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 제50장. 전래동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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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목제는 회골족들이 주로 사는 신강의 가장 큰 거주구였다.
동쪽의 박격달봉을 시작으로 남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천산산맥을 끼고 있었고 많은 오아시스도 자리하고 있어서 주변이 척박한 지역임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 거주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특히 서쪽엔 제법 큰 염호(鹽湖)가 있어서 암염(巖鹽)이 생산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비단길이 지나다 보니 교역상들이 가져온 많은 물자가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
토착민들은 나무 기둥으로 구조를 만들고 흙을 쌓아 올려 지은 집에서 살았다. 반면에 주 시가지는 당대의 영향을 받아 기와를 활용한 지붕이 있는 전각들도 많았다. 그래도 중원의 그것과는 다르게 도시의 밀도는 높은 편은 아니어서 길거리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오로목제는 엄밀히 얘기하면 회골족의 나라 쿠초 왕국의 영토에 속해있었으나 국가의 지배력에서 멀어진 지 매우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북쪽 사막의 도적들이 출몰하면 자체적으로 꾸린 자경단으로 방어했어야 했는데 국가적인 지원이 부족해 인명과 재산을 지켜내기에 역부족일 때가 많았다.
이는 쿠초 왕국이 과거 중원 북방 초원의 거대한 영토를 점유하였다가 지금은 몽골족과 금나라에 의해 신강 북부 지역으로까지 멀리 쫓겨난 요나라의 속국인 탓도 있었다.
요는 천조제(天祚帝) 시대에 금 초대황제 완안아골타에 의해 멸망했었다.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금에 저항하여 야율순(耶律順)을 황제로 옹립하고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 요의 정부를 다시 세웠으나 3년 뒤 금에 의해 또 멸망했다. 야율대석은 여기서 포로로 잡혔다가 몇 달 후 탈출하여 서쪽에 피신해 있다는 천조제에게 합류했는데 천조제로부터 금을 다시 공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야율대석은 이 요구에 회의적이었기에 독립할 생각을 품게 되었고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을 거느리고 몽골 초원 서쪽으로 멀리 떠났다. 여기서 세력을 확장하여 나라를 세우고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카라한 칸국을 정벌하고 호라즘 왕국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한 것이 지금의 서요 제국에 이르렀다.
한편 천산산맥 너머의 서쪽 지방의 회회교(이슬람)를 믿는 돌궐족(튀르크족)들은 서요를 흑거란(黑契丹)이란 뜻의 ‘카라 키타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는데 이들의 군사력 상당 부분은 회골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강대한 금 대신 서쪽을 정벌하는 서요의 입장에선 소수파인 거란족 자신들도 그 지역에 녹아들 필요가 있었으므로 회골족과 돌궐족까지 징집하여 어우러진 것이었다.
지금의 서요는 전 황제 야율이열(耶律夷列)가 10여 년쯤 사망하여 그의 누이 야율보속완(耶律普速完)이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총명한 위인이었으나 권력에 대한 사익에 집착하는 편이어서 서요의 국력이 조금씩 흔들리는 실정이었다. 그 때문에 서요의 지배 아래 있는 쿠초 왕국도 치안 상태가 나빠졌는데 50여 년 전부터 천마신교의 세력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치안 문제 해결이 필요했던 오로목제를 중심으로 비단길을 타고 뻗어나가 서장과 청해까지 그 영향력이 퍼지고 있었다.
천마신교가 탄생했던 시기에 그들은 보통의 종교와는 다른 방향으로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이 퍼져있던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종파 간의 다툼도 있었고, 회회교도 흘러들어오며 종교 간 마찰도 있었다. 서쪽으론 서요의 정복전이 있어서 군사와 공물 징발도 빈번했고 동쪽에 서하의 견제도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천산산맥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사막이 있어서 마적 떼가 창궐하기도 하여 비단길 교역로가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다.
단용후는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방해하려 했다는 ‘마라 파피야스’, ‘천마’의 화신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일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의와 탐욕을 제어하여 질서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단용후가 중원인 출신이라는 점과 그가 퍼뜨린 허상이 가득한 소문들은 처음엔 당연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년 뒤부터 그가 주장했던 것들을 입증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서장 랍살(拉薩)의 포달랍궁과 전쟁까지 벌였던 사교 일월교가 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월교는 곤륜산맥의 남쪽 지맥인 바옌카라산맥(巴顔喀拉山脈) 산중에 위치한 곳으로 일찍이 기이한 무공을 연구하는 곳이라 하여 마교로 탄압받던 곳이었다. 서장의 토번인(吐蕃人:티베트족)들에 의해 이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포달랍궁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는데 단용후가 이들을 세력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그 이후 포달랍궁과 전쟁하던 것까지 중재가 되었는데 비슷한 시기 포달랍궁의 분파였다가 완전히 갈라서면서 격렬한 분쟁을 일으켰던 성혈교도 불교의 골칫덩이였다. 그런 성혈교를 단용후가 끝내 포섭하게 되면서 서장의 분쟁을 종식하고 신강, 서장, 청해를 아우르는 새외삼성(塞外三省)에서 그 명성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후 단용후는 천마신교를 본격적으로 창교(創蛟)하면서 청해를 활보하던 도적단인 적룡단을 제어하였고 그들을 이용해 타클라마칸 사막 도적단들을 토벌하였다. 또한, 천산 북쪽 사막과 몽골초원 서쪽 지역에서 혼란을 일으키던 야율강의 흑풍대까지 천마신교 아래에 복속시킴으로써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
이런 지경이 되었을 때마침 단용후가 마침내 아들인 단원진에게 교주직을 물려주고 타계(他界)하니 회골족, 토번인 그리고 서하의 강족까지 그 신화적인 행보가 퍼지면서 ‘진정한 천마의 화신’, ‘마라 파피야스의 현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명성은 포달랍궁으로선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서장에선 단용후를 가리켜 석가모니가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마라 파피야스를 그 안에 가두고 인간계에 퍼진 욕계(欲界)의 업을 끌고 돌아가라 지시한 것이라며 깎아내리곤 했으나 단용후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백오십여 년 전 토번제국의 멸망 이후로 그들은 불교 종파 분쟁으로 인해 단결된 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엣가시로조차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포달랍궁의 그런 모함 아닌 모함은 단용후의 위세를 더 높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장한 천마신교가 오로목제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중앙 오아시스의 남서쪽 산지에 그 본궁을 짓게 되었다.
하필 오로목제 회골족 토착민들은 오래전부터 그 산을 요마산(妖魔山)이라 부르고 있었으니 천마신궁(天魔神宮)이라는 본궁의 명칭과 절묘하게 어울려 더욱 상징적으로 되었다.
요마산은 높게 자란 산림으로 인해서 산 내 건축물들이 바깥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태양이 높게 떠 있는 낮 동안에는 천마신궁의 일부를 산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요마산 정상, 숲을 뚫고 웅장하게 솟아오른 하얀 성벽들이 있었고 그 안쪽 성벽 위로 사각의 검은 벽면의 대전(大殿)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교주가 기거한다고 알려진 흑궁(黑宮)이었다.
이 대전이 지어진 건 단원진의 대에 이르러서였는데 건축이 완료된 날 염황의 불꽃이 벽면을 타고 일렁이면서 겉을 태웠기 때문에 검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대전의 벽면이 눈에 들어왔으나 산 아래에선 그 실상을 보기 어려웠다. 동남으로 천산의 산줄기가 있으나 기본적인 거리가 일반적인 시각에서 상당히 멀었으니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마라 파피야스’, ‘파순(波旬)’, ‘천마’ 등으로 불리는, 붓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를 상징하는 궁전인 만큼 전체적인 건축의 양식은 포달랍궁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만약 천마신교와 포달랍궁 사이로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거대한 타림 분지(塔里木盆地)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그 아래 세상의 벽처럼 펼쳐진 곤륜산맥이 아니었다면 둘은 분명 어느 한쪽이 완전히 지리멸렬할 때까지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물론 현시점에서 천마신교는 새외에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었으니 포달랍궁은 조용히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흑궁이 본궁이라면 요마산의 능선을 따라 북동쪽 정상에도 비슷한 양식의 성벽과 대전이 좀 더 작은 규모로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무엇을 기능하는 것인지는 전체적으로 장막에 가려진 천마신궁의 특성처럼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새하얀 대전의 벽면과는 다르게 천마신궁 안에서는 그곳을 ‘성혈궁(聖血宮)’이라 칭했다.
바로 성혈교가 천마신교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 잡은 곳이기도 했다.
천마신교를 창교할 무렵에 그들의 세력은 약 200여 명에 이르는 규모였다. 하지만, 지금의 성혈교는 50여 명 수준으로 줄어 있어서 상당히 넓은 성혈궁의 대전은 언제나 다른 곳에 비해 한산한 느낌이 들었다.
성혈교 소속의 인원들은 천마신궁 내 유일한 승려들이었다.
본래 출신이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종파 중 하나인 카규파(噶舉派)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붉은 계통의 승복을 입는 포달랍궁과 달리 성혈교 승려들은 흰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카규파는 사찰도 벽면을 백색으로 칠하기 때문에 중원에선 달리 ‘백교(白敎)’라 지칭하기도 했다.
성혈교의 승려들은 자신들의 ‘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포달랍궁과 카규파를 비난하고 그들과 다투어 대규모 유혈사태를 일으켰던 책임.
특히 카규파의 상징적인 사찰인 감포사(岡波寺)를 공격한 건 자신의 아버지를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만행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당시에 그들은 그런 책임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들뜨고 대단히 흥분하여 이성을 상실한 것인지.
그 ‘계시(啓示)’로 인하여 자신들의 본분이 무엇인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성혈교의 최고참 노승려인 다르파는 걸음을 차분히 눌러가며 성혈궁 내 계단을 밟고 있었다. 벌써 여든이 넘는 고령이었지만, 성혈교와 천마신교의 무공 수련으로 안정된 수명은 고행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마침내 5층에 올라간 그는 바로 보이는 문을 열었다.
궁전의 너비 전체를 거의 아우를 정도로 대단히 넓은 방이었다.
한쪽엔 가림막이 있어 침상이 있었고 다른 쪽 벽면엔 관세음보살의 좌상이 있었다.
천마신교 안에서의 관세음보살좌상이 썩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곳은 천마신궁 안에서도 성전(聖殿)과도 같은 곳이어서 누구도 성혈교를 간섭할 수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관세음보살좌상 앞에 놓인 크고 넓은 붉은 방석 위에서 참선(參禪)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다르파는 찾는 사람이 없자 방안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리고 그가 들어온 입구 반대편에도 똑같이 나 있는 문을 열자 바깥의 햇살이 눈이 부시게 그를 비추었다.
성혈궁의 옥상이었다.
다르파가 지나온 곳은 사각 형태의 대전 위에 그보다 작은 너비로 마련된 방이었고 나머지는 햇살과 바람을 맞을 수 있도록 마련한 여유 공간이었다.
한쪽엔 덩굴 보리수가 나무 기둥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형성한 장소가 있었는데, 거기에 한 여인이 다르파 쪽에서 등을 돌린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아……!”
단말마의 신음이 여인에게서 들려왔다.
여인이 허리를 펴고 머리는 반쯤 뒤로 젖힌 채 갑자기 두 팔을 위로 펼치더니 부르르 떨었다. 또 그녀의 신체에서 하얀 백광이 넘실거리면서 흘러나왔는데 그게 수 초간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다르파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르파가 다섯 살 정도였던 시절의 흐릿한 기억 속의 장면이 떠올랐다.
마을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앉아 스승 밀라레파의 가르침을 들으며 명상하던 그날은 평범한 농노의 딸로 태어난 처녀가 스무 살이 되던 날과 같았다.
그날, 스무 살의 처녀는 수 초 동안 하얀 빛무리에 휩싸이더니 마치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어떤 이야기를 줄줄이 읊고는 기절해버렸다.
그렇게 그날은 ‘계시의 날’이 되었다.
지금 다르파의 눈앞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는 중년의 여승이 바로 성혈교의 라마이자 초대 성혈신마인 아유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