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 제51장. 천마신궁에서의 해후(邂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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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숲속에 대부분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성벽의 웅장함과 견고함은 직접 발길을 옮겨 들어가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요마산의 천마신궁.
이중장벽으로 보호받고 있는 그것은 산세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산성(山城)이요,
천마신교의 지배력을 상징하는 대사원(大寺院)이며,
천마의 궁전이었다.
무엇보다 무공의 경지가 올라 일정 수준 정도 되는 고수라면 산기슭을 넘어 깊숙이 들어갈수록 무형의 압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며, 천마신궁 안으로 들어설수록 느껴지는 장엄함과 엄숙한 경관 속에서 그 어떤 기개도 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자들은 오로지 천마신교에 충성하며 그들의 지배하에 든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충직한 수하들뿐이었다. 신마들조차 묘한 부담감이나 불편함 때문에 오래 있기 싫어하는 요상한 마력이 있었다.
‘여전히 꺼림칙한 곳이로군.’
유변도 이곳에 들어오면서 계속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가 오래전 천마신궁을 떠나서 청해 서녕 근처에 마을을 지은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그것이 유변이 가진 천마신궁에 대한 감상이었다.
반면 양자성은 처음 왔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편안한 마음이었다. 약간의 긴장감도 있었으나 대체로 자의식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느끼는 중이었다.
‘마도의 본산이라 일컬어질 만한 장소다.’
그들은 천마신궁의 흑궁 안으로 들어선 상황이었다.
세 단계로 단을 형성하듯 중간중간 짧은 계단마다 지대가 높아지는데 입구에서부터 반대편 벽면 앞 거대한 옥좌(玉座)까지 붉은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었다. 흑궁을 떠받치는 굵직한 기둥이 세 개씩 좌우로 정렬하여 있었는데 기둥을 따라 고개를 들면 보이는 천장의 높이도 대단히 높았다.
어른거리는 횃불로 인해 빛이 머무는 벽면이나 천장으로 벽화도 보였다.
마라 파피야스가 거한다는 제육천의 모습을 구상화한 그림들이 벽면을 따라 그려져 있었고 배경 속 불길이 천장의 가장자리를 침범하여 그려져 있었다. 천장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마치 별을 품은 먹구름 또는 밤안개처럼 묘사하여 장황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옥좌 바로 위쪽엔 아직 먹구름이 덮지 못한 하얀 배경 속에 검고 둥그런 원이 나 홀로 그려져 있었다.
‘일식(日食)? 아니, 고리나 빛무리 같은 게 없으니 월식(月食)인가? ……그러기엔 주변의 하얀 배경은 낮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옥좌 위의 천장에 잠시 눈길이 머물러 있던 양자성의 시야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시선을 다시 내리자 옥좌에 앉는 단원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파순대좌(波旬大座)에 앉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그의 모습도 대단했다.
파순도 천마를 가리키는 이명(異名)으로 마치 그의 모습을 상징하려는 조각상이 옥좌를 따라 새겨져 있었다.
염소의 뿔과 뱀 비늘 같은 피부의 악귀 같은 얼굴을 가진 자가 부동명왕(不動明王)의 갑옷 같은 것을 입은 채 불길에 휩싸인 모습으로 높고 커다란 옥좌를 감싸 안는 듯한 자세를 하여 단원진이 앞에 모인 자들을 내려다보듯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치켜든 손엔 검이 들려 있는데 그 검에는 검은 뱀(黑蛇)인지, 흑룡(黑龍)인지 모를 것이 검신에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함께 조각되어 있었다.
‘저것이 천마신교 교주의 파순대좌……!’
그저 넋을 잃고 쳐다보던 양자성의 시선이 단원진의 눈빛과 마주쳤다.
움찔!
용암비동에서도 그의 존재감이란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파순대좌에 앉은 단원진의 모습이란 마치 그 진체를 마주하는 듯하다. 그리고 양자성은 문득 자신 외에 다른 이들 모두 허리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천마신궁 흑궁의 제육천마라전(第六天魔羅殿)으로 불리는 공간.
마지막으로 몸을 숙이는 양자성까지 자신을 향해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단원진은 잠시 옛 감상에 취할 수 있었다.
“일어나라.”
단원진의 부름에 하나둘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천산에서 함께 내려온 유변과 사마월, 양자성이 있었으며 그들 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무영각주 권영서였다. 단원진이 입궁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들이 흑궁에 도착할 때를 맞춰 나타났었다. 양자성도 교하토성에서부터 용암비동에 이를 때까지 시간 외엔 도통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잠깐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스칸다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
기도는 무색무취로 평범한 편이었으나 단원진을 향해 예의를 갖추는 사소한 행동거지 어디에도 두려움에 떨거나 기죽어 있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여유로움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반응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 특이한 존재감에 천마신교의 불가사의는 끝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경각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었다.
권영서는 마구니(魔仇尼)라고 부르는 천마신교의 수행자를 시켜서 의자를 가져와 파순대좌 우측 대각방향에 놓고 유변이 앉을 수 있도록 했다.
반대편엔 자신과 스칸다가 있었고 양자성과 사마월은 유변의 옆에 서도록 했다.
“오랜만에 보고를 좀 받아볼까?”
권영서가 그의 뜻대로 무영각에서 취합된 정보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부분 현재 교주 단지운의 의지 하에 천마신교가 치르는 전황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무림 정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특히 부각되는 이야기는 사천 전투의 결말과 감숙 지역에서 서하군의 지원을 받아 치르는 대규모 군사전쟁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권영서는 그런 여러 내용을 축약하여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단원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들으면서 가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양자성으로서도 흥미로운 건 또 있었다.
현재 천마신교를 지탱하고 있는 구주마종에 관한 것이었다.
복잡한 상황은 차치하고서라도 큰 틀에서 흑풍신마와 사혈신마의 사망으로 두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단원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신마급이라면 천마신교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력일 텐데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권 각주가 용암비동에 저 녀석을 데리고 온 뒤로 이제 두 달 정도 됐나? 사라에게도 조금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판이 크게 벌어져 있구나.”
“천마조사 때부터 시작하여 단 태상께서 착실하게 쌓아 올리신 천마신교의 잠재력 덕분 아니겠습니까? 대를 이어 내려온 마도대의가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교주를 전력으로 보필하겠습니다.”
단원진이 껄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데 권영서의 귀엔 발음도 불분명하게 들려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딱 세 사람만큼은 그 말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녀석의 마도대의는 나의 것과는 다르지.”
그 말속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었는지 아주 잠깐 표정의 변화가 일어났던 유변.
천마신교의 신참내기에 불과하기에 그저 왜 그런 말을 중얼거리나 싶었던 양자성.
그리고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스칸다였다.
“스칸다여.”
“예, 태상교주님.”
“잘 지냈느냐?”
“마라 파피야스의 뜻에 띄운 조각배처럼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지요.”
양자성은 깜짝 놀랐다.
스칸다의 생김새는 이곳 신강에서 넘어와서 본 다른 이민족들과는 또 다른 이국적인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비취색의 눈빛과 더불어 적갈색의 매끈한 피부, 승복에 가까운 듯한 가벼운 옷차림도 처음 보는 복식으로 미루어보아 말로만 듣던 서천(西天:인도)의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입에선 중원인처럼 한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실제로 스칸다는 서천 출신의 순례자가 이곳에까지 넘어왔다가 회족과 혼인하여 낳은 핏줄로서 한어뿐만 아니라 회족이나 몽골족 언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단원진은 스칸다의 대답이 재밌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그렇구나. 그래, 내가 이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뒤로는 별문제 없었더냐? 분명 덤벼드는 놈들이 있었을 텐데.”
“떠나시고 보름쯤 지났을 때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과연 나의 위타천(韋陀天)이로다.”
단원진이 감탄사를 펼쳤다.
양자성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위타천은 불교에서 남쪽 증장천(增長天)을 수호하는 팔장군(八將軍) 중 하나이자 사방삼십이천장(四方三十二天將)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존재였다. 천마라는 상징이 불교와 관계가 있는 건 맞지만, 위타천은 천마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그런 호칭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도 얼마 뒤에 깨닫게 되었다. 단원진이 얘기한 ‘나의 위타천’이란, 달리 말하면 ‘배반한 위타천’이란 해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유변의 표정은 단원진이 내뱉는 대화의 어조와 그 웃음에 맞춰서 동조하는 느낌을 보여주었지만, 머릿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변은 단원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지난 삶의 족적이 어딜 향하여 이어져 있는지를 살펴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단원진의 족적은 곧 단용후의 족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었다.
천마신교가 단용후, 단원진, 단지운의 3대에 걸쳐서 세력을 키우고 사상적 가치를 쌓아 올렸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마도대의란 네 글자는 단씨 일가와 천마신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상적 가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현재 천마신교의 행보는 중원무림과 대립하여 그들을 물리침으로써 그 자리를 대체하고 새로운 강호무림의 정파(政派)로서 그 정점에 서겠다는 목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몇 가지 행보에선 그것에서 벗어난 의도가 읽힌다.
다만 그런 몇 가지가 저마다의 특이점이 있을 뿐 어떤 근본적인 지점을 지적할 수 있는 핵(核)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 파순대좌에 자주 앉아 있지도 않았었지. 덕분에 여기 권 각주도 고생깨나 했고, 내 아들도 일찍 직무를 위임받아서 대리로 일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러니 내가 불혹에 교주직을 받았던 것과 다르게 내 아들이 서른이 되기 전에 교주직을 이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됐기도 했지만 말이야. 그렇지 않소이까, 대마의?”
“그런 셈이었지요.”
유변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귀는 활짝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단원진이 간만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계속해서 웃음소리를 술술 흘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이미 반쯤 열려있었던 흑궁의 정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바람이 한차례 거세게 휘몰아쳤다.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가 맞닿아 있긴 해도 제육천마라전에 들어와 있는 여섯 사람은 이곳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도 확연하게 느껴질 만한 강렬한 바람이 입구 쪽에서부터 세차게 불었다가 가라앉았다.
이상한 변고에 모두 조금 긴장한 태세로 바라볼 때, 바깥을 지키고 있던 호위직인 마군위(魔軍衛)의 외침이 들려왔다.
“광명대천, 천마군림!”
그 외침이 의미하는 것은 딱 하나.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걸어들어오는 세 사람의 그림자.
그 중심에 선 자의 모습이 다시 횃불 아래 들어왔다.
천마신교 교주 천마 단지운의 시선이 파순대좌에 앉은 채 내려다보는 단원진의 시선과 허공에서 얽혔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천마신궁과 이곳 흑궁 제육천마라전의 주인이 누구인지 상기하게끔 만드는 굵고 선명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속으로 명료하게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