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 제50장. 전래동화 (2)
* * * *
천산 박격달봉 용암비동
단원진은 열 개의 마동(魔洞)으로 통하는 용암비동의 초입 동공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감각을 개화(開和)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만 주로 머물며 신선놀음하는 까닭은 천산이 거대한 사념의 응집체였기 때문이었다.
산맥 전체를 타고 흐르는 사념은 구름을 뚫고 높이 솟은 봉우리에 모이는데 특히 천산산맥 본류인 서쪽 산계보다 이곳 박격달봉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전대 천마조사 단용후가 본격적으로 용암비동을 개발한 이후로 더 분명해졌다.
무한히 채워질 것 같았던 사념은 어느샌가 서서히 그 양이나 밀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결국은 유한했던 것인가?’
단지 자원을 끌어다 썼을 뿐이었다.
당연히 근원은 여기 천산에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밀도가 낮아지는 걸 느끼고 나서부터는 천산이라는 거대한 대지가 아닌, 더 본질적인 근원이 따로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고 있었다.
단원진이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 사념의 흐름을 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감각을 최대한 개화하더라도 천산 전체를 아우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렴풋이 흐름이 잡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자욱한 안개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기에 그 흐름이 매우 난잡하게만 느껴졌다.
‘더 옅어진다면 좀 더 명확하게 잡아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줄어드는 것 자체에 아쉬움도 뒤따라 다가왔다.
“훗!”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더 강한 힘, 더 많은 권능을 얻기 위해 마치 마약(痲藥)처럼 천산의 사념에 취해있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먼저 느껴지는 기척과 뒤이어 들려오는 걸음 소리에 단원진이 몸을 돌렸다.
검마동에서 마정 구축을 마친 양자성이 천마동 통로의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자성은 계단을 내려와 단원진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데 그의 기백이 이주 전을 생각하면 반전이라 할 정도로 대단히 달라져 있었다.
“스승님.”
“성취를 축하한다.”
단원진이 미소를 지으면서 납작 엎드려 절하는 양자성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양자성이 보지 못하는 미소 위 눈빛엔 뜻 모를 탐욕이 일순간 번들거리다 사라졌다.
양자성이 바로 일어서는데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귀에 들려왔다.
양자성이 이곳으로 들어왔었던 외부로 이어지는 수중동굴을 통해 누군가 들어온 것이었다.
곧 건장한 털복숭이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어 젖은 몸으로 단원진을 향해 부복했다.
“무영 사가 태상교주께 인사올립니다.”
“오랜만이구나, 사라(沙羅)야.”
양자성도 한 번 마주쳤던 바깥 호수에 세워진 오두막을 지키는 무영각 소속의 무영이었다.
단원진에게서 사라라고 불린 무영 사가 일어나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자 단원진과 양자성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 했다.
양자성이 보았을 때, 머리카락과 수염이 풍성해서 마치 나뭇잎이 풍성하게 자란 큰 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단원진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 못 본 지 꽤 됐거늘 그사이 머리털이 더 풍성해졌구나. 계속 오두막을 지키고 있었으니 거기에 뿌리내려 정말 사라나무가 된 줄 알았다. 허허허!”
단원진이 농담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무겁게 살짝 숙여 보일 뿐이었다.
‘그때도 권영서 각주에게 인사하는 모습만 봤었지.’
그 모습을 보던 양자성은 사의 성격이 원래 묵묵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네가 직접 왔다는 건 내게 전달할 소식이 있기 때문이렷다?”
사가 이곳에 오는 건 정말 드물었다.
그는 무영들 중에서 유일하게 단원진을 직접 보좌하는 사람으로 주 임무는 바깥 호수로 접근하는 자를 경계하면서 특별히 태상교주 편으로 오는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사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물에 젖지 않도록 기름을 먹인 가죽으로 만든 원통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열고 서신 한 장을 꺼내서 단원진에게 주며 입을 열었다.
“서신은 무영각에서 권 각주가 직접 보내준 것입니다.”
단원진이 서신을 펼쳐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교주가 사천을 접수하는 데 실패했군. 사혈신마는 전사(戰死)라……. 결국 이렇게 소마의 마정이 회수되는가?”
옆에서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양자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혈신마의 마성은 독마 같은 것으로 불릴 줄 알았습니다만…….”
“내가 녀석에게 마정을 주었을 때도 사실 그걸 기대했었지만, 마정이 독기를 품지 않고 오히려 독기에 버틸 수 있도록 죽어가는 몸을 소생시키는 이변이 벌어진 것이니. 천지간의 조화를 예측하는 게 내 경지에 이르러서도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네가 천마가 아닌 검마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 과연 스승님께서 모든 마의 근원이라 불리는 게 달리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양자성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단원진을 떠받들었으나 오히려 단원진이 코웃음 같은 웃음을 팍 터뜨렸다.
“푸핫! 네가 입교한 이후로 여기서 나간 적이 없는데 그런 평가를 거론하는 걸 보니 죽은 주백자가 한 말이 귀에 제대로 박힌 모양이로구나.”
단원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자성의 표정이 굳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제가 스승님께 느낀 감상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주백자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때를 기억해보시면 주백자가 나타났을 때조차 전 그의 정체도 모르고 있었지 않습니까? 부디 오해를 거두어주십시오.”
양자성의 말에 단원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마본원, 역천마제!”
아주 잠깐 주백자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귓가에 스치고 지나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문진으로 왜곡한 시공간 속에서 일월신마와 함께 그를 상대하던 중 그 말이 터져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즉, 밖에 있던 양자성이 그 목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네 말대로 내가 오해했구나. 미안하다.”
“오해를 거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제자는 오직 태상교주께 충심을 바칠 뿐입니다.”
양자성은 단원진의 의심을 줄이고 호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태도를 극히 낮추었다.
단원진은 그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는데, 양자성으로서는 이렇게 한 번씩 튀어나오는 의심 때문에 그가 정말 만족하고 있는지 내심 의문스럽기도 했다.
단원진은 다시 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마의 마정 입수는 교주도 알고 있느냐?”
“사혈신마 사망 소식을 들었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놓치고 지나갈지 모르니 교주에게 보고하도록 해라. 어차피 독혈청(毒血淸)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어떻게 다루는지 보고 난 뒤에 입수하고 싶구나.”
“조치하겠습니다.”
“‘서신은’이라고 했는데, 할 말이 남았느냐?”
“대마의께서 오셨습니다.”
단원진의 얼굴에 제법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단용후 대부터 시작된 천마신교 역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이 없는 인물이었고 단원진과도 과거엔 꽤 가까웠던 그리운 얼굴이었다.
“유변이?”
“봉우리 빙첨탑에 볼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흐음.”
단원진은 오랜만에 잠시 상념에 젖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도 스승격인 인물이기에 곧잘 따르긴 했으나 단용후 사후 마도대의를 어떻게 구체화 시킬지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아 일부러 거리를 두었었다.
유변 역시 마도가 세력화하는 데 있어, 명천단 등의 개발로 반석을 세우는 역할을 끝낸 이후로 천마신교 소속 의원들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그렇게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나며 교주 일가와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때가 맞물리는가? 후후후! ……재밌군.’
유변이 왔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주백자와의 일전이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양자성이 한 말 때문에 떠올랐던 그 존재가 이렇게 다시 연달아 떠오르게 만드는 상황이 매우 절묘하게 여겨졌다.
“빙첨탑은 기념비에 불과한데 뭐가 있어서 거길 들른다더냐?”
“얼마 전에 교주께서 구마진을 정식으로 혈마 위(位)에 봉하셨습니다. 그러나 혈마종이 머무는 청해의 대통현에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고 대마의를 다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교주께서 거기에 나타나셔서 사고를 막은 후, 구마진을 빙첨탑에 옥쇄하는 형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 ……하하하하!”
단원진이 갑자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양자성이나 사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단원진이 원래 웃음이 적진 않은 편이었으나 대부분 의미심장한 조소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웃음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기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단지운이 새로운 홍천환 제조 시도를 위한 천혼제정대진을 요구한 적이 있어서 모처(某處)에 자리를 만들어 연성진을 구축해준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유변이 제조했던 홍천환에 비해선 질적 수준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구조적 근원은 유사하기에 혈마의 재탄생에 어떻게 도달할지 궁금했는데 그게 구마진이라는 말은 충분히 흥미가 가는 일이었다.
“넌 구마진이 누군지 아느냐?”
단원진의 물음에 양자성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흡성대법을 전승한 아귀(餓鬼) 같은 녀석이지. 하긴 놈이 단전에 품은 난잡한 기운들이라면 혈마의 자양분으로 삼기에 충분할 것이야.”
혼돈에 혼돈을 더해 더 큰 혼돈을 이룬다.
단지운의 창의적인 발상에 단원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가자꾸나. 나도 오랜만에 바깥바람도 쐴 겸, 대마의를 마중 나가야겠다.”
양자성이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곤 발걸음을 옮기는 단원진과 사의 뒤를 따라갔다.
* * * *
휘이이잉-!
구름을 뚫고 높이 솟은 천산 박격달봉은 언제나 만년설에 덮여 있었다.
맑은 날이 아니라면 산 아래는 도통 내려다보기가 힘든데 모순되게도 서쪽으로 멀리 내려다보면 천산산맥 가운데 박격달봉의 높이에 필적하는 몇몇 산봉우리의 하얀 머리가 작게 보이기도 했다.
“후우……!”
유변이 짧은 호흡을 내뱉었다.
워낙 고지대이다 보니 산소도 희박한데 맞바람은 한 호흡 들이켰을 뿐인데도 폐부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냉혹함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변과 사마월은 산에 오르기 전, 짐승의 털가죽을 기워 만든 두꺼운 외투를 구해 입고 올라왔다. 그들의 내공 수준이 대단한데도 천산의 추위는 두껍게 입은 옷들을 뚫고 들어와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게 했다.
심한 경사로를 오르기 위해 걸음을 놓을 때마다 허벅지 높이까지 쌓인 만년설이 발길에 무너져 흐트러졌다. 바람이 소용돌이치듯 불면서 표면의 눈들을 흐트려 놓는 것에 더해지면서 때때로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돌탑의 뾰족한 첨단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드디어 목적지에 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다섯 척 정도의 평범한 사각뿔 형태의 돌탑.
천산의 바람을 사시사철 맞고 있는 돌탑의 표면은 맨 살갗을 대면 그대로 얼어붙어 버릴 정도로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런 첨탑의 하단에 한 사람이 사슬에 묶여있었다.
바로 구마진이었다.
성기만 가린 속옷을 제외하면 완전히 드러낸 맨몸이 차가운 바람을 맞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로로 인해 여기저기 고드름과 성에가 달라붙어 있었는데 고개를 푹 떨어뜨린 채 추위를 견디고 있는 모습이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뽀드득!
두 사람이 눈을 밟는 소리가 바람을 뚫고 선명하게 들릴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그제야 구마진이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의해 성에나 고드름들이 부서져 함께 흩날렸다. 그리고 함께 흔들리는 봉두난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구마진의 적안이 선명하게 빛나며 유변과 사마월을 똑바로 직시했다.
“클클클! ……이런 손님은 예상치 못했는데. ……어떠시오? 내 꼬락서니가 썩 마음에 드시오?”
“후후! 설마 그럴리가…….”
유변이 실소를 흘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비록 만년한철 사슬로 그를 이런 꼴로 묶어놓았다고는 하나 실상은 별 소용 없는 단지 형식적인 조치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오직 교주에 대한 두려움과 천마신교를 향한 복종하는 마음만이 이 지루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