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67화 (267/432)

267화 - 제49장. 하가장의 비극 아래 (2)

* * * *

“같이 안 갈 거라고요?”

“응.”

천서은의 물음에 야율균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서은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이 어디였는지,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 진윤지를 만났을 때 그녀가 왜 아리송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낭군님을 찾으셨군요.”

야율균은이 대답하지 않고 픽 웃음을 흘렸다.

그걸 본 최현걸이 놀라 입을 벌렸다.

“와! 정말로? 둘 사이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이어질 줄은 몰랐네.”

“축하합니다. 원시천존께서도 두 분의 혼약에 행복을 기도해주실 것입니다.”

영은성이 웃으면서 합장을 했다.

최현걸도 옆에서 축하해주고는 있었으나 그는 쉬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인은 북방의 이민족, 사내는 무림 가문의 소가주였으나 다리가 불편한 몸이니 이 맺음이 각자에게 쉬운 선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이 웃으며 다가왔다.

“축하하오.”

“고마워. 나도 여기에 와서 이런 선택할 줄 미처 몰랐는데……. 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진도건의 말에 야율균은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지난 일이 떠올라 그녀로서도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진도건은 혈족의 원수나 다름없었지만, 그녀 스스로 원한을 씻어내고 새로운 삶과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에 그를 따라가 여기까지 쫓아왔다. 그 여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곁에 있는 게 불편했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나 이제는 정말 가까운 동료처럼 느끼고 있었다.

특히 진도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도 했으니 이젠 정말 남아있는 원한 한 조각도 없어진 기분이었다.

천서은과 야율균은이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다시 볼 수 있겠죠? 예식을 못 보고 가게 돼서 정말 아쉬워요.”

“네가 저 녀석과 혼인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때 내가 찾아갈게.”

“호호호! 그래요. 그때는 아이도 안고 와야 해요.”

두 여인의 서슴없는 대화에 진도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도건 등 네 사람은 야율균은에게 작별 인사를 한 번 더 건네고 내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혁수와 진윤지, 안효철이 나오는 그들을 맞이했다.

천서은이 당혁수와 진윤지를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였군요. 두 분께서 정말 며느리로 삼기로 하신 거로군요.”

“며늘아기가 우리 아들을 허락해 준거지.”

진윤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 일가족과 야율균은이 서로의 속내를 속 시원히 내비친 상황이었으니 심적으로는 벌써 시집왔다고 여기고 있는 셈이었다.

“자네들이 이곳 사천으로 넘어와서 정말 큰 도움이 되었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떠나야 한다니 내가 다 미안해지는군.”

“젊은 저희가 더 바쁘게 움직여야죠.”

당혁수의 말에 최현걸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그래, 자네들 발 벗고 덕분에 성도 이남 지역도 많이 안정됐어. 제갈 군사가 돌아오면 연회라도 열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는데, 이리 바로 떠난다고 하니 참.”

“그러게요. 진 대형이 저희 배려를 안 하네요.”

“하하하하!”

최현걸의 말에 당혁수가 유쾌하게 웃었다.

당혁수는 진도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면서 손에 지그시 힘을 주는 그의 손길은 다분히 깊은 신뢰가 담겨있었다.

“우리가 자네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어. 당연히 우리도 곧 자네와 창천맹을 도우러 가겠지만, 자네들과는 꼭 다시 만나서 함께 싸웠으면 좋겠군.”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하가장엔 난 안 가도 되는가? 어젯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심상치 않은 곳이라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안 대협도 저희와 함께 가시니까요.”

“뭐 그렇겠지. 나까지 끼면 좀 과하지.”

진도건의 대답에 당혁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의 수순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진도건 일행과 안효철이 말에 올랐다.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 뵐 수 있길 기다리겠습니다.”

“잘 가시게.”

일곱 사람은 서로에게 포권지례를 갖추며 작별했다. 그리고 진도건 일행은 야율균은이 빠진 자리에 안효철이 합류한 채로 당문과 성도성의 동문을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얼마간 달려서 오르막 지형 때문에 속도를 줄이게 되었을 때, 최현걸이 심심했는지 옆을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안 대협께서 저희와 같이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야율 낭자와 헤어진 저희 기분도 싱숭생숭한데, 안 대협도 그러셨습니까?”

“나라고 안 그렇겠는가? 모두 날 믿고 모여준 동지들인데 내 개인적인 이유로 따로 떨어지게 되었으니 미안함도 있지.”

제갈무문이 성도에 도착해서 진도건, 천서은과 안효철을 만난 후, 이튿날이 되자 창천맹으로 떠났다. 그때 서충도 중천과 함께 제갈무문의 뒤를 따라가서 추후 지령을 받고 움직이기로 함으로써 안효철과 작별하게 된 것이었다.

안효철도 창천맹의 요청에 따라 조직한 중천이긴 했지만, 동지들에 대한 애정이 컸다.

각자의 자유를 희생하고 대의를 위해 모여준 바탕에 안효철의 명성이 크게 작용했다면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더 강하게 조직된 데에는 안효철의 인망 때문이었다. 그만큼 상호 신뢰가 두터웠으니 이 같은 상황에 서로 아쉽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안효철이 진도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하가장에서 자네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그의 질문에 진도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봐도 명확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단지운을 마주한 경험과 혈마의 감정이 일시 요동쳤던 게 떠올라서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단 교주가 자네들을 만났을 땐 지운천이란 이름으로 정체를 숨겼다면서? 그렇다면 그가 한 말이 다 거짓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안효철의 질문에 진도건 등은 공통으로 하가장의 가신이라던 공승지가 찾아왔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대단히 불신한 채로 듣긴 했었다.

게다가 단지운이 자기 정체를 드러낸 순간, 지운천으로서 내뱉은 말들이 의심스러운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러나 공승지는 하가장이 천마신교를 돕지는 않는다고 하였고, 단지운도 굳이 거길 찾아가서 또 공승지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면 외가라는 관계를 뒷받침하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하가장이 외척이라는 사실 자체는 분명해 보입니다만, 정확히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가보면 알 수 있겠지요.”

“혹시 하가장에 단지운에 관한 비밀이나 약점 같은 게 숨겨져 있길 기대하는 겁니까?”

“확실히 그랬으면 좋긴 하겠네.”

영은성의 물음에 진도건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단지운의 무력은 공포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으나 직접 부딪쳐본 결과 혈마의 마기가 어쩐지 단지운을 상대로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요소가 있다고 느껴졌다.

만약 영은성의 질문처럼 단지운의 약점이 될만한 작은 변수 하나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은 분기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거기에 가서도 싸울 만한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천서은이 한숨을 픽 내쉬면서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청성산 전투로 기력 소진의 부작용이 상당해서 내공을 사용하는 수련만 해도 피로가 금방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얼마 쉬지도 못하고 여행을 또 떠나는 상황에서 상당한 강적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참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미 이틀 전에 똑같은 푸념을 그녀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 안효철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럴 일이 생긴다면 자네들 수고로움은 내가 덜어줄 수 있도록 하겠네.”

안효철이 나서준다는 말이 듣기에 무척 든든할 법도 하지만, 천서은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으으……. 그냥 당분간은 칼 부딪치는 소리도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지난 몇 달간 정말 징하게 싸우긴 했지요.”

그녀의 반응에 최현걸이 공감하면서 중얼거렸다.

몽골 초원에서 사천 성도까지 지난 몇 달간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면서 쉴 때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을 치른 것이다. 그 피로가 만만치 않다는 걸 영은성도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건은 쓴웃음으로 안효철을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젓고는 다시 말고삐를 쥐니 곧장 등을 살포시 밀어주는 듯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진도건이 만들어낸 바람이었다.

가을로 접어들긴 했어도 사천 분지의 고도로 인해 제법 더웠는데, 때마침 체온을 내려줄 만한 바람이 불자 사람들의 짜증 섞인 감정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안효철이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진도건과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기풍이 아닌 완전히 자연적인 바람이야.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데도 다들 모두 이걸 당연하게 느끼고들 있어. 허허! 참……, 재밌는 녀석들이야.’

안효철은 중천과 헤어짐으로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한편으론 흥미로운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도 있었다.

* * * *

하상정은 후원으로 향하는 닫힌 문을 몸소 열고 문지방을 넘어가 다시 닫았다.

귀찮으니 너무 찾아오지 말라는 부친 하소양(何蘇良)의 당부 때문에 후원 별채로 가는 길은 평소에는 식자재를 전달하기 위해 하인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울창하게 퍼져있는 측백나무들이 풍기는 숲의 향취는 매우 신선했다. 그 한 가운데에 별채로써 작게 오두막을 세워서 지내는 부친의 모습이란 제삼자의 눈엔 신선놀음처럼 보일 만했다.

하지만, 아들의 시선에선 참회를 위해서 남은 일생 쓴 고독을 삼키며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자식과 며느리, 손주들까지 있음에도 넓은 장원을 두고 홀로 지내는 걸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으랴?

“아버님, 소자 왔습니다.”

하소양은 오두막 앞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거치대에 걸어놓은 냄비 안을 국자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하상정의 목소리에 힐끔 돌아보더니 국자를 들었다.

“한 그릇 할 테냐?”

죽을 끓이고 있었는지 국자에서 찐득거리는 것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괜찮습니다. 먹고 왔습니다.”

하상정의 대답에 하소양은 다시 국자를 냄비에 넣고는 두꺼운 천을 세 번 겹쳐 접어서 뜨거운 냄비를 들었다. 그리고 옆에 탁자를 겸해서 쓰는 아름드리나무 밑동에 올려놓았다. 이어 국자로 죽을 떠서 목기에 덜고는 하인들이 가져다준 채소볶음과 두부고기조림을 반찬 삼아 식사를 시작했다.

하상정은 하소양의 맞은편에 앉아 부친이 식사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얼굴과 팔다리에 잡힌 주름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하인들을 시켜 세심하게 살핀 덕에 병치레는 없어도 해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쇠약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잘 챙겨 드십시오. 더위도 슬슬 풀릴 터이니 입맛이 도시면 오는 하인들 시켜서 고기라도 구워달라고 하시고요.”

“돈이 어디 썩어나더냐? 이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됐으니 이 정도면 신세에 맞는 진수성찬이다.”

그날 이후로 퉁명스러워지긴 했지만, 그것이 아들이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하상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살도 좀 찌고 그래야 나중에 누이 보실 때, 걱정 안 끼치지요.”

하상정의 말에 하소양이 숟가락을 들다가 멈칫하고 쳐다봤다.

“……원망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저도 꺼내기 싫은 죽은 누이를 거론하는 걸 보니 그냥 애비 안부를 살피러 온 건 아니구나.”

하지연의 죽음이 애절한 건 아비나 남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다.

하상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소양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러고 보니 열흘 전쯤 하상정이 다녀간 일이 떠올랐다. 보통 한 달에 두 번 찾아오면 많이 찾아온 셈이었으니 이렇게 한 주 만에 다시 얼굴 보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주 찾아왔을 때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불쾌한 소식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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