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78화 (278/432)

278화 - 제51장. 천마신궁에서의 해후(邂逅) (3)

한편 제갈무문은 최현걸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그 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이 움직인 건 확실하네. 이 정보의 정리가 하오문을 통해 이뤄졌는데 실제로 확인한 것만 신살수 둘에 흑살수도 여럿이었다고 하니 말이야.”

“하오문이 대단하군요. 실상 살문 만큼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운 조직이 없는데.”

“운이 좋았다고 하더군. 증원군을 보내도록 추밀원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월왕(越王) 이인우(李仁友)인데 그와 매우 가까운 중서성(中書省)의 젊은 관리 한 사람이 하오문에 가입한 자였다네. 운이 좋았지. 신살수와 흑살수 정도 되는 자들이 월왕 앞에 스스럼없이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살문이라고 알았을까? 월왕과 가까운 서하의 유망한 관리가 설마 하오문도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 중원과 동떨어진 변방의 나라인데 말이야.”

“그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방식은 정말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에 미리 인지하고 감시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알아채기 어려울 겁니다. 그 관리가 일국의 왕과 비교했을 땐 중요하지 않은 위치라는 것도 한몫했겠습니다.”

하오문의 특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최현걸이 제갈무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이나 하오문이나 민간의 가까운 지점에서 정보를 취득한다는 특징은 비슷했다.

개방도 오의개와 정의개가 있어서 구걸을 하며 얻는 귀동냥이나 신분을 위장 또는 별직을 겸하면서 얻는 정보가 폭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하오문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품고 있는 사리사욕을 건드려서 그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여러 정보가 필요한 자들을 신분 고하와 관계없이 포섭하여 정보의 창구로 활용하는 예도 있어서 때때로 개방보다 더 내밀한 정보를 다루는 경우도 많았다.

개방도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협개(俠丐)를 추구하는 방향성과는 맞지 않는 지점이라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영은성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군사를 직접 움직이는 게 월왕 이인우라면 그의 신병을 확보하여 다시 우리 쪽으로 포섭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는 선명한 반금파에 주전론자(主戰論者)일세. 서하는 군사강국이라는 명성이 있는데 금에게 섬서성 일대를 뺏겨서 영토가 줄어든 현 정세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야. 특히 그 지역은 그가 직접 관할하던 곳이었거든.”

쾅!

그때 완안홍균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얼굴에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와 화친을 해놓고서 이런 일이 서슴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 대금의 황제 폐하께서 분노하지 않으리오!”

“입으론 화친이라면서 전쟁을 일으킨다라…….”

“마교와 움직이고 있는 그들의 군사들은 모두 하나라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교의 깃발을 들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서하가 새외무림 세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지점을 황제께서도 인지하시고는 더 확전되지 않도록 창천맹이 나서서 이 사단을 정리해주길 바라는 것이지요.”

안효철의 중얼거림에 제갈무문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이 전쟁이 끝나면 하 황제에게 사절을 요구할 생각이오.”

국가 간의 외교적 관계를 다시 정립하여 평화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바로 제국충무왕 이언종이 월왕 이인우의 장자라는 점에서 대립각을 세우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네. 올해 25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작년에 충무왕의 봉호를 받았다는 건 그가 상당히 걸출한 인물이고 황제의 신임을 두텁다는 걸 잘 설명해주고 있지.”

“그건 또 놀랍군요.”

황자들에게 왕의 봉호를 내릴 때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따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언종처럼 제나라(齊國) 뒤에 충무(忠武)라는 호칭을 따로 붙이는 예는 거의 없었다.

천서은은 곁에서 설명을 모두 듣고 조금은 침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충무왕 이언종이 중요하다는 건 이해했어요. 그럼 다른 한 사람은 누구예요? 그처럼 월왕 이인우같은 반금파에 맞설 친금을 주장하는 다른 황족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완안홍균이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인효(李仁孝)라오, 낭자.”

“이씨 성…… 그는 무슨 왕인가요?”

“우리 대금의 입장에서야 왕이긴 하지요.”

완안홍균이 장난치듯 얘기하는데 그 내용이 의미심장하여 천서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갈무문이 완안홍균을 슬쩍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진도건과 안효철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인다.

“월왕 이인우의 형이자 서하의 인종(仁宗) 황제의 이름이 바로 이인효라네. 그가 바로 진도건과 안 대협께서 지켜야 할 사람이지.”

하나라 황제를 지켜라.

그것은 그리 단순한 명제(命題)로 치부될 내용이 아니었다.

진도건과 안효철이 황제를 지켜야 한다는 건 결국 ‘살문이 일국의 황제를 시해하려 한다.’라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서 천마신교가 어쩌면 일국의 조정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걸 의미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마교 교주 단지운이 황제 참칭까지 이르게 될 가능성을 논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하, 하하……. 황제를 노리다니……, 정말 마교주가 그런 미친 짓을 벌이려 한단 말입니까?”

최현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그 말의 무게감 때문에 심장이 떨릴 지경이었다.

완안홍균도 심각해진 얼굴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가정일 뿐이라고, 작은 가능성에 불과할 뿐이라고 해도, 또 타국의 일이라고 해도 황실의 종친인 입장에선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역모 수준의 음모는 조그만 가능성에 불과하다 해도 입에 거론되는 것만으로 엄청나게 많은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종 황제가 금나라와 화친을 추진한 당사자이니만큼 이런 상황을 보면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가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진도건 자네와 안 대협께선 이곳을 떠나면 다른 곳은 절대 돌아보지 말고 반드시 인종 황제에게 직접 닿아서 그의 안전을 확보해주시게. 그의 기본적인 입장을 고려했을 때, 살문을 물리쳐줄 수 있다면 분명 파병을 중단시켜줄 걸세.”

진도건은 이들의 대화를 모두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제갈무문의 마지막 설명까지 듣고 나서 그도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흐름이 그려졌다.

“결국 양동작전이군요. 황검당이 이언종을 살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여 흥경으로 상경하는 동안 저희는 은밀히 잠입하여 황제와 접견, 불시의 상황에 대비하여 지키고 있을 것. 그렇지 않습니까?”

“한 가지 더. 이인우의 신병도 확보해야 하네. 어쨌든 그가 아무리 반금파라고 해도 국가적 실익이 없는 이상 황제의 반대편에 서서 파병을 계속 고집할 수는 없네. 결국엔 그도 약점을 잡혔기 때문에 이 일의 주모자로 보이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예상이야.”

“그럼 그 사람은…….”

“안 대협이 해주셔야지.”

“황검당이 살문의 주목을 끄는 사이, 진 대형이 황제를 지키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또 그 틈을 노려서 안 대협께서 이인우를 구출한다. 여기까지 이해가 됐습니다. 그런데 꼭 안 대협이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최현걸이 천서은을 슬쩍 보고는 여태까지 나온 내용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편을 한번 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천서은도 큰 기대를 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조금의 기대를 품으며 제갈무문을 바라보았다.

“살수들이 이인우의 처소에 나타나긴 했지만, 처음 잠깐뿐이지 지금 그를 가까이서 감시하고 있는 사람은 살문이 아니라고 하더군. 얘기하기로 토번 승려라고 하는데…… 그 인상착의를 파악해본 결과 성혈신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

“성혈신마…….”

천서은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왜 제갈무문이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고 안효철을 선택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혈신마.

아홉 명의 신마들 가운데서도 가장 무공이 강하다고 알려진 세 사람 중 한 명이면서 아직까지 대외적으로 드러난 정보가 가장 적은 자이기도 했다.

천서은으로서는 분하게도 아직 그런 정도의 강자를 단독으로 꺾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천서은의 아쉬운 얼굴을 제갈무문도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다.

“천 소저의 심정은 잘 알지만, 너무 아쉬워만 말게나. 맹주께서 천 소저를 찾고 계시네.”

“저를요?”

“맹주께선 이 전쟁이 우리의 계획대로 마무리 짓는다면 그대로 천마신교의 본진이 있는 오로목제까지 계속 진격해나갈 생각이시네.”

“끝장을 보실 생각이군요.”

“그래.”

모두의 표정에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곧 자리를 파했다. 완안홍균은 미리 한중에서 가장 좋은 객방을 잡아놓아 진도건 일행이 여기까지 오면서 쌓인 여독을 씻어낼 수 있도록 준비해주었다.

그렇게 각자 객실로 이동하는 사이, 진도건과 천서은이 따로 밖으로 나와서 객잔 뒤쪽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건물들에 그늘지고 드나드는 인적이 없어 조용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서며 잠시 눈빛만 주고받았다.

“우리 또 헤어지네요.”

천서은의 목소리엔 아쉬움의 감정이 그득 묻어있었다. 그런 그녀를 진도건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만날 거야.”

“그래야죠.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요? 그저 난 내가 도움이 되기에 아직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 화가 나요.”

진도건과 천서은이 조우했을 때, 누가 더 강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천서은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봄과 여름을 보내고 가을도 지나가려는 현시점에서는 진도건이 더 우위에 있음이 분명했다.

다른 것보다 단지운을 상대했을 때, 나타났던 힘의 차이도 있었으나 진도건에겐 혈마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된 공간을 항상 갖고 있다는 점이 생각보다 컸다.

천서은은 이번에 진도건과 헤어지고 부친과 다시 조우하게 되면 그의 도움으로 파천신공의 다음 단계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보다 큰 감정은 없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워요. 제갈 군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앞으로 많은 일이 폭풍처럼 일어나고 또 꽤 길게 이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겠어. 그 폭풍을 헤쳐 나가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걸. 장인께서도 사위와 딸을 앞에 두고 그 책임을 다하고 혼인하라 하셨으니 제대로 완수해낼 수밖에.”

한중에 넘어온 뒤로 천서은의 표정은 아쉬움과 슬픔, 답답한 심정만을 담고 있었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진도건의 말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안아줘요.”

진도건과 천서은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뜨겁게 입술을 맞추었다.

둘 사이에 이젠 어떤 감정적인 벽도 없었고 앙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청성산에서 단지운을 상대로 벌였던 사투 속에서 그들이 피워낸 불꽃은 불필요하게 쌓였던 감정의 둑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하아…….”

서로의 호흡을 느끼면서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고 떨어진 후의 두 사람의 표정엔 희열의 감동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진도건의 손이 천서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잘라냈던 머리카락은 몇 달 사이에 꽤 길어져서 이젠 어깨를 온전히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쯤 되니 진도건도 지난날 검림에서 품었던 안타까움도 이젠 많이 흐려져 있었다.

“우리 저 얻어준 방으로 돌아가지 말아요.”

“왜?”

천서은의 말이 들을 땐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달콤한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도건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그들 정도라면 아무리 조심해도 귀에 들릴 수밖에 없겠네.”

“후후! 우리 멀리 다른 방을 잡아요. 아니, 차라리 숲속이 더 좋겠어요. 흑풍신마를 처치하고 우리가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눴던 그때처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사랑을 나누며 내일의 이별을 위로할 수 있게.”

화끈하게 직설적이다.

진도건도 오랜만에 그녀에 화답하는 미소를 입가에 품으며 짤막하게 대답한다.

“너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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