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 제50장. 전래동화 (1)
순리(順理).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도 순리고 그것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헤엄치는 연어의 선택도 순리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은 절대 단방향으로 설명될 수 없고 일방의 가치만으로 정립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그 자체가 갖는 ‘섭리’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그 통념 아래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그 행위도 결국 다음 세대를 위한 번식에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인 것이다.
이런 순리는 때때로 하늘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상징을 빌어 천리(天理)라 설명하기도 한다.
그 자연스러운 섭리로도, 자연스러운 선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
역천(逆天) 그리고 역리(逆理) 또는 배리(背理).
남녀의 만남과 사랑, 혼인을 통해 후대를 잉태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선택이지만, 단원진이 저지른 짓은 이 모두를 거스른 만행(漫行)이며 역천의 도(道)와 다를 바 없었다.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점차 산모의 뱃속에서 팔다리와 이목구비를 갖추고 뇌가 형성되어 여러 감정이나 자극에 영향을 받는 동안에도 그녀는 천혼제정대진의 위에서의 악의의 정사를 강요받아야만 했다.
세상 만물의 사념은 혼돈 그 자체.
인위적으로 끌어모아 새 생명의 영혼에 투영시킬 때, 그 선택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분명히 악의(惡意)의 결정체로서 발전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적어도 그건 산모인 하지연이 자신의 아이에게 해주고 싶었던 모성애와는 대단히 이반되어 있으리라.
분명 이치에 반하는 일이었으며 역천 그 자체인 선택이었다.
* * * *
달 밝은 시기였음에도 층운(層雲)에 가려져 평소보다 어둠이 짙게 꼈다.
바람은 한 점 없고 추적추적 내리는 안개비가 곳곳에 스며들어 공기를 무겁게 적신다.
입구를 막고 있던 잔해가 치워지면서 이제는 그 시커먼 입구가 드러난 동굴 속 모습은 어쩐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비에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도건은 걸음을 옮겨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 쪽이 정리되지 않아 빗물이 안으로 많이 새어 들어가고 있었다.
새어 들어간 빗물들이 패인틈으로 스며들면서 술진의 형상을 절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진도건이 그 한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바닥으로 술진의 중심을 지그시 눌렀다.
차분히 피어오르는 혈마의 마기가 술식을 따라 그리며 바닥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마지막 남은 상흔을 찾아 탐색하듯 지면의 틈을 따라 내달리면서 마침내 그곳에 도달하였다.
단원진과 하지연의 마지막 목소리가 남아있는 기억의 흔적에.
“사랑해.”
그 짧은 한마디가 포함된 단편의 잔상들이 아주 짧은 순간, 수십 개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기쁨 찬 목소리로 시작했으나 이후엔 혼란에 대한 대답의 요구로, 그리고 마지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들려왔다. 두 사람의 같은 마음이 담긴 그 단어는 점차 단원진의 냉소 속에 흘러나오는 폭력적인 언어가 되어갔다.
진도건은 인상을 가득 일그러뜨린 채 일어났다.
왜 이곳에 다시 돌아와 불쾌하기만 한 타인의 기억을 읽으려 한 것인가?
그렇게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답한다.
‘이 세상에서 결단코 용납되어선 안 될 악의다.’
우우웅!
진도건은 동굴 밖으로 나오면서 한 손에 공력을 끌어모았다.
이곳에 오기 전, 하소양이 부탁한 일을 수행하기 위함으로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이 악의의 기억으로 가득 찬 동굴에 머물렀다. 그리고 동굴을 향해 손을 뻗으니 모였던 붉은 강기가 동굴로 쏘아져 나갔다.
쿠르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에 천서은과 하소양이 잠시 시선을 돌렸다.
방향으로 보아 종전에 다녀왔던 별채 쪽 위치였으니 진도건이 마침내 그 동굴을 무너뜨렸음을 알았다.
“흐음!”
하소양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한숨 속에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서 내보냈길 바라면서 천서은도 그를 따라 같은 곳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앞에는 작은 봉분과 묘비가 세워져 있었고 ‘하씨지연지묘’라는 단출한 묘비명이 다시 시선에 들어왔다.
하소양으로서는 이곳에 오면 눈물을 그렇게 쏟아서 올라올 생각 같은 건 안 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찾아온 것도 거의 10년 만이었다.
“내 딸은 임신기간 동안 무척 괴로워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태어났던 날만큼은 무척 기뻐했다네. 열 달 동안 수심 가득한 얼굴만 봤었는데, 힘들게 낳은 아이가 목청 높여 울었을 때 그 웃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천서은은 옆에서 차분하게 하소양의 넋두리를 들었다.
“그래, ……처음 3, 4년 정도는 그래도 아이 때문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으이. 그 조그마한 아이가 무슨 생각이 있고 가치관이 있어서 제 어미 속을 썩일 수 있겠나? 그저 배고프다 울면 젖 먹이고, 밥 먹이고…… 똥을 싸면 치우고 칭얼대는 거 간신히 재우고 나면 그렇게 이쁠 수가 없지. 게다가 아이가 태어난 뒤로 지수원…… 아니, 단원진 그놈은 청해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그 고문 같은 짓을 안 당해도 되니 얼마나 마음이 편했겠나?”
“계속 지수원이라고 부르시는군요. 하 장주께선 자기들은 단씨 이름으로 제대로 부를 수 없다고 하셨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4년 정도 흘렀을 때, 놈은 다시 돌아왔네. 그럴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여기에 남겨 놓은 마교도들로부터 계속해서 우리 하가장이나 아이의 성장을 감시하게 한 게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릴 감시하던 놈들이 마교도라는 걸 전혀 몰랐네. 끝까지 자신은 지수원, 아이는 지운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했었어.”
하소양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딸의 묘비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놈은 낮밤으로 아이를 반 시진 정도씩 데려갔네. 처음엔 어미 품에서 아이를 뺏는 거로 생각했으나 다행히 오래지 않아 돌려주었네. 내 딸에게 하던 몹쓸 짓도 하지 않은 데다가 서먹하긴 해도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제법 되었으니 의심스러워도 또 그러려니 하고 지켜보게 되더군. 하지만, 이상하게 내 딸은 뭔갈 느꼈는지 조금씩 불안해했네. 그 이유를 들어보니 그놈이 아이를 데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아이가 심하게 우는데 그 일이 반복될수록 어미인 자신이 달래기가 힘들다는 게야. 이미 젖을 뗀 나이인데도 젖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 내 아내에게 보여줬다더군. 가슴에 난 이빨 자국과 상처들을 말이야.”
천서은은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아직 어머니로서의 경험은 없으나 하소양이 얘기한 일들이 절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게다가 너덧 살 정도 되면 아이도 힘이 제법 세질 나이였기 때문에 그 요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마치 제 어미의 기력마저 탐하려는 그런…… 다행인지 두어 달 정도 흘렀을 때, 그런 행동은 멈추었는데 그 이후로 내 딸 아이가 시름시름 앓는 날이 많아지더구나. 먹는 것도 줄고 아픈 날도 많아지고…… 점점 야위어갔네. 그래도 그런 요구가 사라졌으니 심리적으로 조금 편해질 법도 했으나 그조차 오래가지 않았어. 지운천은 때때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가끔은 이성을 잃고 공격성을 보이다 기절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는데 그때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어. 단원진이 나서서 바로바로 막고 진정시키긴 했으나 그 빈도가 줄어들지를 않으니 하가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불안에 떨었네. 그 일로 하인들이 많이들 떠나갔지.”
그 말을 들으면서 천서은은 문득 진도건이 단지운을 맞상대하는 과정 중, 그와 무의식에 함께 섰던 경험을 들려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천마.’
하소양이 들려주는 이 끔찍한 경험담은 단지운이 어릴 때부터 천마의 마성을 품은 채로 커나갔다는 걸 설명해주는 듯했다.
아마 단원진이 천혼제정대진 위에서 하지연과 벌였던 정사나 아이를 반 시진씩 데려갔던 것도 자기 자식을 상대로 한 ‘작업’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생각의 정리가 거기에 미치자 천서은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단원진이란 자의 정체가 대단히 궁금하고 또 두려워졌다. 단지운이 보여준 절대적인 무력 그 이상으로 가늠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악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오한이 들었다.
“결국 사고는 피할 수 없었어. 지운천이 열 살이 되고부터는 잠잠하던 발작이 크게 일어났어. 단원진은 늦게 나타났고, 제 어미를 공격하던 지운천을 막으려다가 내 아내가 놈이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가 깨져 죽고 말았네. 그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엉엉 우는데, ……용서는커녕 내게 힘만 있었다면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고 싶었네. 내 아내가 죽고 나서 딸도 충격으로 큰 병을 얻었지. 용한 의원을 써도 나아지지 않았고 단원진도 이미 자기 아내에게 무관심했네. 지운천이 제 어미보고 기운 내서 일어나라는 얘기를 하는데,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네. 썩 꺼지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알았다고 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더군. 그해 결국 내 딸도 세상을 떠났네.”
하소양은 넋두리를 이어가는 동안 묘비의 먼지를 모두 닦아내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을 맞는 그의 표정은 이미 세상 근심에 초탈한 듯 보였다.
“그리고 단원진 그놈도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네. 2, 3년마다 어미의 묘에 인사드리러 오가곤 했는데 지운천의 얼굴이 제 아비보다 어미를 더 닮아서……. 난 그조차 보기 싫어 그렇게 기십 년 동안 장원 뒤쪽 숲에 오두막을 짓고 따로 떨어져 산 걸세. 가끔이라도 혹여나 마주쳤을 때, 그 얼굴을 보기 싫어서 말이야.”
“……도건에게도 이 이야기들을 모두 해주셨지요?”
하소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자세하게,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네. ……지운천의 원래 이름이 뭐라고 했지?”
“단지운이요.”
“그래, 단지운. 단원진의 이름을 안 것도 내 딸이 죽고 며칠 후에 떠나간 날에 자신의 정체를 떠벌렸기 때문이니……. 내 딸은 자식의 진짜 이름도 모르고 하늘나라로 간 셈이로구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소양의 눈빛에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다시 초연해진 표정으로 돌아와 묘비에서 몸을 돌렸다.
짧은 나날 동안 너무 많은 걸 쏟아내서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젠 미련이 없어 보이는구나. 쌓아뒀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놔서일까?’
천서은은 하소양의 뒤를 살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언덕을 내려갔다.
하가장에 도착하자 하상정과 황 부인이 맞이하러 나왔는데, 아들 내외를 본 하소양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뭔가 생각하더니 천서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천서은도 하소양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과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자 내심 움찔했다.
“이 늙은이는 그 진도건이란 청년에게 정말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어. 자네에게 한 건 넋두리에 불과했지만, 그에겐 내 한평생 쌓아온 모든 울분을 터뜨리면서 내 감정 밑바닥까지 긁어내 토로했다네. ……그땐 그렇게 쏟아내느라 미처 몰랐는데, 자네에게 넋두리하고 나니까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게야.”
하소양이 말을 멈추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게 초연했던 얼굴이었는데 표정에 미안한 감정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한 방울 고이는 것이었다.
“……아아, 내 이 한을 이 젊은이에게 덧씌워버렸구나! 무책임하게 떠넘겨버렸구나! ……하지만, 의도한 일이 아니었어. 어쩔 수 없었네. 미안허이, 흐흐흐흑!”
하소양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무너져내리듯 무릎을 꿇었다.
그가 갑자기 어깨를 떨어가며 울기 시작하자 천서은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미안하다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하소양을 살피러 그에게 다가갔던 하상정과 황 부인이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뒤쪽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자 천서은도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열려있는 하가장의 장원 정문 너머로 진도건이 서 있었다.
어딘가 침울해 보이면서도 차갑게 가라앉아 무심하게 보이는 그의 적안과 눈빛을 마주쳤을 때, 천서은은 왜 하소양이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
명확하게 떠오르는 걱정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불안의 색채는 어느새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어와 그 흔적을 선명하게 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