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 제51장. 천마신궁에서의 해후(邂逅) (1)
“허억!”
눈을 번쩍 뜨면서 잠에서 깬 진도건이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아직은 야심한 시각임을 깨닫고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팔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그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옆에서 잠을 청하던 천서은도 잠에서 깬 것이었다.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야심한 밤.
주변에 보이는 숲과 언덕의 가림막 사이로 부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덮고 있던 모포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러자 목과 가슴께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 때문에 더 차게 몸이 식는 것이 느껴졌다.
천서은은 진도건의 손등과 바깥으로 드러낸 팔을 쓰다듬고 닭살 돋은 피부와 솜털이 한껏 서 있음을 느꼈다.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래요?”
진도건이 고개를 돌려 천서은을 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아름다움이나 걱정 어린 표정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초점 흐린 눈으로 잠시 그렇게 보고는 두리번거리듯 시선을 다시 돌렸다.
잔디와 잡초를 제거하고 흙을 둥그렇게 파낸 자리에 만든 화톳불은 아직 작은 불길을 유지하고 있었고 너머로 영은성과 최현걸이 모포를 덮은 채 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보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작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한쪽 무릎을 세운 채로 앉아서 이쪽을 흘끔 보던 안효철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심한 악몽을 꾸었나보군. 자네, 하가장을 다녀온 이후로 잠꼬대가 늘었어. 이제 잠에 깊이 들 수 있는 시간인데 벌써 깨다니 말이야.”
안효철이 진도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자신의 피로를 운기조식으로 관리할 수 있는 무림인들이었기에 하루 수면량이 많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렇게 야영을 하면서 불침번을 교대해도 두 사람이 새벽 간에 한 번 정도만 번을 바꿔도 충분했다.
하지만, 무림인도 악몽으로 잠을 설치거나 하면 다시 잠들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진도건도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눈앞에 흔들거리는 잔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네,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악몽이라 하긴 어렵지만, 또 너무 선명해서 오감이 다 깨어날 정도네요.”
그의 말을 듣고는 더 걱정되었는지 천서은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진도건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살짝 쳐다보고는 다른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눈앞에 어른거리던 잔상을, 머릿속에 새겨진 꿈속의 시야를 다시금 되새겼다.
“칠흑처럼 물든 세상, 밤과 다른 검은 하늘. ……그 한가운데에 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뭘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그걸 겪고 있는 저를, 제 속에 담긴 채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군요. ……마치 혈마처럼.”
성도성을 둘러싼 환진 속에서 싸웠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환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그 안에서 정신이 계속 깨어 있어서 의식을 공유하던 혈마의 느낌이 이러했을까?
“혈기가 사방에 광풍처럼 몰아치는 것 같았고, 저도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뚜렷하지 않았는데…… 정말 많은 악의를 마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악의에 가득 찬 암흑도, 제게서 비롯된 것들도……. 무너지고, 부서져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 빨아들이는……. 백발의 노인?”
“그게 누군데요?”
천서은의 물음에 진도건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못 봤어. 어떤 느낌을 받은 것 같긴 한데…… 거기까진 기억이 나질 않아.”
“느낌도요?”
“어려워……. 어디선가 마주한 것도 같은 느낌인데, 또 너무 낯설어서……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하게 전개되는 진도건의 이야기를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던 안효철도 입을 떼었다.
“빨려 들어갔다가 아니라 빨아들인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군.”
진도건과 안효철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도건은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발현됐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려가던 꿈속의 장면들.
그 부서져 버린 파편들이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듯한 거대한 소용돌이의 대류에 이끌려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었는데…….
진도건이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나 보군요.”
진도건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강조한다.
“더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째선지 서둘러 끝맺음하려는 듯한 느낌을 안효철과 천서은 모두 받고 있었지만, 그들도 더 묻지는 않았다. 생동감 있는 묘사에 어쩌다 보니 빠져들어 듣긴 했으나 어차피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천서은은 하가장에서의 일 때문에 진도건이 과한 책임감으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만 자요.”
“그래, 눈을 감고 생각을 비우면 다시 잠들 수 있을 게야.”
천서은과 안효철의 말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모포를 덮으면서 누웠다.
천서은이 진도건의 팔을 끌어안으면서 바짝 붙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가을의 싸늘한 밤바람에 저항하여 안락감을 주었다.
하지만, 진도건은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서도 쉽사리 생각을 비울 수 없었다.
백발 노인 위로 드리워진 그것.
하얗고 붉은 빛무리에 둘러싸인 채 검게 빛나는 그것은 마치 ‘검은 태양’을 보고 있는 듯했다.
검은 태양.
그 불길한 징조와 같은 현상을 마주하면서, 진도건은 꿈에서 깨기 직전에 왠지 모를 그리운 감정이 가슴 속을 관통하는 걸 느꼈었다.
그 모순된 느낌이 가져온 찰나의 각인이 사각사각 그의 심장을 긁고 있는 것 같았다.
* * * *
아유타가 일어서려다가 비틀거리자 다르파가 서둘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라마, 방금 그것은……!”
아유타가 다소 힘겨운 표정으로 숨을 고르다가 다르파를 슬쩍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번째 계시.”
“무엇을 보셨습니까?”
마음이 급했는지 다르파가 호들갑스럽게 묻다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성혈신마의 위를 아유타가 제자에게 위임한 이후로 그녀에게 붙었던 무영각의 무영들도 같이 이동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다시 새로운 무영이 붙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천마신궁을 남동쪽 정문에 해당하는 정면에서 보았을 때, 무영각은 흑궁 바로 뒤에 감춰지듯 있었다. 전각은 계곡을 타고 세워져 있었는데 천마신궁의 각처로 이어지는 그들만의 비밀 통로로 무영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의 무공이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이어도 잠행과 감청감시 능력은 하늘 아래 따라올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 순간에도 환상 아래 구축한 그들만의 공간 속에서 지금 아유타와 다르파가 있는 곳을 감시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유타가 괜찮다는 듯 다르파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들어서 발로 지면을 밀어내면서 몸을 바로 세웠다.
그녀도 성혈신마 때의 무공을 일신에 지녔기 때문에 스스로 정진을 멈춘 지 오래됐다고는 하나 가까운 거리의 접근은 아무리 무영각의 환상무영술이라도 감지할 수 있었다.
계시를 받는 순간의 광휘는 스스로 억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무영의 감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반드시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와야 하는 일이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후우…….”
아유타는 다시 숨을 고르고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다르파의 두 손을 잡았다.
다르파도 무공을 익히면서 노화를 많이 이겨내긴 했어도 초로에 이르러 피부가 주름지는 수준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유타는 방중술을 익히거나 다른 사술을 다루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성숙한 여인의 미모와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유타의 나이 올해 딱 100세에 이르렀다.
용모가 화려하진 않으나 까무잡잡하고 탄력 있는 피부에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녹갈색의 오묘하게 빛나는 눈빛은 마주 보는 사람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달리 ‘제육천(第六天)의 성녀(聖女)’라고도 일컬어질 만큼 자애로운 기운이 절로 퍼져나가서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는 건 당대의 성혈신마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천마신궁 내에서 지고의 위치에 있다 볼 수는 없으나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위치로 자신을 올려놓았다고 할 만큼 그녀의 위치는 천마신교와 이질적인 지점이 있었다.
‘스무 살 때, 첫 계시 이후로 80년만……. 내 생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만든 건 어쩌면 오늘의 계시를 받기 위함이었을까? 그렇다면 조금 전의 계시는 과연 마지막 계시일까?’
아유타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면서 다르파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때가 도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변화하였습니다. 다시 돌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지금 이대로 가면 되는 것입니까?”
아유타가 고개를 저었다.
“변한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소승이 제자들에게 조용히 전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유타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함께 아유타의 불당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 앞에서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아유타가 궁전과 성벽, 요마산의 산림을 넘어 동쪽 멀리 시선을 던졌다.
어딜 보는지 모를 정도로 까마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치였는데, 아유타는 잠시 그렇게 있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어 불당으로 들어갔다.
아유타는 계시를 받은 인물이라서 그런지 앞으로 벌어질 중요한 일들을 어렴풋한 느낌으로 예지하거나 인지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다르파도 방금의 행동에서 아유타의 그런 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불당 안은 그야말로 아유타의 영역이기 때문에 무영이 파고들 틈은 없었다. 다르파도 비교적 안심한 상태로 직접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오래되었지만, 친숙한……. 어쩐지 반가운 얼굴이 신궁을 찾을 것 같군요.”
“반가운 얼굴이라…….”
다르파는 아유타가 반가워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지 떠올렸다.
오래전, 성혈교의 방침에 변화가 있고 난 뒤로 천마신교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만남을 반길 만한 인물은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냉소평은 최근에도 보았으니 아닐 것이고, 혹시 태상교주께서 하산이라도 한 것일까요?”
구주마종의 신마들 가운데서도 일월신마 냉소평은 아유타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한 사람이었고, 태상교주는 천마조사 단용후 생전 때 함께 활동한 전적도 있어서 나름대로 깊은 인연이었다.
아유타는 관세음보살좌상 앞의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하면서도 다르파의 중얼거림을 계속 듣고 있었다.
“다르파의 말씀을 듣고 나니 연상(聯想)이 선명해집니다. 확실히 단 태상이 하산한 것 같군요.”
대게 예지는 흐릿하게 다가오지만, 주변에서 이렇듯 적절한 이야기를 듣게 되거나 적절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그 예지가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경계할 사람. 오히려 그보다 더 오래된…….”
아유타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붉은 입술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반가운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대마의 유변 어른께서 방문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