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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74화 (274/432)

274화 - 제50장. 전래동화 (4)

구마진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지자 유변이 다시 실소를 흘렸다.

“허허! 능구렁이라니…….”

“살날도 멀지 않았다고 했으니 기왕이면 엄한 데서 요절하지 마시구려. 대마의가 몸소 얘기했다시피 어차피 우리가 같은 혈마의 뿌리를 공유한다면 당신 내공을 내게 전해주는 게 옳은 일 아니겠소? 가시는 길 고통스럽지 않도록 내 살살 빨아내 드리리다.”

“거참 소름 돋는 말이로구먼. 그러고 보니 자네가 혈마로 내정된 상황도 참 흥미롭구먼, 그래.”

“……뭐가 말이오?”

“자네가 옛날부터 홍천환을 탐했던 거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긴 했어도 그동안 흡성대법으로 저지른 행간을 볼 때, 고위층 누구도 자네의 지위 상승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었잖나.”

“다시 내 심기를 건드리기로 작정하시었소?”

“하지만, 다른 훌륭한 재능들을 뒤로하고 교주께선 자신이 새롭게 제조한 홍천환을 자네에게 주었네. 흡성대법으로 여러 정적의 내공을 뺏어오면서 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자네의 하단전은 또 다른 혼돈 그 자체. 어찌 보면 홍천환의 특성을 예견하여 자네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는 걸 알아보신 것이 아닐까……?”

유변의 말에 구마진은 머릿속이 잠깐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 말은…… 어차피 홍천환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나밖에 없었다는 소리요?”

“새롭게 제조된 홍천환이 내가 제조한 것들과 바탕은 다르지 않을지라도 혼돈의 수준은 부족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흡성대법으로 단전에 쌓아 올린 난잡한 기질은 혼돈과 닮아있어 나름대로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다만 그래도 갈증을 느낄 만한 부분이 있었으니 내 것을 탐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야. 그때 교주가 마을에 나타나 내게 흡성대법을 시전하는 자넬 말린 것도 모두 그런 의중 아래 있었던 일일 것일세.”

구마진이 인상을 다시 한번 찌푸렸다.

그때의 정황이 명확하게 설명이 되는 만큼 새롭게 떠오른 의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흡성대법으로 쌓인 혼돈 상태에 가까운 내 내공이 자양분이라고 했잖소. 아까 천마와 혈마 둘 다 혼돈이 속성이란 식으로 말했는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구마진의 물음에 유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호오, 그거 흥미로운 논리로군. 이 늙은이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네만…….”

유변이 말꼬리를 흐리자 구마진은 그의 대답을 순순히 기다렸다. 생각해보지 않았다고는 했으나 왠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파아아-!

천산의 바람 소리를 뚫고 작게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 소음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돌풍과 함께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니 금방 사마월이 일으킨 것임을 알았다.

그 모습을 본 유변이 입을 뗐는데 흘러나온 말은 구마진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오시나 보군. 우리의 전래동화 해례(解例)는 아무래도 여기서 마쳐야 할듯싶으이.”

유변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으로써 달라진 시선 높이에서 사마월이 아래쪽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마진은 그를 다그쳐 더 묻고 싶었지만, 아래쪽에서 일어난 소란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유변이 이곳에 온 목적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지만, 구마진은 그가 누굴 보러 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도 별로 마주친 적이 없었으며 교주 단지운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여서 앞으로도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마의가 날 보러 왔다고 하니 내 이리 마중 나오게 되었소!”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늙수그레하지만, 힘이 넘쳐흘러 산봉우리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태상교주 단원진이었다.

단원진이 사마월의 어깨를 한쪽 팔로 끌어안은 채로 붙어서 빙첨탑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그 뒤로 양자성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사는 무영각에 단원진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먼저 산을 내려간 상태였다.

유변은 단원진을 보고 비스듬히 허리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허허허! 아니, 예까지 왔는데 이 친구를 시켜 주변을 경계하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요?”

구마진은 단원진의 그 말을 듣고 사마월 쪽에서 일시적으로 기풍이 일어나며 눈발이 흩날렸던 게 떠올랐다.

“대통현에서 여기 구마진에게 다친 적이 있어서 말이오. 근처에 흑각수라도 숨어서 지키고 있을지 모르니 경계하면서 신호를 보내 달라고 했던 것인데, 단 태상께서 보시기에 불편하신 듯하니 내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소.”

“아아! 그게 바로 저 녀석인가 보군.”

단원진이 구마진에게로 눈길을 흘끔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구마진이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푹 숙였다.

“혈마 구마진이 태상교주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꼴이 이러하여 엎드려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 용서해주십시오.”

찰그락!

구마진이 일부러 힘을 조금 주어서 사슬에 묶여있는 상태를 소리로 드러냈다.

단원진은 별 관심이 없었는지 픽 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유변에 시선을 돌렸다.

유변은 천마신교 내에서 유이(唯二)하게 단원진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이었다.

천마조사 단용후 때부터의 인연을 따져보면 사실상 단원진에겐 사숙뻘 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태상교주를 향한 유변의 경어처럼 단원진의 말에도 거침없되 존중의 어조가 실려있었다.

“대마의께선 몸은 괜찮으시오? 저놈에게 홍역을 치렀다 들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소.”

“저놈이 감히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대마의에게 위해를 가했으니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단원진이 정말 으르렁거리면서 얘기하자 구마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때문에 빙첨탑에 묶인 사슬이 철컹거리기도 했다.

“창천맹과 전쟁이 한창인데 간신히 얻은 혈마를 또 벌해야겠소? 교주께서 천마의 위엄을 보여 그를 고통에 이르게도 하였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이 늙은이도 어찌 되었건 저 녀석에게 혈마종의 지위를 그에게 인계해야 하는 마당이니 이 정도로 매듭을 짓는 게 옳다고 여겨지오.”

“대마의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흐음……!”

단원진이 한 차례 노려보자 구마진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징벌 기간은 얼마나 남았느냐?”

“……이주 정도 남았습니다.”

“아래 호숫가에 무영 사가 머무는 걸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징벌이 종료되거든 사에게 일러 곧바로 날 보고 떠나도록 해라.”

구마진은 직감적으로 단원진의 말이 용암비동에 들르라는 말이란 걸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인정받는 길……!’

마도대의 그리고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아홉 갈래의 마도.

홍천환을 통해 고대하던 혈마의 힘을 얻고 교주로부터 혈마의 위를 임명받아 혈마종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비어있는 혈마위를 차지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태상교주의 인도하에 용암비동 안에 있는 혈마동에 마정을 구체화하는 것이야말로 화룡 그림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려움이 스며들어 있던 그동안의 대답들보다 좀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구마진의 대답에 단원진이 씩 웃더니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양자성을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의 꼴이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안면을 튼 김에 서로 인사를 해두어라.”

“……예.”

단원진의 말에 양자성은 얼떨결에 대답하면서 구마진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막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려는 찰나, 단원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제자, 양자성이다.”

“……양자성입니다.”

단원진이 먼저 소개하는 바람에 양자성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유변과 사마월 뿐만 아니라 구마진도 대단히 놀란 눈으로 양자성을 쳐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도 기도가 범상치 않다고 다들 은연중에 느끼긴 했었지만, 단원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제…… 자? 단 태상, 교주가 있는데 어찌……?”

유변이 놀란 얼굴로 묻자 단원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껄! 대마의께서 그리 놀란 얼굴을 하시는 건 내 살면서 처음 보오. 어차피 우리 오래 묵혀둔 이야기들 다 꺼내려면 하루 가지고는 부족할 텐데. 내 차차 이야기해드리리다.”

“교주는 알고 계시오?”

“오늘이 하산하는 날이니 교주도 곧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내 제자로서 내 아들과 마도대의를 위하여 성심껏 보위할 것이니 말이오. 그렇지 않으냐?”

“스승님의 뜻대로 할 것입니다.”

유변이 양자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곧 이상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자그마치 단씨 일가 3대를 모두 지켜봤던 유변이었다.

유변은 어찌 보면 천마로서의 혈통이자 적통으로서 이어진 그들 특유의 기도를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는데 양자성에게서 느껴지는 건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다르군. 그래, 유심히 보니 느껴져. 천마의 마성을 온전히 잇진 못하였구나. 생김새도 신강의 다른 혈통들과 구별되는 중원인처럼 보이고. 어디 출신이냐?”

단원진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유변과 양자성을 번갈아 볼 때, 양자성이 유변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중원무림에 검림이 본래 제 출신이었습니다. 또 백령신검 강정학은 제 전 스승이었습니다.”

“허허!”

단원진을 제외한 세 사람이 유변의 웃음에 맞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양자성을 보게 되었다.

강정학이라고 하면 천마신교 최대의 적수 중 한 사람인데 그 제자가 지금은 천마신교 태상교주의 제자라는 사실이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 재능을 아껴 기꺼이 천마신공을 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다른 길을 개척하더이다.”

사실 마령검에 의해 마성이 형성되고 그 영혼에 녹아들었으니 양자성이 개척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단원진은 굳이 그들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해줄 생각이 없었다.

유변은 단원진의 말을 듣고 양자성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허리춤의 검에도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그때는 단원진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가 유변이 다시 양자성의 얼굴을 쳐다보자 평범한 시선으로 다시 지켜보았다.

유변이 몸을 돌려 단원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만 내려갑시다, 단 태상. 어쩌다 얘기가 길어졌는지…… 이 천산의 바람을 계속 맞고 있으니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구려.”

유변이 짐짓 어깨를 떨어 보이자 단원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진과 유변, 양자성, 사마월이 함께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눈더미를 헤치며 내려가자 다시 한번 산봉우리 위로 눈바람이 피어올랐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에 잠시 시선을 던지고 있던 구마진의 눈빛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빙첨탑 금쇄형은 사실 대통현에서 단지운으로부터 일격을 받아 한동안 시달렸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굶주림과 꼼짝 못 하는 상태가 처음에 힘들었을 뿐이지 이제는 시간이 제법 흘러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였다.

지루함도 그저 내기 흐름을 관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과 아침저녁으로 찾아오는 설매화의 시중으로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그런 변화라곤 없을 시간 속에서 유변과 단원진의 등장, 그리고 양자성이라고 존재의 특이점이란 굳어버린 머리로 쉽게 정리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유변이 늘어놓았던 많은 이야기 가운데 그 가운데서도 머릿속을 지배했던 건 ‘혼돈’이라는 두 글자였다. 하지만, 단원진이 등장과 자신을 찾으라는 지시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것과 동시에 양자성의 존재감이 갑작스레 부각이 되면서 화가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누구는 이 지경까지 오도록 개고생해서 간신히 혈마가 되었는데……, 저 새끼는 백령신검의 제자라는 이유로 태상교주의 제자가 됐다고?’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자연스럽게 기운도 요동치면서 그의 몸에 얼어붙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증발하여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자연스럽게 몸에도 힘이 들어가면서 꿈틀거리자 몸을 묶고 있는 만년한철 사슬도 철렁거리면서 요란을 떨었다.

꼬르륵!

그 순간 그 어떤 소리보다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소리가 있었다.

일부러 감각의 뒷전에 놓았던 허기가 다시 두드러지면서 그의 식욕을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잘 버텨온 시간이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 셈이었다.

꼬르륵!

다시 한번 뱃속에 든 거지가 야단법석을 떨어대자 구마진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런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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