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 제50장. 전래동화 (3)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관계는 천산의 바람만큼이나 차가웠기에 사실상 혈마의 지위를 확보한 구마진으로서는 유변에게 관심이 많이 줄어 있었다.
당연히 유변의 내공은 탐이 나는 것이지만, 아마 사단을 벌인다면 어떤 낭패를 다시 겪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큼 대통현에서 단지운에게 일격을 얻어맞고 느낀 고통은 교주에 대한 두려움이 더 공고해지게 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오? 당신이 날 보러 왔을 리는 없는데.”
구마진의 질문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유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옆을 슬쩍 보았다. 가까이 있던 바위로 가서 위에 쌓인 눈을 털고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다시 구마진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동자에 붉은 현기가 감돌았다.
“내가 홍천환을 복용했을 때, 나는 큰 홍역을 치렀다네.”
“……뭐?”
“단용후로부터 홍천환을 제조하기 위한 처방과 술진을 전해 받았을 때, 나는 사술같은 방법으로 그런 영약이 가능한지 대단히 의문스러웠었지. 하지만, 몇 차례 실험을 끝내고 나서는 가능성을 확인했고 나는 술진의 술식을 깊게 파고들어 나중엔 그것을 해독하는 지경에 이르렀네. 지금의 천혼제정대진은 단용후가 내게 전해준 것보다 더 개량된 것이야.”
구마진이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소를 흘렸다.
“키킥……. 기왕 혈마가 되었으니 역사 교육이라도 시키러 오신 것이었소?”
“글쎄. 어차피 자넨 한 귀로 듣고 그대로 흘릴 테니 의미 없는 행위이겠지마는 어차피 충분히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리 길게 얘기하진 않을 테니 늙은이가 전해주는 전래동화를 듣는다고 생각하시게.”
구마진은 조소를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유변을 쳐다보았다.
그때 사마월은 유변에서 잠시 떨어지더니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쪽으로 내려가서는 어깨 정도 간신히 보일 정도로 떨어져 섰다. 구마진이 금쇄를 풀고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행동이기에 절로 시선이 갔다.
한편으로는 유변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지 한층 더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기왕이면 지루하지 않게 풀어보시구려.”
“훗!”
무미건조한 어조로 얘기하는 구마진의 대답에 유변이 피식 웃었다.
“어느 정도 실험으로 해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마지막 실험을 위해 작은 용량의 환단을 다섯 개 제조하여 낭인들에게 실험해봤네. 운양사에서 의술을 연구하는 스님이 제조한 보양단이라고 하며 전해주니 좋다고 받아먹더군.”
유변이 제조한 실험단을 복용한 낭인들은 원래 실력들이 변변치 않았으나 보양단으로 내공 증진을 경험하면서 그걸 계기로 수년 후엔 강호에 이름을 날릴 수준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패악질을 부리다가 다른 무림인의 칼에 맞아 죽는 일이 있었다. 그가 잦은 악몽에 시달리며 인성이 변해버렸다는 후문이 다른 네 사람에게 전해졌을 무렵, 함께 몰려다니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더니 급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너무 뜻밖의 상황 속에서도 보양단을 복용했다는 공통점을 찾은 그들은 이내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로 떨어져 활동하던 낭인이 다른 두 사람을 찾아와 후유증을 호소하자 그들은 이내 유변을 찾기로 뜻을 모았다.
그렇게 세 낭인은 운양사를 찾았으나 유변은 거기에 없었다.
유변은 사실 이미 의술 연구를 빙자해 시체 해부라는 금역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운양사에서 쫓겨나 좀 떨어진 모처에서 작은 사당을 지어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낭인들의 기세가 워낙 흉흉하여 운양사 승려들은 같은 불제자인 유변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가 이내 들통나는 바람에 화풀이로 살해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 당시 유변은 자신의 실험이 성공했다고 여긴 후, 홍천환을 제조하여 스스로 한 알을 복용한 시점이었다. 그는 낭인들에게 이내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우연히 조강선을 만나 목숨을 구제받을 수 있었다.
이후 주백자까지 만나면서 셋은 항상 함께 다니다가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들어가 무공의 발전에 대해 토론하는 시기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유변도 서서히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잠을 잘 때마다 죽은 운양사 승려들이나 그 낭인들이 날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악몽을 꾸었네. 다만 그 시기엔 주백자와 조강선으로부터 축기법을 배우고 심신수양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리 오래 끌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네. 두 사람도 내 상태에 걱정들을 했었으나 끝내 극복해내자 홍천환에 대한 걱정을 접을 수 있었어. 그리고 그때쯤 바로 원건이란 아이를 제자로 거두었네.”
“킥킥킥! 이거 무슨 혈마조사(血魔祖師)의 비원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군.”
구마진의 표현이 재밌었는지 유변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피식거렸다.
“허허! ……아무튼 그 시점에서 단용후는 마경환도를 정립하고 다양한 갈래의 마공을 창안하여 세력의 뿌리를 심기 시작했네. 천마는 모든 마의 근원이라는 것이 천마신교의 모두가 공유하는 기본적인 개념이지만, 세밀하게 따지면 그렇지 않다네. 가볍게 구주마종의 예를 들어본다면 염황마종이나 환도마종, 광혈마종의 마공은 온전히 단 조사에게서 나왔다 볼 수 있네만, 일월마종, 성혈마종, 흑풍마종, 사혈마종, 적룡마종은 단지 그들이 가진 것에 마성의 씨앗을 심는, 그저 마도로의 길을 터준 것에 불과하네.”
“……이미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대마의의 그 발언은 대단히 불손하게 들리오.”
유변을 쳐다보던 구마진의 적안에 살기가 살짝 흘렀다.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불손하다라. 그렇게 느낄 수 있겠군. 자네 탐욕스러운 성정에 비해 천마신교를 향한 충성심은 꽤 깊은 편이니. 혹시 생각해본 적 있는가? 어찌 됐든 구주마종 각각의 힘은 그 속성이 대단히 선명하게 갈라져 있으나 천마의 힘은 모두를 포용할 만큼 그 무궁무진한 힘의 끝이 어딘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대체 천마의 속성은 무엇인가?”
구마진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만마본원.
누군가 그런 상징어를 붙인 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갈래의 마공을 창안하고 또 길을 터놓았던 단용후의 행보를 기려 모두가 공유하고 있던 하나의 인식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천마는 ‘모두의 하나’, ‘모든 마를 담아내는 오직 하나의 마’였다.
그 관념이 완벽하게 박혀 있었기에 보통의 마교도들은 유변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일월마종, 흑풍마종 등 각자의 무공 결 위에 마성이 더해져 마도의 길에 들어섰다 한들 어쨌든 단용후는 그들을 마도로 개도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만마의 뿌리이자 근원이라 여기는 것이다.
‘속성이라니?’
단 한 번도 그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찌 됐든 금쇄된 자신의 처지와 유변의 질문이 맞물리면서 짧게나마 고민을 하게 된다.
어느새 구마진의 얼굴에 불쾌한 기분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단 고민을 품은 미간의 주름이 좀 더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모르겠소. 대마의의 생각을 말해보시오.”
유변은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서쪽 멀리 구름을 뚫고 솟은 천산의 다른 산봉우리를 내다보면서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그로 인한 침묵을 아주 잠깐 갖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찍이 주백자로부터 심법에 대한 강론을 듣고 정파의 수양을 시도하면서 실체적인 경험을 맛본 적이 있었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정토광명(淨土光明)’으로 설명할 수 있었네. 올바른 가치와 태도, 수양은 정토를 이루고 그것이 쌓여 자라난 성취는 마치 광명처럼 세상에 드리운 암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그런 길을 보여주는 것 같았지.”
“정파의 속성이라는 건가?”
“반대로 단용후에게서 엿본 것은 무저갱과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그러나 단지 칠흑의 일색(一色)이 아닌 수많은 번뇌와 사념이 얽히고설킨 혼돈 그 자체. 모두를 아우를 수 있으면서도 태생적인 원천을 품을 수 있는 것, ……혼돈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있겠나?”
“……그게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고.”
그것은 교주나 태상교주를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들의 힘을 직접 목도한 자라면 대다수 느끼는 일반적인 감상과 다르지 않았다.
유변이 뭔가 남모르는 비밀이라도 얘기할 줄 알았던 구마진으로서는 김이 팍 새버리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유변의 얘기도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하면서 마도의 갈래에 대해 구주마종을 예로 들었으나 단 하나는 거론하지 않았네. 그것이 어디인지 아는가?”
“얘기하지 않은 단 하나? ……혈마종?”
“그래.”
“……무슨 의미오?”
“혈마종은 유일하게 단용후의 손을 타지 않은 마도. 비록 천혼제정대진의 모태가 되는 술진이 그에게서 나왔으나 그것은 단지 천지간의 사념과 기운을 포집하는 방법에 불과하네.”
구마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구마진이 작은 징조를 느끼는 가운데 유변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낭인들이 광증으로 발작하거나 악몽을 꾸었던 것, 그리고 나도 같은 증상을 겪었던 것은 홍천환 자체가 자연의 기운뿐만 아니라 사념들까지 걸러내지 않고 응집해낸 혼돈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네. 이 혼돈의 크기가 작다 해도 수준 낮은 낭인들은 발작이나 급사를 경험할 정도며, 노부 정도 수준에서는 기연을 얻어 억누를 수 있었지. 주백자와 조강선의 무공을 이은 원건은 무림 최고가 될 수 있는 수준을 갖추었음에도 그가 복용했던 홍천환은 더 큰 혼돈으로 증식된 상태였기에 주화입마를 피하지 못했네. 참 흥미롭지 않은가? 천마의 그것에 비교하면 아직 미약하다 할 수 있겠으나 자네가 탐을 낼 정도로 강력한 또 하나의 혼돈을 혈마라는 정체성으로 품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떤 말과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냔 말일세.”
“……제길. 이제 보니 날 답답함으로 고문할 작정으로 오셨군.”
구마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 수증기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며 얼어붙은 물기가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똑, 똑, 똑…….
그렇게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앞에 쌓인 눈바닥 위로 떨어져 파묻혀 들어갔다. 유변의 이야기에 흥미가 돌아서 그런지 착 가라앉았던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의 마기도 함께 자연적인 운기가 진행되면서 체온까지 올린 것이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절제를 하고 있어서 만년한철 금쇄를 끊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다만 유변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서 더 얘기해달라고 재촉하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노부도 물론이거니와 원건에 이어서 중원에서 새로이 탄생한 진도건 그리고 자네까지. 어쨌든 서로 비슷한 기색을 가진 이 혈마라는 혼돈의 뿌리는 어쨌든 홍천환이라는 인위적으로 인도된 명징한 과정이 있다네. 그렇다면 천마라는 혼돈의 뿌리는 대체 어디서 기인한 거라고 생각하나?”
“내가 뭘 알겠소? 대마의 생각이나 뜸 들이지 말고 말해보오.”
“나도 모르지.”
“……장난치오?”
발끈하는 구마진의 반응에 유변이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이 나도 기실 그 의문을 마저 풀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 하지만, 자네가 먼저 얘기했다시피 꽤 불손한 짓거리이기도 하고……. 이제 살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니 의욕도 떨어져서 말이야.”
“……당최 늙은이 속을 모르겠군. 그저 삶에 집착하는 한물간 노의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큰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