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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70화 (270/432)

270화 - 제49장. 하가장의 비극 아래 (5)

* * * *

원래 계획에는 없었으나 하소양의 권유로 하씨 일가와 진도건 일행은 식사 자리를 함께하기로 했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바깥에 자리를 더 만들었고 이내 준비된 국수와 찬거리들이 옮겨졌다. 조촐한 듯하지만, 구성을 다양하게 하여 손님을 배려한 눈치가 보였다.

하상정의 자식들은 식사하면서도 진도건 일행에게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멀리 여행을 떠나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전에 잠깐 왔다 갔던 삼촌부터 오늘의 손님까지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한창 이성에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들이었기에 하도훈은 아름다운 천서은의 용모를 훔쳐보기 바빴고 하선지는 진도건의 붉은 머리를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황 부인이 지운천을 무서워하던 기억과 감정의 전이가 낯선 손님들에 의해 해소되는 듯했다.

아직 어린 하선유는 안효철을 자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이런 자리에도 검은색 철갑을 거추장스럽게 입고 있는 모습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눈길을 눈치챈 황 부인이 버릇없이 쳐다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 나서야 젓가락질을 비로소 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분위기 가운데 식사가 끝나자 집사들이 황 부인과 자식들을 데리고 빠져나갔다.

하소양과 하상정만이 남게 되자 하소양은 물로 목을 축이며 잠시 숨을 고르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결국, 내 딸은 지수원의 아이를 가졌네…….”

그 말을 시작으로 하소양이 들려주기 시작한 이야기는 역시나 전날 예상했던 대로 무척이나 끔찍했다.

“저주받은 생명을 잉태하였으니 내 딸아이의 인생이 몹시 기구하구나……!”

하지연이 지수원과 함께 와서 드디어 회임했다는 말을 했을 때, 하소양은 겉으로만 기뻐했을 뿐 속마음은 심장이 터질 듯 걱정과 불안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딸은 웃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딸을 아끼고 지켜왔던 아비의 눈에 그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그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축하와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하소양은 지수원이 그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파헤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수원의 수하들이 산을 떠나는 걸 봤다는 전양의 보고로 인해 즉시 꾀를 내었다.

하소양은 아직 한낮인 시간에 전양을 시켜서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자는 말을 지수원에게 전달했다.

전양이 승낙을 받아오자 하소양은 하인들을 시켜 저녁 찬을 넉넉하게 준비하도록 하면서 실제 식사 자리는 지수원에게 알려준 것보다 반 시진 뒤에 하자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혹시 지수원이 자신을 찾으려 한다면 기다릴 수 있도록 미리 입을 맞추었다.

하소양은 하가장과 하지연의 집 중간쯤에 미리 숨어있었고 예상한 시간쯤에 멀리서 지수원과 하지연이 떠나는 걸 보고 나서 은밀히 움직였다.

그는 부부가 정사를 나눈 수련동에 무슨 비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련동에 진입하여 내부를 확인한 순간, 그는 쉬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길 다시 오다니…….’

집을 박살 내서 나온 잔해들과 돌무더기, 나무 넝쿨 등에 가려진 수련동 입구의 풍경이 눈앞에 보이니 하소양 부자의 심경이 몹시 착잡해졌다.

“이것들을 치워주겠나?”

하소양의 말에 안효철이 나섰다.

철갑에 둘러싸인 주먹을 만지작거리는데 천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대협, 요란한 건 피하는 게 좋겠어요.”

안효철이 멈칫하면서 그녀를 돌아보는데 진도건이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잔해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르르……!

‘허공섭물이 아닌 염력이라, 이 경지만큼은 당가주도 한 수 접어주겠구나.’

안효철은 진도건이 손도 대지 않고 잔해를 통째로 들어 올리더니 조금 옆에다 떨어뜨려 놓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혀를 내둘렀다.

진도건의 염력에 의해 입구를 막았던 잔해들이 깨끗하게 치워지면서 바깥의 햇살이 동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굴 자체가 그렇게 깊지 않아서 내부 전경이 그늘 속에 서서히 드러나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

수련동이라고는 했으나 부부의 정사가 벌어졌다고 했으니 고작 해봐야 안에 침상 정도 들여놨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특이한 물건들은 거의 없고 먼지 쌓인 모포나 부러진 촛대들, 횃대만이 시야에 들어오는 정도였다. 어찌 보면 이상하다고 할 만한 지점이 없다고 여길 뻔했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의 시각에서 느낄만한 감상일 뿐.

‘큭……!’

마기에 대한 기감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진도건조차 가려진 잔해로 밖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느낌들이 동굴 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주춤거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진도건의 걸음이 어느새 동굴 안으로 나아갔다.

“왜 그래요?”

진도건은 천서은의 물음도 듣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무심히 나가다 보니 어느새 동굴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하소양은 얼굴을 가린 손가락 틈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순간 현기증 때문에 휘청거렸다. 하상정이 급히 부축해주어 쓰러지지 않았지만, 점점 호흡이 가빠지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으으……, 안돼! 그럴 수 없어……!”

하소양의 갑작스러운 발작에 하상정이 그를 안아 동굴 밖으로 나갔다. 영은성이 쫓아가 진기를 순환시켜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왔고 다른 이들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연스럽게 동굴과 몇 걸음이라도 더 떨어지게 되었다.

오직 천서은만이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를 치켜들어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진도건에게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도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이었다.

후우우웅-!

진도건의 중심으로 바람이 휘돌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동굴 안이 희뿌옇게 되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느닷없이 바깥으로 불어나오는 먼지 바람 때문에 천서은도 절로 눈살을 찌푸리며 몸에 먼지가 닿게 하지 않기 위해 장풍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금방 멈추었고 먼지들도 대부분 밀려 나가면서 시야도 같이 트였다.

진도건은 동굴 중앙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천서은의 시야엔 전에 없던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 그림…… 문자…….’

그녀가 눈으로 보고 떠오른 것들 그대로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깊이로 하여 동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동굴 중심을 향한 방향성도 갖고 있었으니 그 중심의 위치에 하필 진도건이 서 있었다.

‘술진. ……무엇을 위한 술진인가?’

하필 그런 생각이 뇌리에 스쳤을 때.

스릉!

진도건이 허리춤에 걸려있던 군자검을 뽑았다. 그리고 왼팔을 번쩍 들어 소매를 내리더니 검날을 팔에 가져다 댔다.

천서은이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진도건이 자신의 팔을 검으로 그어버리자 피가 후두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도 이내 진도건이 무슨 이유에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핏물은 잠시 고이는가 싶더니 지면에 문양을 새기면서 형성된 틈의 길을 따라 빨려 들어갔다. 마치 피가 살아있는 듯이 꾸물거리면서 빠르게 틈을 따라 퍼져나가더니 이내 술진의 형상 자체를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적색과 자색이 혼재된 광휘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 뭐야?”

뒤늦게 알아챈 최현걸이 반응하여 소리치자 다른 이들도 이내 그 광경을 목격했다.

환도마종 술진의 흔적.

불쾌한 기억이 모두의 뇌리를 스칠 때.

진도건은 광휘의 중심에 선 채 혈마의 기운을 빌어 술진에 남아있는 환도종의 흔적을 샅샅이 훑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아주 짤막하지만,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커헉!”

안개처럼 일렁였던 광휘가 다시 사라지자 진도건이 비틀거리면서 신음을 토해냈다.

천서은이 급히 달려가려 했으나 오히려 진도건이 먼저 동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던 연못으로 달려가더니 그대로 몸을 던졌다.

첨벙!

차가운 물이 삽시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갑작스레 밀려든 대혼란에 뜨거운 두통을 느낄 정도로 눈앞이 깜깜했는데 연못의 차가운 수기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물속에서 눈을 뜬 진도건의 표정은 아직도 고통을 작게 품고 있었다.

‘환진에 흉터처럼 새겨진 현장의 기억들이 고작 파편에 불과한 데도…… 내 정신이 오염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자신의 기억처럼 연속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순간의 장면들이 뇌리에 박히면서 시각적으로 새겨지는 행위들과 그 속에 담긴 복합적인 감정적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엇보다 그 속에서 잉태되고 성장하는 혼돈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끔찍했다.

파편의 끊어진 조합임에도 한꺼번에 밀려왔기에 충격이 크다.

반대로 이런 환경 속에서 이뤄진 수많은 정사와 끝내 뱃속에 잉태된 생명, 거기에 가해지는 혼돈의 기운을 10개월이나 버티며 출산해야만 했던 하지연이란 여인의 고통은 대체 얼마나 컸을까?

어느새 수면 위로 머리가 올라오고 지면에까지 걸어 나오는 진도건은 꼭 물에 빠진 생쥐 같았으나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힘이 들어간 눈빛의 그 표정만큼은 매우 진중하게 보였다.

걸어 나오면서 내공으로 젖은 몸을 한 번에 말려버린 진도건은 그대로 아지랑이를 뚫고 나와 하소양 앞에 섰다.

늙은 아비의 떨리는 눈을 마주 보며 진도건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무엇을?

“……저기서 일어난 짓을 보고 말았습니다.”

하소양의 꽉 움켜쥔 주먹이 눈빛처럼 바들바들 떨린다. 그를 부축하는 하상정의 몸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런 부자를 바라보며 진도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원통함을, 이 저주의 고리를 제가 반드시 끊어내겠습니다.”

격정을 담아 토로하듯 힘주어 말하는 진도건의 모습을 천서은이나 안효철, 영은성, 최현걸 모두 놀라움과 침묵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본 것에 대하여 감정이 강하게 이입됐는지 그의 붉은 눈빛이 태양처럼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도건은 일행들을 하가장에서 마련해준 숙실로 모두 보내고 하소양의 오두막에서 단둘이 남아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자리에는 천서은도, 하상정도 끼지 못했다.

진도건은 그 동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파악했었고 그 끔찍한 이야기를 차마 사랑하는 연인에게까지 들려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뇌리에 각인된 끔찍한 장면에 혹여나 자신을 대입하여 천서은을 그렇게 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있었다.

진도건은 그래서 하소양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낱낱이 정리함으로써 당사자성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의 자신을 제삼자의 위치로 꺼내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하소양도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이야기를 진도건에게 털어놓았다.

진도건의 머릿속에서 불확실한 가정으로 남았던 조각들이 그렇게 차츰 조립되고 있었다.

‘하가장에 오길 잘했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부정확한 정보들이 점점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기분이야.’

고개를 끄덕이던 진도건을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소양은 계속해서 궁금증으로 남았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대체 그 동굴 바닥에 그려진 그림들은 무엇인가? 뭔가 이상한 주술적인 느낌이 들었었는데……. 내 짐작이 맞나?”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도마종의 흔적이 남아있긴 했으나 그건…… 틀림없는 천혼제정대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세상에 누적되어온 사념을 끌어모으는……. 100년도 더 전의 과거에 악의사 유변은 그 술진으로 홍천환이라는 영약을 만들어 혈마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지수원…… 아니, 마교의 태상교주 단원진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의 사념들을 자신의 자식에게 심은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영혼과 함께.”

이야기를 듣는 하소양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어려운 내용이긴 했으나 과거의 기억과 내용의 맥락을 조립하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설명하는 진도건의 표정도 무겁다.

비록 절반의 확신이었어도 새겨진 감각은 너무도 또렷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안에 공존하고 있는 혈마의 존재란, 천혼제정대진을 통해 연단된 홍천환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그 혼돈의 냄새를 모를 수가 없었다.

설명하면서 동시에 머릿속의 정보들이 다시 재조합하기 시작한다.

이 혼란의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리고 무엇을 마주 보게 될지 두려움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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