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 제51장. 천마신궁에서의 해후(邂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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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건 일행은 하가장을 떠난 뒤 계속 북상하고 있었다.
그 경로에서 개방이 날마다 그들을 쫓아와 필요한 소식들을 주고 가곤 했는데, 일단 막연하게 북쪽으로 향해야 하던 중에 마침내 목적지가 완전히 정해졌다. 그리고 그곳인 익히 한 번 지나온 곳이기도 했다.
“다시 왔군.”
진도건이 양쪽의 산세와 협로 사이로 작게 보이는 한중성의 성벽을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사천을 빠져나올 경로는 사실 손에 꼽을 정도로 정해져 있었고 북쪽은 한중을 통과하는 길이 가장 쉬운 편이었다.
어쩌다 보니 지운천으로 분했던 단지운이 안내한 경로를 따라 이동한 다섯 사람은 마침 성벽이 보인 김에 말을 달려서 협로를 빠르게 빠져나왔다.
남쪽 산지와 한중성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작게 보였던 성벽도 금방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진도건 일행은 남문을 통하여 성내로 진입하였고 곧장 약속장소로 지정된 객잔으로 이동했다.
초한객잔(楚漢客棧).
안에 들어서자 한낮임에도 1층엔 탁주 한 잔씩 걸치려는 자들이 제법 보였다.
진도건 등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나니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곧장 그곳으로 움직였다.
“군사.”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바로 제갈무문이었다.
그 옆에는 금군의 군장차림을 갖추고 있는 장수처럼 보이는 자가 제갈무문과 함께 앉아 있었다. 진도건 등 다섯 사람도 각자 비어있던 자리에 앉아 있으니 탁자 2개분의 자리가 거의 가득 찼다.
“이쪽은 조 장군의 부장으로 돕고 있는 추밀부사(樞密副司) 완안홍균(完顔洪均)이시네.”
“완안?”
최현걸이 장수의 성씨에 놀라 반응했다.
완안씨는 금 황실의 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완안홍균입니다. 이젠 권력과 멀어진 방계의 후손으로서 그저 관직에 몸담은 것뿐이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완안홍균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가 직접 밝히진 않았으나 그는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아홉 번째 황자이자 조왕(曹王) 봉호를 받은 완안종민(完顔宗敏)의 손자였다. 그가 비록 자신의 권위를 낮추는 모양이었지만, 추밀원의 부사로 임명되었다는 건 나름대로 황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도건이라고 합니다.”
“천무방의 천서은입니다.”
일행은 차례대로 완안홍균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갖추었다.
일곱 사람은 죽엽청으로 반주를 곁들이면서 간단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형식적인 인사말들과 예의상 이뤄지는 칭찬들, 근황에 대한 잡담이 오고 갔다. 아무래도 완안홍균의 지위나 신분을 의식하여 이뤄진 요식행위인 셈이었다.
“……확실히 안 대협의 손을 감싸고 있는 그 갑주를 보고 있으니 강호가 얼마나 넓고 신비함이 가득한 세계인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완안홍균이 탈혼갑에 싸인 손을 흘끔거리며 얘기하자 안효철이 그저 허허 웃으면서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봐야 왼손의 손등도 매한가지라 가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이 상태가 참 번거로웠다.
제갈무문이 잔을 들어 물로 목을 축이고는 완안홍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완안 부사, 모두 긴 여행길의 피로를 달랠 만큼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이제 필요한 얘기들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럴까요?”
완안홍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 바로 뒤의 벽에 기대어 놓았던 자신의 봇짐을 뒤지더니 서신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곧장 펼쳐서 탁자 위에 놓았는데 사람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로 황제의 옥새 직인이었다.
“그대들에게 직접 내리시는 황명은 아니지만, 무림 분쟁을 책임져야 할 창천맹과 군사적으로 지원하시는 조태상 상장군께 전하는 것으로서 그에 따른 책임과 임무를 맡아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 보여주는 것이오.”
“황명이 어떤 내용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대금이 군사적으로 강맹하나 남으로는 송이, 북으로는 몽골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소. 특히 새외무림의 천마신교가 준동하여 서하군까지 끌어들여 이 사단을 일어난 데에 폐하께서는 심히 불쾌함을 느끼고 계시오. 물론 그대들의 근본은 한족이니 우리가 고생하는 이 상황에 별 우려를 느끼지 않을진 모르겠으나…….”
완안홍균이 말꼬리를 흐리면서 다섯 사람을 두루 흘겨보았다.
눈치 빠른 최현걸이 먼저 입을 열어 대답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 피해로 저희 같은 금 황실의 백성들이 고초를 겪게 되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황명으로서 당부하지 않으셔도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저희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할 것이니 하명하시지요.”
그의 대답에 완안홍균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의 소개께서 이해가 빠르니 제가 안심되는구려.”
제갈무문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창천맹도 황명을 받들기로 하였고 이분들도 송의 사천땅에서 올라온 길이라 한들 어심(御心)을 헤아려 움직일 것이니 심려마십시오. 그보다 이렇게 추밀부사께서 친히 이곳으로 넘어와 그대들을 만난 것은 특별한 임무를 부탁하기 위함이네.”
완안홍균이 손을 들어 다시 끼어들었다.
제갈무문이 끼어들어서 불쾌한 건 없었으나 중요한 이야기니만큼 직접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쓸데없이 딴소리했군요. 이어서 설명하겠소이다. 상장군께서 황명을 받들고 일찍이 군사를 움직여서 난주성에 입성하였지만, 천마신교의 고수들 숫자가 대단히 많고 하나라의 군사적 지원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어서 난주성을 내주고 천수성으로 후퇴하는 등 전쟁의 양상이 어렵게 흘러가고 있소이다. 그렇다고 폐하께서도 지속적인 군의 증원은 이어갈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천수성의 군사력과 창천맹의 전력만으로 반드시 이 문제를 타개하라는 당부를 하셨소. 이것이 황제 폐하의 강력한 의지요.”
완안홍균은 마지막 문장을 이야기할 때는 어조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 제갈무문을 보면서 손짓으로 대화의 흐름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난 이동하면서 개방과 하오문 등을 통해 창천맹과 상장군 지휘부 측의 서신들을 계속 받았네. 또 마침 완안 부사께서 상장군의 생각을 담은 서신을 전해주셨기에 상세한 계책을 구상할 수 있게 되어서 여러분을 이곳으로 부른 걸세.”
“무얼 하면 됩니까?”
“일단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이 일행은 둘로 쪼개질 필요가 있네.”
“어떻게요?”
가장 빨리 반응하여 대답한 건 천서은이었다. 불길한 느낌을 바로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무문이 그 미안한 표정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달했다.
“천 소저와 영은성, 최현걸 두 사람은 창천맹에 합류하여 전쟁 일선에서 싸워주게. 이 임무는 진도건과 안 대협 두 사람이 맡는 게 좋겠어.”
“제가 아니라 왜 안 대협이죠?”
천서은이 무척 서운한 얼굴로 제갈무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천서은은 하가장에서부터 느끼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생각에 대단히 실망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쉬운 건 진도건도 마찬가지지만, 그저 실망스럽기만 한 천서은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갈무문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단 들어보시게나. 조태상 상장군은 이 전장에서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네. 그러기 위해선 천마신교를 지원하는 서하군의 증원을 끊을 필요가 있네. 그런데 서하는 왜 천마신교를 지원하고 있을까?”
“……하나라 군정을 마교가 장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영은성의 질문에 제갈무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까지 치달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증원이 이뤄지는 상황의 막후에 그들이 있다는 건 틀림없네.”
안효철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안효철은 주태소를 도와서 녹림을 통제하려던 마교의 술수를 차단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중원무림에 대해선 그 뜻을 제대로 펼쳐내지는 못했지만, 관리들을 상대하는 게 그들에게 더 쉬운 일일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그럼 어떤 계획입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저희 모두가 간다고 해도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두 분으로 되겠습니까?”
최현걸이 의문을 품고 물어보자 천서은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엔 헤어짐에 대한 거부감이 담겨있는 몸짓이었다.
일찍이 진도건과 천서은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들었던 완안홍균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갈무문도 그런 그녀의 반응이 계속 눈에 밟혀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우리는 중요한 두 사람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타개해 나갈 걸세. 첫 번째는 바로 제국충무왕(齊國忠武王) 이언종(李彥宗)일세. 친금파도, 반금파도 아니지만, 천하의 정세가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을 거로 보기 때문에 강병론(强兵論)을 주장하는 서하 황제의 조카일세. 이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천무방의 황검당이 움직이고 있네.”
“황검당이요?”
“그렇네.”
천무방의 개편된 사당 중 하나의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 몰랐던 천서은이나 진도건 모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조금 전 의문을 가졌던 부분인 인적 자원의 문제에 대해서 황검당을 선택한 건 적절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황검당은 이혁성을 필두로 한 50인의 검사(劍士) 조직이었다. 50명이라는 숫자는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하면서도 지나치게 과하지 않을 정도의 숫자이기도 했다.
“이미 열흘 전부터 제국충무왕이 있는 고원성(固原城)으로 움직이고 있고 우리 측 사절도 미리 방문해서 그를 설득할 계획이야. 그는 군사를 파병하는 상황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황제 폐하의 친서를 전한다면 기꺼이 흥경(興京)으로 올라가서 서하 황제를 알현해 줄 거야. 반금파가 많긴 해도 기본적으로 인종 황제가 전쟁에 미온적이어서 충분히 파병 조치를 끊을 수 있네.”
“그래도 일국의 왕으로 책봉된 황실의 사람을 그 정도 인원이 보호하려고 가는 것도 맞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호위병들이나 개인적으로 고용한 무림인도 있을 텐데.”
“처음엔 마교가 배후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황을 확인했을 때만 해도 자네들과 안 대협을 보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최근 확인된 소식을 듣고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네.”
“무슨 소식이었습니까?”
“살문이 지금 서하에 있다네. 특히 월하사신 사금령(沙禁零)과 그 휘하의 살수들 대부분이 말이야.”
“그럼 살문이?”
“맞네. 살문은 지금 천마신교의 예하에 복속되어있어.”
뜻밖의 무거운 소식이었지만, 최현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말로 살문이 마교에 가담했다고 하면 차라리 창천맹이나 맹을 지원하는 문파의 수장을 노리는 게 나을 텐데요? 어차피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이상, 그들의 야심도 무림을 가리켜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금 황실이나 송 황실이 아니라 어째서 서하 황실을 노린단 말입니까?”
완안홍균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소개의 뜻을 내 오해하진 않겠지만, 듣기에 따라서 불편할 수 있으니 표현에 조심해주시오.”
“송구합니다.”
최현걸도 즉시 사과하면서도 속으론 그가 참 까탈스럽게 군다고 여겼다. 금 황실의 인척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드러나는 게 아니라 대놓고 드러내는 꼴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