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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81화 (281/432)

281화 - 제52장. 제국충무왕 이언종 (1)

환청처럼 들려왔지만, 그 목소리는 선명하다.

유변이 다시 시선을 돌려 단원진과 단지운을 보았을 땐 시선처럼 느껴지던 건 사라졌으나 비슷한 듯 다른 두 사람 뒤 그림자의 일렁임은 여전했다. 단지운 쪽이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이라면 단원진 쪽은 존재감을 알리듯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분을 뵌 것도 오랜만이지만, 대마의를 뵌 지는 더 오래되어서 무척 반갑군요.”

아유타가 단씨 부자를 슬쩍 보고 다시 유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사술로 명을 유지하고 있는 난 이리 늙었는데, 성녀께선 무슨 수로 그런 젊음을 유지하시는지. 그대는 참으로 신비로운 여인이오.”

때마침 말을 걸어오는 아유타 덕분에 유변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보면서 대꾸했다.

“옛날 같았으면 나이 얘기에 타박을 놓았을 텐데 말이죠, 후후! 어쨌든 이렇게 태상교주님과 대마의 두 분을 함께 보니 참 좋습니다.”

아유타가 풋웃음을 흘리면서 단원진과 유변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반가움을 표현하는 일상적인 인사와 대화들이 오갔지만, 성녀 아유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녀의 등장을 의아해했다. 그녀는 언제나 참선을 하면서 성혈궁을 쉬이 벗어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고가 들어가기엔 부족한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 혹시 이런 상황을 예지라도 하신 겁니까?”

“맞아요. 바로 어제, 이 상황을 어렴풋이 느꼈지요. 교주님뿐만 아니라 두 분의 존재감과 오랜 인연의 끈이 절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군요.”

아유타의 설명이 이상하진 않아서 단지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심으론 이 상황 자체를 달리 돌아보게 되었다.

우연도 인지하지 못하는 여러 원인이 모여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라고 하였을 때, 지금 이 자리의 의미가 특별하게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각자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아유타가 여기에 하필, 이 순간 등장한다는 건 분명히 짐작하기 어려운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유타와 다르파는 흑궁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성혈궁으로 돌아갔다.

단지운은 권영서로부터 무영각이 취합한 정보를 다시 보고 받기 위해 파순대좌에 앉았을 때, 단원진은 태상교주로서 특별히 할 역할이 없다는 이유로 유변과 함께 내성 별전으로 이동했다. 대신 양자성은 남겨서 단지운을 따르라 하였으나 정작 단지운은 그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양자성도 아유타에 대한 인상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던 터라 그 자리에 집중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 * * *

안효철은 진령산맥의 험준한 산세를 뚫고 자신과 나란히 경주하듯 옆에서 달리는 진도건을 흘끔거렸다.

‘한계를 모르겠군.’

안효철은 지금 달리는 속도를 기준으로 평소보다 훨씬 적은 공력을 써서 달리고 있었다. 같은 공력을 쓴다면 오히려 중심을 가누기 힘들어질 정도로 ‘선인의 바람’이 주는 영향력은 상당했다.

진도건도 그런 힘으로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여 경공술을 펼치는 것이니 최고 속력을 낸다면 어느 수준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가 펼치는 화산파의 암향표도 수준 높은 경공술이었으니 어쩌면 화경에 이른 자신보다 빠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될 정도였다.

“올라가시죠.”

“그러세.”

굳이 능선을 고집하지 않고 산림 속을 달리고 있었으나 어느 새부턴가 산세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북쪽으로 방향만 잡고 달리는 것이기에 굳이 잔도나 중턱의 산길을 고집해서는 우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숲을 뚫고 빠르게 치고 올라가면서 마침내 산꼭대기에 이르자 위로는 푸른 하늘이 열리고 사방으로는 가지처럼 펼쳐진 산등성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도건은 오른쪽으로 힐끔거리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오른쪽의 산줄기가 아마 진령산맥의 태백산(太白山)일 겁니다. 앞에 보이는 저 산줄기를 넘으면 다음은 육반산맥(六槃山脈)입니다.”

마지막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는데 지금 달리는 산등성이보다 좀 더 높은 벽처럼 솟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속도를 내볼까요?”

“그러지.”

진도건이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가자 안효철도 곧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안효철은 뒤를 쫓으면서 선풍으로 인해 더 정교한 내공 운용을 연습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두 마리 매처럼 산등성이를 따라서 나는 듯이 달리자 어느새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던 산꼭대기를 발아래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탁 트인 시야 아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 곳은 동서로 뻗은 진령산맥에서도 북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였는데 북쪽으로 비스듬히 뻗어나가는 듯한 산줄기가 하나 더 보였다.

그곳이 바로 육반산맥이었다.

육반산맥은 기묘하게 두 산줄기가 경쟁하듯 북쪽으로 뻗어있으면서 그 사이로 저지대의 지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종의 넓은 협로였던 탓에 수천, 수만의 군사가 행군하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그 때문에 육반산맥 끝자락엔 하나라가 세운 고원성(固原城)이란 곳이 있어서 국경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제국충무왕 이언종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진도건과 안효철이 가야 할 곳은 고원성에서부터 육반산맥의 길이만큼 북쪽으로 더 갔을 때, 도착할 수 있는 서하 황궁이 있는 흥경이었다.

“방향을 잡는 게 좀 피로했는데, 그래도 이젠 시야가 트였으니 사나흘 정도면 충분히 흥경에 당도할 수 있겠습니다.”

“고원성도 들러서 분위기만 살피도록 하지.”

“그렇게 하죠.”

시기적으로도 황검당이 고원성에 상당히 가까워져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양측의 동선이 고원성쯤에선 겹칠 수도 있기에 혹시 모를 변화된 상황의 가능성을 살피자는 것이 안효철의 뜻이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산등성이를 타고 북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진령산맥의 최북단 마지막 봉우리에 설 수 있었다.

북쪽을 향하는 경사진 능선길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것이 바로 황하 최대 지류인 위수였다. 위수는 화산 북동쪽 부근에서 꺾여 흐르는 황하에서부터 흘러나온 지류로 장안과 진창을 지나서 진령산맥과 육반산맥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었다. 이는 천수를 지나 난주 부근까지 이어지는데 이렇게 험준한 산맥을 가로질러 감숙까지 이어진 탓에 비단길로 활용되는 길이기도 했다.

“여기서 건량이라도 먹으면서 잠깐 숨 좀 돌리세.”

“그러시죠.”

진도건과 안효철은 산봉우리 정상에서 산바람을 맞으며 주섬주섬 건량을 챙겨 먹었다. 작은 가죽 물통에 식수를 담아왔었는데 마시고 보니 거의 비어있었다.

‘위수에서 물을 좀 떠야겠네.’

진도건이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위수를 끼고 있는 천수성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현재 전황대로라면 조태상군은 두 산맥을 등지고 천수성을 거점으로 방어하는 형국이라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이 안효철을 흘끔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말입니다.”

“응?”

“여기서 최대한 높이 뛰어오르면 천수성이 보일까요?”

“뭐?”

안효철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여기가 마침 산맥의 북서쪽에 치우쳐있긴 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네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군.”

“아는 사람이 군 지휘를 하고 있으니 괜히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 ……한 번 해보지 않겠습니까?”

안효철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웃음이 더 짙게 떠올랐다.

“허허……, 자네 진심인가?”

“뭐, 내키지 않으시면 저라도 해볼 생각입니다. 어디 눈치 볼 필요도 없고요.”

“이거 참…… 뭐, 마음대로 해보시게나.”

안효철은 괜히 옆으로 엉거주춤 거리를 벌리면서 뒷짐을 지고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문득 선풍을 타고 달려온 시간들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든 가능성 때문에 설마설마하는 생각이 들 때, 진도건이 자리에서 두 다리에 힘과 공력을 집중하여 힘차게 도약했다.

파아앙-!

급히 고개를 쳐든 안효철의 얼굴에 정말 뜨악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풍압을 터뜨리면서 파공성과 함께 마치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친 진도건의 신형이 어느새 그의 눈에도 먼 하늘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 보일 정도까지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우와……!’

진도건 자신도 한계 예상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꽤 마음껏 공력을 터뜨리며 도약했다.

창공을 나는 매의 기분이라는 게 그동안 바람 타듯 달리는 것으로 대리만족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속도가 줄어드는 시점에선 하늘에 부유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몹시 짜릿했다.

그야말로 구석에 억눌려있던 케케묵은 답답함들이 광활한 푸르름에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더욱 희박해진 공기로 호흡이 불편해지는 느낌과 더불어 중력을 받아 다시 떨어지려는 느낌이 들자 현실적인 목적을 재차 상기했다.

진도건은 염력을 발휘하여 자기 몸을 최대한 공중에 묶어두려 했다. 물론 쉽지 않았지만, 추락에 대한 제동이 미약하게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잠깐 사이에 서쪽으로 흘러가는 위수를 따라 시선을 던지니 과연 산자락 사이에 걸치듯 세워진 천수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일순 진도건의 미간이 좁혀졌다가 풀렸다. 그리고 염력을 풀자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휘이잉……!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의 풍경이 점점 확대되는 가운데 머릿속에선 방금 본 장면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화아악!

진도건의 신형이 거의 비슷한 자리로 떨어지면서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추락하는 관성을 염력으로 상쇄시키니 착지가 안정적인 것은 안효철이 보기에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후후! 대단히 높이 뛰어오른 것 같더군. 그래, 보긴 했는가?”

“네. 그리고 군사들의 움직임도 발견했습니다.”

“뭐? 어디 군사가?”

“진영을 식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의아한 것이 천수성 동서쪽 모두 다 있었습니다.”

진도건의 대답에 안효철의 미간이 좁혀졌다.

비록 위수를 끼고 세워진 천수성이 있는 곳이 지금 그들이 선 진령산맥이나 앞에 둔 육반산맥보다 지대 자체는 낮았지만, 전체적으로 산악지형이 둘러싸인 곳이란 건 매한가지였다. 군사적으로 산자락 사이의 협로들이 만나는 지점이면서 동서를 잇는 위수 근지의 관문성이기도 한 곳이다.

진도건이 확인한 건 정확히 천수성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 위수 근지를 따라 이동하는 군사들이었다. 규모를 가늠하긴 어려워도 늘어선 행렬이 천수성에 맞먹을 정도다 보니 동서 각 군의 행군 목적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군. 포위된 건가? 동쪽 군사가 만약 적군이라면 위험한 형국인데 말이야.”

“서쪽 군사가 성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만, 이동 방향을 가늠할 수 없으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 갈 길은 계속 가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죠. 조태상 장군의 판단이 빠르니 마냥 성이 포위되는 상황을 허용하진 않을 겁니다.”

“……그럼 동쪽 군사가 그들의 군사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 완안홍균이 더는 군을 증원할 수 없다고 했잖은가?”

“하…….”

한숨처럼 들린 게 웃은 것이었는지 진도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자 안효철도 미소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짐작가는 바가 있는가?”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북쪽 정면으로 보이는 육반산맥 산자락을 손으로 가리켰다.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달리시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람이 흐르는 기류가 만들어지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안효철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곧 두 사람의 신형이 산림의 나무꼭대기들을 밟으며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지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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