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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82화 (282/432)

282화 - 제52장. 제국충무왕 이언종 (2)

안효철이 입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맞바람을 느끼면서 바로 입을 열었다.

“얘기해보게. 무슨 상황이라고 생각하나?”

“조태상군이 천수성에서 퇴각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퇴각?”

“정확히는 후방으로 철군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군요.”

“어디로?”

“위수를 따라 두 산맥 사이를 넘어서 바로 관중 평야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곳, 진창성(陳倉城)입니다.”

안효철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천수성을 내주고 진창성으로 후퇴한다고? 그건 너무 위험한 판단 아닌가? 그럼 바로 관중 평야가 열리고 다음은 장안성일세.”

“역으로 생각하면 천수와 진창 두 성 사이를 가로막는 진령, 육반산맥의 산세와 위수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계책을 낼 수도 있습니다.”

감숙이란 지대 자체만 놓고 보면 대부분이 산지라 작물 경작이 어려운 땅이지만, 비단길이 지나기 때문에 상업적인 효용 가치도 있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거대한 산맥으로 접근이 쉽지 않은 탓에 금나라에서도 그 영토를 서하로부터 뺏었다 한들 지키기는 어려운 계륵 같은 땅이기도 했다. 물론 산맥들에 둘러싸인 탓에 영토의 모양도 앙상한 닭갈비처럼 길쭉하기만 하다.

그렇다 보니 두 산맥이 만들어낸 좁은 길목에서 역전의 발판을 만들기 위하여 천수성쯤 잠시 내주는 건 문제라고 여기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안효철이 그런 전략적인 요소들을 바로 떠올리진 못했으나 진도건이 얘기한 내용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넨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군. 일군의 지휘를 맡겨도 충분하겠어.”

“하하하.”

안효철의 칭찬에 진도건이 가볍게 웃어넘겼다.

진도건 스스로 그런 평가에 무게를 두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미 몽골초원에서 겪은 전쟁 경험으로 그는 천인장 이상의 역할을 담당할 만한 군사적 지휘 역량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위수까지는 금방이었다.

두 사람은 식수를 챙기고는 바로 경공을 펼쳐서 위수의 넓은 강폭을 미끄러지듯 건너갔다.

등평도수(登萍渡水)란 것도 결국 물 위에 뜬 뭔가를 밟아서 건너는 경신법의 경지이지만, 이미 선풍으로 한껏 몸이 가벼워진 그들에겐 위수를 완전히 건넌 동안 물에 젖는 건 고작 신발의 흙 묻은 바닥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육반산맥의 산줄기를 오르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 * * *

진도건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난주성에서 적군의 출진이 확인되었을 무렵, 농성을 고민하던 조태상에게 창천맹에서 보낸 전령이 당도하였다. 그리고 지금 조태상은 천수성에 주둔하고 있던 3만여 군사들을 전부 진창성으로 철군하는 결정을 내리고 행군 중이었다.

“성을 통째로 버리려고 하니 아깝습니다, 형님.”

“나도 그렇다. 하지만, 놈들의 공세가 더 적극적으로 변했으니 농성도 쉽지 않았을 거야.”

적룡단과 그들이 규합한 청해 유목민족 3만 군사들은 규모 면에서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훈련받은 정규군과 비교해선 확실히 격차가 있었다.

특히 비교되는 것이 올해 초에 치렀던 흑풍대와 몽골군과의 차이였다.

흑풍대는 근본이 요나라의 철요군(鐵鷂軍)이었다. 흑풍신마 야율재, 야율신 등은 모두 군사적 지식이 풍부해 지휘관으로서 역량이 있었으나 적룡신마와 적룡단은 그 출발이 마적단이기에 군사 운용 측면에서 수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일신의 마공에 더해 야만적인 만큼 위험한 건 매한가지지만, 충동적이기에 판단만 잘하면 제어하는 것도 가능했다.

조태상, 조태번 형제는 뛰어난 군사 지휘로 적들을 요리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서하군이 1만 명 규모로 두 차례나 적군에 증원되었는데, 그들의 전투력은 대단히 뛰어나서 자연스럽게 두 형제의 지휘가 미치는 영향도 줄었고 반대로 적룡신마가 활개칠 공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끝내 난주성을 버리고 천수성으로 퇴각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고, 다시 일주일 만에 진창성까지 철군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서하군의 존재가 적룡단이 과거 흑풍대처럼 활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었으니 조태상도 무림세력의 조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소장은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됩니다.”

흑풍대와의 전쟁에서 함께 한 인연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부장 안호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말인가?”

“첩보로 적군의 병력 규모가 어느새 5만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국의 깃발을 내렸다고 해도 서하군의 이런 행동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본토로 진격해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안호필이 얘기하는 건 서하군이 직접 장안을 공략하는 형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금 진창성으로 후퇴하는 것은 천수성에서 농성하다가 포위당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의미도 있었는데, 서하군이 직접 침공해온다면 포위 가능성은 사라졌다 볼 수 없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조만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네.”

“따로 복안이 있으신지…… 아니면, 이 철군을 결정하시게 된 계기였던 그 전령의 보고에 그럴 만한 내용이 있었습니까?”

“아아, 창천맹의 군사께서 조치를 하셨더군. 안 부장도 기억하지? 진도건, 그 사람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야율재가 쓰러졌던 전장에서 훌쩍 사라져 버렸던 그날이 불과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그 사람과 더불어 천무방의 황검당이란 조직이 서하 황실에 생긴 문제를 풀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아아, 그분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안호필의 얼굴엔 어느새 걱정이 사라져 있었다.

야율재를 상대로 맹위를 떨치며 끝내 그의 목을 쳤던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와 달리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태번의 표정엔 아쉬움이 떠올라 있었다.

“아쉽습니다.”

“넌 또 뭐가 아쉬우냐?”

“진 대협이 서하로 갔다면 이 전쟁에서 같이 싸우지 못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듣자 하니 사천 청성산에서 마교주와 크게 한 판 붙었다던데, 얼마나 강해졌을지 감도 안 잡히는 거, 직접 봤으면 했는데 말이요.”

“하하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규율을 갖춘 일군에서 자유로운 무림인들과 함께 싸운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의 생리를 이해하여 상호 간에 뜻이 맞는 자나 조직이 있다면 그들은 일당백의 천군만마(千軍萬馬)요, 운이 좋다면 만인지적 이상의 장수를 얻는 셈이 아니겠는가?

어찌 됐든 연이은 철군임에도 불구하고,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진창성으로 물러나는 건 창천맹의 협력을 고려한 복안 때문이었다.

이미 조태상은 심중에서부터 짧은 기간 폭풍처럼 몰아칠 전세 변화의 조짐을 감지하고 있었다.

* * * *

고원성은 황토에 부자재를 섞어서 단단하게 굳힌 사암(砂巖)으로 성벽을 올렸는데 그 높이가 보통 열다섯 척에서 스무 척 정도로 중원의 그것보다는 높지 않았다. 성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으나 서하가 징병제 국가다 보니 거주하는 남성들 상당수가 군사들이나 마찬가지여서 10만 명 가까운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군사 요새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진도건과 안효철은 성내에 들어와 길가에 좌판과 천막을 치고 음식을 파는 곳에서 국수를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다르군요.”

진도건의 말에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틈틈이 보이는 군졸들이나 관인들은 금과 송의 복식과 비슷했는데 일반 백성들의 복식은 확실히 거란족이나 몽골족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쌀쌀해진 바람으로부터 체온을 지키기 위하여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기워 만든 옷들이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훤히 드러낸 변발의 생김새가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효철이 자주 두리번거리면서 서하인들의 행색을 살피자 진도건이 피식 웃었다.

“저흰 이방인인데 자꾸 쳐다보면 수상하게 볼 겁니다.”

“그렇군.”

국경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교역하는 상인들도 있었고, 무림인들로 보이는 낭인들도 종종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행색이 아주 도드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진도건은 여전히 방립을 벗지 않고 있었고 안효철은 장포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을 정도이니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안효철이 젓가락질을 하면서 탈혼갑에 싸인 손이 바깥으로 드러나니 요리사가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긴 대화는 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주로 귀를 기울였다.

서하인들은 그들만의 문자와 말을 만들었기에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한문과 한어도 충분히 전파되어 있어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도 있었다.

딸그락.

진도건은 국수의 국물까지 모두 들이킨 후, 빈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직 식사 중인 안효철 쪽을 흘끔 보고는 눈만 돌려 요리사 어깨너머로 보이는 풍경들을 시야에 담았다.

‘군졸들이 많이 보이는군.’

고원성은 평상시에도 많은 숫자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었다.

서하의 영토는 옛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섬서를 넘어 산서에 맞닿았는데, 금이 장강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대제국을 이루면서 섬서 땅을 빼앗겼다. 이후로 서하 황실은 혹시 모를 추가적인 전쟁 발발에 대비하기 위하여 섬서 북부의 황토고원(黃土高原)이나 장안으로 통하는 관중평야에 접근이 용이한, 이곳 고원성에 원주도호부(原州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시장의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이었어도 칼을 찬 도호부의 군졸들이 꽤 살벌한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하는데 기강이 제법 확실하게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후우, 건량만 씹다가 면이라도 먹으니까 좀 낫군.”

“그럼 일어나시죠.”

“그러지.”

식탁에 동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에 두 사람은 주변 공기가 조금 달라지는 걸 느꼈다. 뒤를 돌아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십여 명의 칼 찬 군졸들이 거리를 조금 둔 채 두 사람을 에워싼 형태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사들 끝나셨소?”

좀 더 직책이 높아 보이는, 격식을 갖춘 갑옷을 입은 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을 걸어왔다.

“그렇소만.”

“소장은 원주도호부 소속의 부관 주치라고 하오. 괜찮다면 잠시 우리와 함께 도호부로 가주셨으면 하는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소이까?”

“도호부에서 우리에게 어쩐 일로……?”

“무림 고수들에게 괜히 불편을 주어 분란을 만들 생각은 없소이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이니 따라와 주셨으면 좋겠소.”

주치의 말에 진도건과 안효철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연인가?’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으나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눈앞에 있는 주치라는 장수의 내공이 상당한 수준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강호의 기준에선 일류고수 소리 들을 만한 정도인데 지닌 무예 수준을 봐야 알겠지만, 왠지 도호부에서도 유망한 장수이지 않을까 하는 짐작도 같이 하게 되었다.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도건이 다시 주치를 바라보았다.

“주치 부관을 따라가겠소.”

“고맙소. 그럼 갑시다.”

주치와 진도건, 안효철이 함께 걷고 나머지 군사들이 주위를 호위하는 형태로 대로를 걸었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도 했으나 주치는 신속하게 두 사람을 데리고 도호부 대문을 넘었다.

원주도호부는 성의 북서부에 있었다.

주변에 병영이나 말을 타고 훈련할 수 있는 훈련장도 보였다. 특이한 건 여군(女軍)도 종종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인구수가 적은 서하가 군사력을 충당하기 위해 만든 정규편제로 이들을 마괴(麻魁)라 칭했으며 실제 전쟁에도 투입됐었다.

당연히 마괴를 보자마자 진도건의 머릿속엔 야율균은의 모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분명 빼닮은 구석이 많아 보였다.

도호부 안에 들어서자 군졸들은 해산하고 주치만 남아 두 사람을 도호의 관사로 데려갔다.

주치는 관사의 문 앞에 잠시 서서 문을 손으로 두드린 후, 입을 열었다.

“부관 주치입니다. 명하신 대로 두 무림인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라.”

안에서 말이 떨어지자 주치가 문을 열었다.

북방민족과 중원의 문화가 묘하게 섞인 집무실의 풍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엔 큰 탁자를 앞에 두고 선 채로 그들을 맞이하는 젊은 사내가 보였다.

허리 아래론 갑옷을 입었으나 위로는 관복 차림, 그러나 전체적으로 검은 복색 위로 하얀 실로 문양을 수놓고 호피를 어깨에 대충 둘러 걸친 모습에서 나이와는 동떨어진 지위와 거리가 있게 느껴진다.

‘저렇게 젊은 자가 도호를 차지했다는 것은…….’

진도건과 안효철의 짐작을 도와주듯 옆에 있던 주치가 입을 열었다.

“예를 갖추십시오. 원주도호부의 대도호(大都護)이시자, 대백고국 제국충무왕 전하이십니다.”

제국충무왕 이언종.

예상치 못한 방식의 만남이었지만, 한 번쯤 보고 지나가고 싶었던 인물이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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