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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68화 (268/432)

268화 - 제49장. 하가장의 비극 아래 (3)

“그놈 관련된 일이라면 들을 가치가 없으니 그냥 돌아가거라.”

하소양의 반응은 짐작대로였지만, 하상정은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지운천이 청성파에 나타나 도사들을 학살하면서 거의 멸문 수준에 이르는 피해를 줬다고 합니다. 천마신교의 전력을 대거 동원해 사천 무림을 정벌하려 했던 것인데…….”

끔찍한 소식에 하소양이 인상을 찌푸리며 덜컥 화를 냈다.

“듣기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

“……천마신교와 조카가 끝내 패퇴하여 사천 정벌은 무위로 돌아간 모양입니다.”

하상정의 이어진 말에 하소양이 코웃음을 치는데 화가 좀 풀린 눈치였다.

“흥! 건방진 놈이 사천 무림의 저력을 무시했다가 제대로 혼쭐이 난 모양이구나. 그래도 청성파에서 학살이라니…… 끔찍한지고!”

통쾌함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토로를 들으며 하상정도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하가장이 이제 무림에 연을 두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청성파라는 사천에서도 상징성을 가진 도가의 성지가 그런 참상의 무대가 되었다는 지점은 사람이라면 안타까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또 그간의 정보들을 종합해봤을 때, 단지운은 당문의 가주, 천하오절 안효철, 그 외에 신진고수들에게 협공을 받아 패퇴한 것으로 파악됐는데 그런데도 살아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로 소름이 끼칠 만했다.

그래도 단지운이 패퇴했다는 소리에 하소양도 오랜만에 흥이 올랐는지 아들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대화가 제법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가장이 세워진 능운산의 산림은 측백나무들이 즐비했다.

녹음이 짙어 눈이 편안하고 초록의 향취가 신선하여 장원을 세우고 안위를 누리기에 정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산을 오르면서 내내 들었으나 하가장의 허름한 대문과 삐딱하게 기울어져 먼지 쌓인 현판의 모습을 보니 앞선 생각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째 조가장에 갔던 때가 떠오르네요.”

장원 정문의 모습을 훑어보던 최현걸이 짧은 감상을 내놓았다.

하가장에 도착한 일행 속엔 진도건의 모습이 없었다. 그는 능운산을 오르던 중에 이곳에 환도종의 기척이 군데군데 잔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미 성도 일대를 수색할 때도 마교도들이 직접 남아있던 경우는 별로 없었고, 수색이 이삼일 이어진 시점 후로는 소문이 돌았는지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시기상으로 이곳에도 마교도들이 있었다면 도망갔을 거라 짐작은 되지만, 그래도 이왕 환도종의 기척을 느낀 김에 직접 확인해보는 게 좋다는 생각에 진도건이 직접 움직인 것이었다.

그가 돌아오면 하가장의 문을 두드려볼 생각에 다른 네 사람은 잠시 주변 지형지물에 앉아 잠시 쉬거나 말들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하고 있을 때였다.

끼익.

기척이 느껴지더니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때마침 나온 것은 집사 전양이었는데, 문 앞에 있는 네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누, 누구시오?”

천서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당황해서 잠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래 예상했던 순서의 상황이 아닌 데다가 여기까지 온 건 전적으로 진도건의 의사 때문이어서 무슨 말로 인사를 하고 무엇을 알아볼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누군데?”

그때 전양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양을 살짝 밀어내며 한 중년인이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얼굴을 천서은이 먼저 알아보고 반응했다.

“어? 당신은?”

천서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중년인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엇!”

중년인이 깜짝 놀라 입을 떠듬거릴 때, 갑자기 바람이 한차례 크게 불었다. 그리고 숲에서부터 진도건이 날아 나와서 그들 사이에 뚝 떨어졌다.

“공승지.”

중년인이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공승지도 그렇지만, 처음엔 낯선 방문 때문에 당황하기만 했던 전양이 진도건의 모습을 보고 가득 경계하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 머리는 대낮에 절로 눈길이 갈 만한 인상이었지만, 그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건 섬뜩한 붉은 눈동자였다. 일찍이 공승지에게 심부름하러 다녀온 경위를 캐물어서 설명을 들었던바, 전양도 지금 온 일행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진도건이 전양을 흘끔거리곤 다시 공승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승지, 장주에게 내가 올 거라는 이야기는 전달했소?”

“저,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왜지?”

“다, 당신들이 지운…….”

공승지가 갑자기 대답하다 말고 부르르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숨어있는 누군가의 눈치라도 살피는 듯한 몸짓이었는데 전양도 비슷한 행동거지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변 기척이 있는지 살폈으나 진도건만큼은 침착하게 공승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미 일대를 한 바퀴 돌고 오면서 마교도가 한 명도 남지 않음을 확인했다. 설치된 도등들도 모두 파괴했고. 눈치 볼 필요도, 누군가 엿들을 걸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하려던 대답부터 해라. 왜 전달하지 않았지?”

그 말에 공승지와 전양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미 강호의 드러난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천 무림에서 벌어진 천마신교 대 창천맹과 사천 정파들의 전쟁.

청성파의 참극과 단지운의 패퇴까지.

거기에 진도건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사실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 과장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진도건의 태도에서 그런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그의 말속에서 하가장이 마교 환도마종의 감시 아래에 있었다는 것까지 간파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자는 대체 뭐지?’

죽찰을 전달할 때만 해도 그가 경고한 대로 정말로 하가장에 나타날 줄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다, 당신이 지운천에게 죽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오. 이렇게 찾아올 줄은 정말로…… 정말 지운천 그와 싸워 살아남았을 줄이야.”

공승지는 아직도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지 마지막 말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직접 싸운 당사자들 가운데 세 사람이 여기 모두 있으니 더 의심하지 않아도 되겠지.”

소문대로라면 천서은도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가?

“난 안효철이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안에서 장주를 뵈었으면 좋겠네만.”

공승지와 전양이 깜짝 놀라 안효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안의 철갑이 엿보여지니 과연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공승지가 더는 고민할 선택지가 없음을 깨닫고 진도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그럼 왜 장주를 만나려 하시는지 이유부터 여쭤도 되겠습니까? 강제로 들어가신다면 저희 같은 실력으론 막아설 수 없으나 그래도…… 하가장을 존중해주신다면 저희가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단지운의 외척인 하씨 일족에게서 그에 대해 참고할 만한 정보가 있는지 묻고 싶어서 그렇다.”

안효철과 달리 진도건은 여전히 공승지에게 싸늘한 말투로 대했는데 지난날 죽찰을 받을 때의 기억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운이라니……, 정체를 알아챘나보구나.’

공승지는 진도건의 말에 내심 놀랐다. 또 그의 말투는 듣기에 불편했으나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지운천은…… 이곳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에 얘기했듯이 우리도 천마신교를 돕지 않기 때문에 딱히 알려드릴 건 없…….”

“……알려줄 게 없다는 판단을 당신이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크흠,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의 이름을 계속 지운천이라고 부르는군. 나는 계속 단지운이라고 얘기하는데 말이야.”

진도건의 지적은 날카로워 두 집사 모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여전히 표정에 두려움을 담은 채 옆에 있던 전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련님의 본명을……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복잡한 사연이 엿보였다.

공승지가 무거운 표정으로 있다가 진도건과 그 일행을 돌아보았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별수 없다는 듯 답하면서 전양과 함께 다시 하가장 안으로 들어섰다.

진도건 일행도 곧장 두 집사의 뒤를 따라 하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전양이 앞서 나가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았다.

“장주님은 안에 계신가?”

“어르신께 인사드린다고 가셨습니다.”

정말 오랜만의 손님들을 의아하게 바라봤던 하인이 전양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때 한쪽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황 부인과 슬하의 삼남매들이었다.

“공 집사, 그분들은 누구세요?”

“아, 마님. 장주의 손님들이십니다. 저분은 장주의 부인되시는 이곳 하가장의 안주인이십니다.”

공승지가 소개하자 양측이 조용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사이 공승지는 전양에게 다가가서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장주님뿐만 아니라 어르신도 뵈어야 할 것 같으니 아예 별채로 가는 게 어떤가?”

“무슨 해코지를 할 줄 알고?”

“……안효철은 천하오절로서 대협으로 칭송받는 분이니 그리하진 않을 걸세. 그리고 어차피 도련님과 관련해선 어르신이 더 잘 아시니까 직접 얘기를 듣게 하고 오늘을 분명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게다가 저들은 도련님과 적대관계에 있으니 어르신은 우호적으로 대하실 게 아닌가?”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 거 같군. 어르신이라면 도련님을 어쩌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으로 여기시니까…….”

공승지의 입에서 하소양이 거론되자 전양도 그의 의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야 종속된 신분으로서 두려움을 느끼는 처지인 것이지만, 하소양은 장주인 하상정보다도 더 단지운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승지가 황 부인에게 다가가는 사이 전양이 진도건에게 다가왔다.

“가시지요.”

진도건 일행은 전양의 뒤를 따라 하소양이 있는 별채 쪽으로 향했다.

그 사이 공승지는 황 부인과 그 남매들을 챙겨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젊고 어린 삼남매는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진도건의 모습이나 천서은의 미모 때문에 담장을 돌아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뒤를 힐끔거렸다.

전양을 계속해서 쫓아가 마침내 후문의 숲길로 접어드니 하가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측백나무 숲 너머에서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 기척이 느껴지던 곳에 다다르자 하상정이 그들을 돌아보며 조금 놀란 눈치로 입을 열었다.

“전 집사, 뒤에 사람들이 대체 누구기에 어쩌자고 여기까지 들어오게 하는가?”

“죄송합니다, 장주.”

하상정이 질책하는 소리에 전양이 고개 숙여 사과부터 했다. 그리고 진도건 등을 잠시 기다리게 한 후에 장주 부자에게 다가가 손을 모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들은 이번 천마신교를 상대한 무림 측 사람들로 도련님에 대한 얘기를 듣고자 왔다고 합니다.”

“뭐? 그걸 어찌 알고?”

하상정이 경계 어린 눈으로 진도건 일행을 흘깃거렸다.

“공 집사가 도련님의 심부름을 맡아 죽찰을 전달했다던 자가 저 적발의 남자입니다. 그리고 청성산에서 도련님을 패퇴했다는 자들 중 한 사람도 저자이고요.”

전양의 뒤이은 설명에 하소양의 눈빛이 아들보다 먼저 바뀌었다.

하소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부정한 허리를 조금 펴면서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와 한참 동안 눈을 마주 보고 있다가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아아, 그렇군……! 그래, 드디어 올 게 왔는가? 그 저주받을 단씨 일가를 찢어 죽일 심판자들이 말이야…….”

하소양이 진도건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감탄 섞인 중얼거림을 흘렸다.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심부에서부터 힘이 실려 흘러나와서 귀에 톡톡히 꽂혀 들렸다. 그리고 그 말에 하상정과 전양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에게 있어선 단순히 목소리에 힘이 실린 이상으로 거의 혼신을 다해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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