때 드러난 손에서의 철갑도 눈여겨보았지만, 여전히 방립을 벗지 않고 있는 진도건의 모습은 그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했다.
“괜찮다면 그대 얼굴도 보고 싶은데.”
이언종의 말에 진도건이 방립을 벗었다.
“오…….”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떨어지고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실내의 촛불과 창밖의 채광 아래 선명하게 빛난다. 그런 강렬한 특징 위에 그려진 평온한 표정이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이언종의 나직한 감탄사는 진심이었다.
“갑자기 군사들을 시켜서 이렇게 그대들을 불러들인 것에 대해 의문스럽겠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일단 여기 자리에들 앉지.”
이언종이 우측의 늑대 모피로 덮은 두 개 의자를 가리켰다.
진도건과 안효철이 그 자리에 앉고 주치도 맞은 편에 앉았다.
이언종이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대백고국(大白高國:서하인이 자신의 나라를 부르는 이름)과 금의 군사가 감숙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걸세. 하지만, 이 전쟁이 정상적인 전쟁은 아니지. 두 나라의 황제 어느 한 측이 선전포고한 것도 아니고, 우리 군사들은 심지어 깃발을 대하(大夏)의 깃발을 걸지도 않고 무슨 명예를 위해 싸우는지 알 수도 없는 지경이야. 난 첩보원들을 통해 얼마 전 이 상황을 파악했네. 이 전쟁이 무림인들이 주도한 전쟁이라는 것을 말이야.”
“송구합니다.”
“그대들이 송구할 일은 아니겠지. 이 일의 전모는 금의 창천맹이 아니라 천마신교라는 자들일 테니 말이야.”
진도건과 안효철이 잠시 서로를 흘끔 보면서 눈빛이 빛났다.
완안홍균이나 제갈무문으로부터 이언종 개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은 바는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이곳 고원성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본 이언종이 진도건 자신보다 어린 나이라는 것에 처음 놀랐고, 그가 생각보다 통찰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라게 되었다.
이언종의 파병 반대가 단순히 국력손실을 우려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사태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관해 나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첩보원을 동원하는 상황일세. 본국의 옥문관, 돈황(敦煌), 가욕관이 청해에서 온 무리들에게 점거당했단 보고를 처음 들었을 땐, 옛 토번 제국이 부활하기라도 했나 싶었네. 그런데 그들의 다음 향방이 본국의 영토가 아닌 금이 몇 년 전 빼앗아가 주인이 바뀐 난주성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듣고 의아해서 분쟁의 주체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 그 결과 청해에서 온 일단의 군대에서 천마신교란 이름이 나오더군.”
“제대로 파악하셨습니다.”
이언종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 대답은 역시 그대들이 창천맹이 보내서 왔다는 소리겠지. 난주나 천수는 본래 우리 영토였기도 해서 우리 측 간자(間者)가 있네. 금의 황제가 내린 결정이 대충 어떤 건지 알고 있기도 하지만, 새로 온 지휘관이 창천맹에 조력을 요청한 사실도 알았네. 그런 와중에 그대들이 눈에 띄었네. 자, 이제 그대들이 얘기해보게. 그대들은 누구고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전하께선 강호무림의 소문이나 명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지요?”
“조금은. 그러고 보니 내 마음이 급해 그대들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군.”
“소인은 진도건이고 이쪽은…….”
“안효철입니다.”
짝!
이언종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이럴 수가! 범상치 않다는 생각만 했는데 설마 천하오절의 철갑권왕이란 별호를 가진 게 바로 그대요?”
“그렇습니다.”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언종의 얼굴에 잠시 어렸던 기대감이 사라지고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런 무림의 거물이 올 정도면 본국이 처한 문제가 크다는 게 분명하겠군.”
그때 조용히 있던 주치가 입을 열었다.
“전하, 여기 이자는 올해 초 몽골초원에서 요나라 잔당인 흑풍대 야율재를 처치한 자입니다.”
“뭐라고?”
이언종이 이번엔 더 놀랐다.
그들에게 강호무림의 천하오절이란 명성은 소문에 소문을 더한 뜬구름같은 것이다. 그러나 흑풍대 야율재란 이름은 북방의 유목민족에 뿌리를 둔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실질적인 공포였다.
휘몰아치는 철요군(鐵鷂軍) 흑풍대와 그들을 통솔하는 야율강, 야율재 부자는 그야말로 군신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요나라가 그들의 존재를 품었더라면 금에게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감탄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슬프군. 대단한 명성이 내 눈앞에 둘이나 있는데 나는 본국이 처한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아버렸으니 말이야. 그래, 이제 그대들이 얘기해보시게. 이곳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말이야.”
이언종이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진도건이 잠시 안효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전하, 우리는 사실 이곳이 아니라 흥경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흥경? 본국의 도성(都城)에 말인가?”
“그렇습니다. 창천맹은 천마신교가 살문이라는 조직을 이용하여 월왕 전하를 억류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 정황을 포착하였습니다. 그분을 통제하여 추밀원을…….”
이언종이 손을 들어 진도건의 말을 끊었다.
“잠깐, 지금 내 아버지를 얘기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월왕 이인우, 전하의 아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불과 이주 전에 뵐 때도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정녕 이상한 기색을 못 느끼셨습니까?”
잠시 그때 기억을 되새겨보는 듯 이언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뭔가 아버님께서 다른 걱정거리를 비추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뭔가 다른 신하들을 통해 모략질이나 어떤 모종의 거래가 있어서 반금파이자 주전파인 월왕 전하께 파병 재가를 받아냈다고만 생각했었네.”
“한 번 더 생각해보시지요. 창천맹은 월왕 전하와 살문이 직접 접촉한 걸 눈으로 목격한 자의 증언으로 저흴 보낸 것입니다.”
“그래?”
이언종은 다시 미간을 찡그리고 탁자에 팔꿈치를 걸친 손에 이마를 덮은 채 깊은 장고에 들어갔다.
그러길 잠시 후,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지며 조심스럽게 기억을 풀기 시작했다.
“……있긴 했어. 그래, ……토번 승려가 월왕부(越王府)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었네. 그것 말고도…… 어머니와 동생을 못 봤군. 기침을 하고 있어서 옮는다고 그날은 그냥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이언종이 말꼬리를 흐리며 설마하는 표정으로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살문이 어머님과 동생분을 억압하고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이…….”
쾅!
“감히!”
이언종이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크게 분개했다.
그가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의 동생 이안전(李安全)은 이제 1살배기의 갓난아기였기 때문이었다. 살수의 칼날이 그런 갓난아기의 목에 드리워져 있을 거로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도건과 안효철이 주목한 건 다른 지점이었다.
‘토번 승려. ……성혈신마로군.’
직접 맞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안효철로선 성혈신마의 존재가 더 신경이 쓰였다.
“그 토번 승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불리는 법명을 기억하십니까?”
“아, 그게…… 빌, 빌게포첸. 그래, 빌게포첸…… 그렇게 불렀네.”
“빌게포첸.”
안효철이 그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성혈신마의 이름을 암기했다. 한족 이름이 아닌 토번식 이름 같았으므로 기억에 새겨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 빌게포첸이란 승려도 천마신교 측의 성혈신마란 자일 겁니다.”
“그 승려도? 불교 승려가 왜 천마를 숭상하는 종교의 편을 든단 말인가?”
“종교를 가진 자라 하더라도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자들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사실 진도건의 설명은 지레짐작으로 에둘러 얘기한 것이므로 엄밀하게 틀린 말이었다.
성혈교는 사익보다는 계시 때문에 토번의 불교 종파 중 하나인 카규파에서 분파된 것이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름대로 종교적 노선 투쟁이나 다름없었으니 사리사욕이란 말로 치부할 건 아니었다.
허나 또 일부는 맞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토번의 불교는 기본적으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하지 않아서 중원의 불교와 달리 서장의 권력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권력이란 속세의 것이었고 일부 토번 승려들은 이성과 혼인하는 일도 왕왕 있어서 간혹 치정 문제도 나타나기도 하니 사리사욕이 다른 모습으로 잔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골치 아프군. 그럼 그대들은 그자들을 처치하고 내 아버지와 가족을 해방해 주는 대가로 군사의 파병을 멈추려고 하는 것인가?”
“목적은 그게 맞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월왕 전하께서 추밀원의 대소사를 관리한다고 하시더라도 결국 파병의 최종 결재는 누가 하시겠습니까?”
“……혹시 지금 황제 폐하를 얘기하는 것인가?”
“최악을 상정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겠지요.”
“하!”
이언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망하기 그지없다는 반응이 먼저였지만, 일국의 군사를 움직일 생각까지 하는 천마신교의 행태를 돌이켜 생각해봤을 때는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천마신교 놈들의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 대단히 발칙한 발상을 하는군! 감히 일국의 황제를 능멸하려 들다니……. 하지만, 폐하의 곁에는 무림 고수들도 포함된 근위병들이 있네. 그들의 무공은 여기 주치 부관보다 더 뛰어나니 결코 무사할 수 없을 거야.”
이언종은 그들의 무력에 대해 신임이 두터운 모양이지만, 진도건과 안효철은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빌게포첸은 천마신교 내에서 성혈신마라는 이명을 갖고 있는데 그의 무공이 대단할 겁니다. 또 살문도 침투나 암살에 대한 능력이 매우 뛰어나니 절대 얕보시면 안 됩니다.”
“알겠네. 어쨌든 그대의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그대들이 가는 길을 잠깐 붙잡은 셈이 된 것 같군.”
“저희도 전하를 한 번쯤 뵙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랬나?”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하고 계신지 궁금했었으니까요.”
“그 말은 내게도 바라는 바가 있을 것처럼 들리네만.”
“산서 태원에 천무방이란 문파가 있습니다. 그곳엔 약 50명 정도로 이뤄진 황검당이란 조직이 있는데 당주 이혁성이 직접 검객들을 이끌고 전하를 찾아올 예정입니다. 이 당주께서도 계획을 갖고 오실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전하께선 그들을 호위병이나 군사들로 위장하여 흥경으로 가주십시오. 전하께서 황제 폐하께 파병의 중단을 주청하시는 동안 그들이 살문으로부터 전하와 월왕 전하의 가족분들의 보호를 시도하실 것입니다.”
“황검당, 이혁성……. 알았네, 그거면 되는가?”
“그리고 혹시 만약 이곳으로 관중을 향해 진군하는 군사가 있다면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가 폐하께 이곳의 도호위를 받아낸 것도 전쟁의 확전을 막기 위함이니 말일세.”
고원성은 금이 서하를 공격할 때, 제일 먼저 점령할 대상으로 고려될 첫 번째 목표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서하군이 금 본토를 공략하기 위해 제일 먼저 선택하기 좋은 진로였다.
이언종이 작금의 사태에 경각심을 갖고 이곳으로 온 건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