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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69화 (269/432)

269화 - 제49장. 하가장의 비극 아래 (4)

* * * *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그들의 사랑이란 남자의 연기로 조작된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언제부턴가 하지연이 외출하는 일이 잦다고 생각했다.

물론 스물셋이라는 나이는 무얼 보아도 즐겁고, 무얼 들어도 신나는 그런 나이이니 바람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인지 한 달 정도 지났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하지연이 훤칠한 키에 젊은 남자를 데려와 혼인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였을 때,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은 지수원이라고 했다.

원래 부친이 하남 출신인데 지금은 청해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따지고 보면 타지인인 셈인데 기품있는 태도와 수려한 외모 그리고 뛰어난 무공까지 갖추고 있는 듯 호기로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딸의 나이를 어리게만 보아왔으나 스물셋이면 좋은 가문에 시집을 보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물론 이때의 하가장이 어떤 물욕이나 명예욕이 없는 가문이라곤 하나 딸아이가 직접 데려온 사내의 면면이 볼썽사나운 수준이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터였다. 그런데 지수원이란 남자는 나름 진심이었는지 허락만 해주신다면 처가살이를 해도 좋다면서 큰절까지 올리고 있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으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은 정말 행복했다.

잘생기고 어여쁜 남녀의 애정 넘치는 대화와 행동들이 정말 보기 좋았다.

결국엔 기쁜 마음으로 혼인을 허락하였을 때, 지수원은 부친을 모셔오겠다고 하면서 잠시 본가에 다녀올 것을 청했다. 그리고 그가 한 달 내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길을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의심이란 단어는 단 한 획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모든 걸 돌이킬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설령 그 끝이 일가의 몰살이라 할지라도.”

하소양은 딸 하지연과 정말 기쁜 마음으로 지수원의 귀환을 기다렸다.

옆 산 중턱의 목 좋은 곳이 있었다.

개울이 지나는 연못을 옆에 끼고 작은 동굴도 있어서 정비만 하면 창고로 쓸 수 있는 위치라 일찍이 좋은 집을 지어놓았었다. 하지연과 하상정이 더 어릴 때, 하소양은 그곳에 아이들을 데려가 놀고 오기도 했다. 이제는 다들 나이가 차면서 개인적인 휴양처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거길 신혼집 삼아 쓰라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내부 정리를 하게끔 했다.

그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한 달이라는 시간을 기다렸으나 믿음과 달리 지수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주가 보름이 되고 석 달째 기다림이 이어지는 동안에 하소양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커졌으나 망부석처럼 지수원을 기다리고 있는 딸의 모습 때문이라도 꾹 참고 기다렸다.

넉 달째가 되어 하소양의 인내심과 하지연의 좌절감이 극도로 치솟았을 때, 마침내 지수원이 돌아왔다.

하씨 부녀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지수원이 상복(喪服)을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100일간 부친의 묘소를 지키다가 하지연이 너무 보고 싶어 달려왔다는 그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단숨에 하지연의 마음을 녹이고 하소양의 불신을 설득해냈다.

어딘가 분위기나 눈빛 같은 데서 조금 달라진 느낌을 받긴 했지만, 딸을 대하는 모습 자체는 변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불운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치부했다.

혼인은 결국 치러졌고, 지난날 준비해두었던 집으로 신혼살림이 차려졌다.

하지연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수심이 사라지면서 하소양의 주름도 다시 펴졌다.

“의심의 싹은 그때를 시작으로 트였을 것이다. 단지 그 싹이 의심이었음을 제대로 의심하지 못했을 뿐…….”

간소했던 예식이 끝나고 사흘 뒤, 딸 부부가 잘사는 모습이 보고 싶어 방문했는데 이상한 손님들이 와있었다.

자줏빛 복색을 공통으로 갖춘 자들이 여섯 명이나 있었는데, 모두가 밖으로 드러난 손등이나 얼굴에도 문신이 있어서 몹시 괴이하고 의심스러웠다.

누구냐고 묻자 지수원은 청해에서 돌아가신 부친을 모시던 부하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근처 창고용으로 개조했던 동굴을 들락날락하면서 안에 있던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 많지 않았던 짐은 어느새 연못 옆으로 들어선 자그마한 목조 구조물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행색이 괴이하니 자연스럽게 미심쩍은 눈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식사를 차려주는 딸의 모습을 보니 섣불리 의심하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유는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사위에게 가서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장인어른, 저들은 제가 창고를 수련동으로 쓸 수 있도록 개조하기 위해 일을 해주고 있습니다. 일을 마치면 청해로 돌아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위의 변(辯)은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고 하지연도 지아비를 잘 따르고 있으니 장인이 끼어들 구석은 없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여서 다음날에도 방문했는데 때마침 부하들도 일이 끝났다며 작별 인사들을 나누고 있었다.

사위의 부하라고 하니까 무작정 의심할 수는 없었지만, 그 괴이한 행색들은 불안을 자꾸 자극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떠난다고 하니까 괜히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하소양도 하가장으로 돌아가는데 정문에 이르렀을 때쯤 한가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바로 나타나 일을 도울 정도면 같이 넘어왔다는 소리인데 예식 때까지도 저들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청해의 어디서 살았든 간에 사천 하가장까지 오려면 적어도 열흘에서 보름 전후의 시일이 걸릴 것이다.

부친의 무공을 일인전승하여 문파가 없다고 하였는데 부하가 있었다는 얘기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장인이 걱정할 만한 상황을 만들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행동.

넉 달 만에 보았던 그날도, 그리고 지금도 예전과는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다시금 온몸의 감각을 휘감는 듯한 착각이 들 때, 하소양은 머릿속엔 의심의 싹이 고개를 서서히 들고 있었다.

그렇게 의심스럽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나니 부친의 죽음이나 백일상(百日喪)도 의심스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가 지수원에 대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그의 겉모습 외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음이 틀림없음에도 막을 수가 없다. ……내가 지옥문을 연 것인가, 지옥이 여기로 온 것인가?”

한동안은 근처 마을의 일을 봐주느라고 딸 부부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본가로 찾아온 하지연의 모습을 본 하소양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딸의 얼굴에 수심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물었지만, 괜찮다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딸의 그런 대답을 듣고 나니 그저 일상의 사소한 고민이 있거니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바쁜 공무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렇게 보인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다시 공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늦은 오후.

하소양은 능운산을 오르던 중에 멀리 올려다보이는 옆 산의 능선 부근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는 듯 넘나드는 걸 발견했다. 꽤 먼 거리이긴 했으나 햇살이 그가 있던 자리 뒤에서 능선 머리를 워낙 밝게 비추고 있던 터라 자줏빛 옷자락 색깔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조금 전 남충부 시장에서 비슷한 복색을 한 자를 인파 속에서 스치듯 본 기억까지 떠올렸다.

워낙 잠깐 스치듯 본 경험이라 무심하게 지나갔을 터인데, 산자락 위에서 발견한 사람의 모습까지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의심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본능적으로 부하란 자들이 떠나지 않았음을 직감한 하소양이 헐레벌떡 하지연 부부의 집으로 달려갔다.

귀로 들려오는 거친 신음.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와 신혼이라는 시기였기 때문에 아직 해가 지지 않았어도 부부관계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멀쩡한 신혼집이 아니라 수련동 쪽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불안한 발걸음이 수련동 앞으로 향했으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솟아나듯 자줏빛 장포를 두른 반백 머리칼의 초로인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어르신, 부부가 손자를 안겨드리기 위해 정사를 치르고 있는데 방해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시는 길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장인으로서의 권위를 앞세울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초로인의 속을 알 수 없는 눈빛과 얼굴에 그득한 문신은 절로 그를 주눅 들게 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었다.

낯뜨거운 신음이 자꾸만 딸 아이의 고통에 찬 비명처럼 들려서 귓가에 맴돌았다.

아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쿨럭, 쿨럭!”

하소양이 이야기하던 중에 감정이 격해지면서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

거의 숨넘어갈 듯 콜록거리면서 휘청거리자 하상정이 옆에서 황급히 부딪쳤다.

“오늘은 이만하고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상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친의 안색을 살폈다.

꽤 창백해져서 더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게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하소양 본인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거움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진도건 일행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비록 이야기가 모두 끝난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대목만으로도 다들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그들이 저지른 짓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이만하고 우리 갈 길 가는 게 어떤가?”

안효철이 진도건을 보며 물었다. 그의 관점에선 하소양, 하상정 부자가 이야기하면서 상당한 부담을 안고 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에 오두막으로 돌아가던 하소양이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진도건에게 닿았을 때, 진도건과 정면으로 눈빛을 마주했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감정이 오고 갔던 것일까?

“내일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모두 안효철의 말 속에 담긴 배려에 공감했기 때문에 진도건이 한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하상정은 입술을 꾹 다물었고, 오히려 하소양이 진도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계속 이어가세. 나도 오랜만에 아침 식사는 가족과 함께해야겠구먼.”

“……알겠습니다, 아버님.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하소양과 하상정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도건 일행은 전양의 뒤를 따라서 측백나무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더 들을 필요가 있어요? 듣기에 우리도, 저분들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안 대협의 말씀처럼 이만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마교 놈들이 악당이라는 건 확실한데요.”

천서은과 영은성이 차례로 진도건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전양의 눈치도 보았는데, 그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조금 처진 어깨로 계속 앞서 걷고 있었다.

진도건도 전양을 잠깐 힐끗 보고서 입을 열었다.

“나도 듣기에 무척 고통스러워. 하지만,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의 마지막은 개인적인 감정이 덧칠된 채 아무것도 드러난 게 없는 내용에 불과해. 그 내용의 뒤에 아직 밝히지 않은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생각이 분명한 듯한 진도건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여기까지 온 건 순전히 진도건의 개인 의견이었기 때문에 그가 아직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막아 세울 명분이 없었다.

일행 사이로 복잡한 심경이 얽히면서 무거운 침묵이 이어질 때였다.

그들은 어느새 후문에 도착했다.

전양은 문고리에 손을 얹고 밀어서 열려던 찰나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도건과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내일 들으실 이야기로…… 하씨 일족에게 채워진 족쇄가 풀리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전양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갔다.

같은 집사인 공승지가 본래 바깥 출신이었다면 전양은 오랫동안 하가장에서 일해 온 사람으로서 하가장의 내밀한 이야기를 상당 부분 알고 있었다.

진도건 등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고 다시 전양의 뒤를 따라갔다.

발걸음 소리가 어느 때보다 무겁도록 질질 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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