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 제51장. 천마신궁에서의 해후(邂逅) (5)
“오랜만이다, 아들아.”
단원진의 목소리도 분명하게 내려꽂힌다.
제육천마라대전의 그 넓은 공간이 두 존재가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한가득 찬 것만 같은 압박감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두 사람도 오랜만이로군.”
단원진이 단지운의 옆에 선 자들을 보며 인사를 건네자 그들도 곧장 허리를 숙여 동시에 답례를 올린다.
“태상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환도신마 선우도와 비작이었다.
그들도 정말 오랜만에 단원진을 마주한 것인데 천산에 틀어박혀 있던 것치고는 훨씬 더 건재한 모습에 내심 두려움이 생겼다. 태상교주라는 직위는 엄연히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지금 파순대좌에 단원진이 앉아서 자기 아들을 내려다보는 이 구도만으로 현실적인 권위의 주인이 누구의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구도를 의식해서였을까?
“아버지께서 대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오랜만에 앉으셔서 보고도 받으신 듯한데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차분하면서도 무거운, 당대 천마이자 교주로서의 여유를 한껏 품은 단지운의 말에 아버지의 입가에는 씩 미소가 그려진다.
텁!
단원진이 파순대좌의 팔걸이를 두 팔로 힘있게 짚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앞 계단으로 내려와 서는데 여전히 조금 더 높은 지대 위에서 단지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담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데, 어떻더냐? 계획은 충분했느냐? 아니면 부족한 것은 없었느냐?”
“할아버지께선 아버지께 모든 걸 주고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께선 그러질 않으셨으니 부족함이야 당연히 있지요.”
“크하하하핫! ……고얀 것.”
씩 웃는 단원진의 모습과 역시 웃음 지으면서 노려보듯 쳐다보는 단지운 때문에 제육천마라대전 안의 공기가 서슬 퍼렇게 식었다.
둘은 닮은 듯 묘하게 다른 인상이었다.
단지운의 외모가 모계에 더 가까운 영향을 받았는지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이었으나 내뿜는 기백은 대동소이하여 우열을 따지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건…… 예상 밖이군.’
양자성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가 예상했던 일반적인 태상교주와 교주의 관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서로를 경쟁자 보듯 보고 있는 이 상황은 쉬이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단원진이 한 단을 내려왔으니 단지운도 선우도와 비작을 남겨두고 한 단을 올라간다.
한 단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거리가 좀 더 좁혀진다.
여전히 단원진이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 섰으나 그 차이가 크지 않다.
“그래서 권 각주가 전해준 내용 중에 태상께서 흥미를 담을 만한 것이 있으셨습니까?”
“그저 세상 얘기 들었다 쳤다. 그보다 내일이나 모레쯤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환도마종이 연구하던 술진이 드디어 완성되었나 보구나.”
“천도환위진(天道換位陣)의 실험이 모두 끝나서 일단 교하토성에 흑궁과 연결할 진을 설치해두었습니다.”
단지운 대신 선우도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천도환위진.
그들이 청성산에서 빠져나온 ‘천도환위의 술’을 구성진(構成陣)으로 구축하여 특정된 장소를 공간이동할 수 있는 술진이었다.
환도종의 연구 정수가 집약된 술법 중 하나였는데 이 위치를 특정하면서도 이동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험으로 쓰인 도구와 목숨이 가히 기백이었다. 비록 두 구성진끼리만 이동할 수 있어도 그 거리가 일반인 기준 2, 3일치 거리를 단축시키는 수준이라면 가히 신선경에 이르렀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천도환위진도 단원진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요소는 맞지만, 속내는 단지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에 불과한 말이었다.
오히려 단지운은 이곳에 처음 보는 인사가 어딘가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기백을 품고 있는 사실에 대한 흥미가 단원진의 그것보다 더 클 것이다.
“이 자는 누구입니까? 재밌는 물건을 데려왔군요.”
단원진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단지운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몸을 숙이는 양자성의 모습이 보였다.
단원진이 씩 웃으며 대답한다.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나. 이참에 사형제 간에 인사를 해두는 것도 좋겠지.”
“……사제라.”
단지운이 양자성을 보면서 중얼거리는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절로 긴장하게 된다. ‘사제’라는 말에 담긴 함의가 결코 쉬이여길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양자성이 …교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양자성은 ‘사형’이란 말을 쓸 뻔했으나 본능적으로 ‘교주’란 말로 단지운을 호칭했다.
왜인지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직감.
단지운이 양자성을 흘겨보고는 단원진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이 녀석과 제 관계에 사형제란 말은 부적절합니다, 아버지. 그는 아버지의 첫 제자가 분명한데 난데없이 당신의 아들에게 사형이라 부르라 하면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런가?”
단지운이 마지막엔 양자성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그리고 양자성은 입을 열지 않고 몸만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의식이 이 아비에게 있다 보니 그렇게 말을 해준 것인데, ……하긴 천마신교의 교주는 내가 아니라 내 아들이니 이 아비가 말씀을 따라야지.”
“아버지, 그건 공경의 언어에 불과합니다. 군주가 신하에게, 사부가 제자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주는 건 엄밀히 다르지요. 군주는 충성의 대가를, 사부는 지식과 경험의 전수를,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걸 주는 존재 아니겠습니까? 하긴 아버지께선 할아버지와 달리 제게 그렇게 하진 않으셨으니 스스로 사부라고 여기셨을 수도 있겠군요. 제가 이해는 하겠습니다.”
“교주의 말이 옳다. 하지만, 사형제라는 관계의 성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지 않겠느냐? 네가 이 천마신교의 천마이자 지존이니 이 녀석을 사제처럼, 동생처럼 대하고 역할을 주는 것이 그리 타당하지 않은 건 아닐 게다.”
“천마성(天魔性)조차 제대로 잇지 못한 녀석을 사형제란 말로 포장하시니 의아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태상교주로서 본교의 전력을 증원하려는 의도가 있으셨다면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겠군요. 이 정도면 쓸만할 테니 말입니다.”
“하하하하! 교주의 뜻대로 쓰라.”
분명 그들의 대화는 부자간의 대화도, 교주와 태상교주의 대화도 아니었다.
단지 서로 형식적인 경어만 사용하고 있을 뿐, 그들의 어조는 마치 입장이 선명하게 다른 논객들의 논박(論駁)을 보는 것과 같았다. 단원진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포용적인 자세로 얘기하려는 듯하나 그의 말속에도 가시가 담겨있었고, 단지운의 어조나 태도도 가만히 들어보면 마치 태상교주를 향해 실권에 대한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계 표시를 하는 것만 같았다.
단지운은 시선을 돌려 유변을 바라보았다.
“대마의께서 친히 예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게 얼마만입니까?”
“시간이 꽤 지났네, 그려.”
“구마진, 그 녀석은 징벌을 제대로 치르고 있었습니까?”
“그렇더군. 교주께서 노구의 심기를 배려해주신 것에 내 여전히 감사하고 있다네.”
“그런데 천마신궁을 찾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노구가 죽지 않고 혈마종을 대리로 맡고 나서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지. 어찌 됐든 혈마가 탄생하여 혈마종을 넘길 차례가 왔으니 이 노구도 어찌 돌이켜 볼 일이 없을 수 있겠나? 단 태상을 만나 옛날얘기를 하면서 삶을 반추해볼 요량으로 왔으니 교주께선 너무 괘념치 마시게. 허허허!”
단지운의 마지막 질문은 다소 의심 섞인 기색이 보였다. 그러나 유변은 그저 허허로이 웃으면서 답하니 단지운의 의심을 덜어낼 수 있었다.
단지운은 다시 시선을 돌려 권영서를 쳐다보았다.
“권 각주, 방금까지 진행한 내용을 다시 보고 받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저벅저벅저벅…….
단지운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네 개 계단을 올라 지나는 자리의 단이 높아지자 단원진과 눈높이 차이가 더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 다음 네 개 계단을 오르자 단원진과 눈높이가 완전히 비슷해졌다. 두 사람의 키가 거의 비슷하니 서로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는데 둘 다 여유로운 미소를 품고 있으니 이 구도 또한 의미심장하다.
‘단원진은 단용후와 정말 많이 닮았지. 오히려 그는 단용후 사후로 더 닮아가는 듯했어. 하지만, 그 아들은 어딘가 반골 같은 느낌이 있어서 달라. 같은 천마성을 가졌더라도 인격에 이 정도 차이가 발생하는 것인가?’
유변은 한쪽에서 단지운이 마침내 같은 단의 높이에 올라서 단원진을 지나치고 파순대좌로 가기 위해 걸어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교주님께 아룁니다!”
그때 흑궁 정문 쪽에서 마군위 한 사람이 들어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제육천마라대전의 광활한 공간 안으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면서 모두의 귀에 들리기 충분했다. 그리고 단지운도 단원진을 막 지나쳐 한 걸음 정도 더 나아갔을 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했다.
“무슨 일이냐?”
권영서가 단지운 대신 묻자 마군위가 포권을 취하며 대답한다.
“성혈교의 아유타 성녀와 다르파가 흑궁에 방문하였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뜻밖의 방문이었다.
성혈교 승려들은 성혈궁에서 별도의 출입구를 사용할 정도로 천마신궁의 흑궁 쪽으로 나오는 경우가 잘 없었다. 정말 공적인 일 외에는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그만한 일조차 두 달 전쯤 성혈신마 빌게포첸에게 임무를 지시한 것이 가장 최근의 일이었다.
곧 들어왔던 마군위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그 뒤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성녀 아유타와 성혈교 최고승인 다르파.
천마조사 단용후 시대에서부터 살아남은 아유타는 그 절륜한 내공 때문인지 여전히 기품이 넘치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옆의 다르파는 성혈교 최고승다운 진중한 발걸음으로 노구를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개 반갑거나 의아한 감정으로 두 사람의 등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유타와 다르파를 처음 보았던 양자성의 내적인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아니, 다행히 모두의 시선이 아유타 쪽으로 돌아서 있었기에 들키지 않았을 뿐, 그는 멍한 표정으로 꽤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날 양자성은 그가 살아온 짧은 인생 가운데 처음으로 정신이 아득해지고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전에 없던 느낌이었고, 몹시 감정적인 신호가 분명했다.
아유타와 다르파가 걸음걸이를 옮김으로써 점점 거리가 가까워짐에 다른 감상을 느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성녀 아유타.’
유변은 그녀를 정말로 오랜만에 보았기에 그 등장의 알림을 듣는 순간 무척 반가운 느낌이 먼저 들었었으나 바로 뒤이어 그녀의 실제를 마주한 순간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성녀로서의 배광(背光)을 보고 있었다.
먼 옛날의 기억 속 아유타는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단용후에게 중히 여겨지던 아름답고 친절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말로 5, 60년 만에 본 그녀는 성녀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배광을 드리우며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변은 뜻밖에도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그동안 감춰져 왔던 이면을 마침내 엿볼 수 있게 됐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뭐랄까.
마성을 품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림자’라고 해야 할까.
유변의 고개와 시선이 아주 조금 미세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니 이 자리에 선 모두가 그런 그림자를 품고 있음을 깨닫지만, 유독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불길처럼 일렁이는 어둠과 같이 나타나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단원진과 단지운.
‘……흡!’
그 순간, 유변이 흠칫 어깨를 떨며 급히 눈동자를 아유타에게 다시 돌렸다.
오랜 세월로 축적된 노회함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눈빛의 떨림과 몸의 기색을 차분하게 잠재우지만, 유변의 내면에선 그 떨림이 쉽사리 가시지 않고 있다.
‘……날 보고 있어.’
두 사람이 가진 같은 느낌의 그림자.
그 가운데 단원진의 그림자만이 어둠 속 감춰졌던 의지의 눈을 드러내어 유변을 쳐다본다. 그것을 재차 마주 보고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심지어 완전히 잊힐 뻔했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드디어 날 찾아냈어…….
……오랜만이야, 크크크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