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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66화 (266/432)

266화 - 제49장. 하가장의 비극 아래 (1)

“사람을 보냈으니 금방 올 것이네. 마침 개방이 전해주기론 두 사람이 같이 있다고 했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네 고생깨나 한 행색일세.”

당혁수의 말에 제갈무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보다는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랬습니다. 단순한 결과는 긍정적이지만, 제 예상을 빗나간 부분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또 전혀 생각지 않던 피해가 발생했기도 했으니까요. 가주님처럼 치열한 싸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자네가 온다는 소식에 백령신검을 드디어 볼 수 있나 싶었는데, 따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다네. 그것도 예상 밖의 움직임이었나?”

“예상했으면서도 앞으로는 예측할 수 없게 될 움직임이지요.”

강정학의 검림과 함께 폐허가 된 백제성에 도착한 당시 제갈무문은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꼬박 하루 동안 백제성과 그 인근의 흔적들을 모두 추적해서 얻은 정보의 내용만으론 판단할 근거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때마침 먼 산중에서 백제성 싸움을 지켜봤던 개방도가 찾아와 전한 소식 덕분에 정보의 불확실성은 일부 해소되었으나 이후의 일을 계획하고 판단하는 게 더 어렵게 되어버렸다.

일단 충격적이었던 건 가장 우려했던 일 중 하나였던 구룡문의 대패 소식이었다. 창천단의 지원도 구룡문이 너무 빨리 전진한 탓에 기대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거기에 가장 충격적인 건 금태하의 사망 가능성이었다.

거기에 자극이 되었는지 강정학과 검림이 염황신마 추적에 결의를 더 다지고 있자 결국 제갈무문은 그와 헤어져 사천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개방이나 하오문과 같은 조직이 검림의 움직임도 어떻게든 추적하긴 할 테지만, 무림의 가장 큰 주력 중 하나가 불확실성을 갖는다는 건 계획을 짜는 사람 입장에선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구룡문의 선례도 있으니 말이다.

사천으로 넘어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준비된 계획에 추가적인 개입을 고려해볼 여유도 없이 천마신교는 속전속결로 움직여 그를 당황하게 했다.

다행히 진도건 일행의 배치나 안효철의 중천의 방향을 서둘러 돌려놓은 것이 주효하게 작용하긴 했으나 천마신교의 교주가 직접 등장했다는 건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같은 정파인으로서 청성파의 멸문이 정말 뼈아픈 결과였으나 단지운과 붙었던 진도건, 천서은, 당혁수, 안효철 넷 중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또 당문과 아미파가 입은 피해도 그가 예상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위안과 실망이 거듭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청성파는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겠군요.”

“사실상 멸문지화지만……, 기반을 다시 다질만한 인물이 있어서 다행이지.”

“떠나기 전에 방문해서 인사는 드려야겠습니다.”

“언제 떠나려고?”

“내일이나 모레쯤입니다.”

“그렇게 빨리?”

“바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일단 직접 가주님을 비롯한 주요 전력들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이곳에서 더 일어날 일은 없을 거 같지만, 어쨌든 큰 전쟁이 결말지어진 만큼 마교 측도 흐름을 반전시킬 만한 수를 준비할 겁니다. 이미 군사전쟁까지 치르는 상황 아닙니까? 서둘러 맹으로 돌아가야지요.”

“군사전쟁이라……. 황실의 지원이 따를 것 같은가?”

“황실 내에 감숙 일대를 새외 변방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어서 시큰둥한 모양입니다. 저희는 관중의 침범이 있기 전까진 소극적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안이한 생각들을 하는군. 전장을 영토 밖에 둘 생각을 해야지.”

“애초에 감숙 땅은 대부분 서하의 영토이기도 했었으니까요. 다행히 몽골족과 흑풍대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조태상 장군 형제가 그곳에 부임해서 잘 버텨주는 모양입니다.”

“난세엔 언제나 인물이 나오는 법이지. 제아무리 황실과 관리들이 부패하고 있어도 말이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당혁수와 제갈무문이 한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마침 전갈을 받은 진도건, 천서은과 안효철, 서충이 함께 당문 내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안효철은 복식을 다시 갖추고 있는 모습인데 표정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솔직히 진도건의 말을 듣고 그가 궁금했던 지점이 속 시원하게 정리되었다고 보긴 어려웠으나 한 가지 분명해진 건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서충은 조금 무거운 표정을 한 상태였다.

네 사람이 내원의 집무실에 들어서고 진도건과 천서은이 제갈무문을 반기며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입니다, 제갈 군사님.”

“후우! 두 사람 모두 걱정했던 것보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일세.”

“대체 어떤 걱정을 하셨길래 그러셔요?”

“마교주와 붙었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랐네. 어찌 보면 무림의 최종 상대나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사지 멀쩡히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오긴 했으나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싶었네.”

“팔 하나라도 잃었을 줄 알았어요?”

“솔직히 그랬다네. 하하하!”

여유 있게 농담하는 천서은의 말에 제갈무문이 껄껄 웃어넘겼다.

“화산과 개방의 두 친구도 잘 있는가?”

“저희는 내상을 치료하느라 계속 성도에만 머물렀는데 두 사람은 다른 일을 돕고 있는 거 같아요.”

“두 사람은 아미파 장문방장께 인사를 드리러 내려갔네. 정파의 어른께 인사도 드리고 또 거기 나가 있는 우리 당문과 아미파 제자들, 개방도까지 협력해서 여기 성도 이남의 마교가 남긴 잔재를 수색하여 정리하는 작업도 겸하고 있지. 며칠 뒤면 돌아올 것일세.”

당혁수의 설명에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던 진도건과 천서은도 제갈무문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제갈무문이 안효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중천의 장께서 광혈신마를 저지해주지 않으셨다면 제 부족했던 계획들로 인해 사천무림이 더 큰 피해를 감내해야 할 뻔했습니다. 서 부장께서도 그렇고 낭인 여러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물론 진 공자와 천 낭자 일행들도 마찬가지고.”

“섭섭할 뻔했어요.”

천서은이 장난스럽게 눈치를 주자 제갈무문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방향을 돌린 군사의 판단이 적절했던 것이오.”

안효철이 공을 제갈무문에게 돌렸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듣자 하니 싸움도 격렬했던 데다가 천자철갑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는데요.”

“뭐, 별로 좋진 않소. 내상이 없는 건 아닌데 회복이 더뎌서 말이오.”

다른 이들과 달리 제갈무문은 전해 들은 이야기뿐이었으니 안효철의 부족한 설명에 이해가 쉬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의 표정이나 안색이 말하는 것보다는 부정적인 상황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그래도 건재해 보여 다행이십니다.”

“그보다는 앞으로 내 행보가 여기 이들과 같이해야 할 것 같아서 그걸 군사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네.”

“진도건 일행들과 말입니까? 중천은요?”

“중천의 낭인 동지들은 여기 서충이 맡아서 이끌 걸세. 물론 자네의 계획은 되도록 따르겠으나 가능하면 진도건 이 친구의 행보를 기준으로 판단해주길 부탁하네.”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효철이 자신의 소매를 걷어 탈혼갑을 보여주었다.

제갈무문은 그의 팔을 보고 처음엔 천자철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득 느껴진 위화감에 다시 살펴보니 손등과 손가락까지 덮은 갑주가 어쩐지 더 밀착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안효철이 손바닥이 보이도록 뒤집자 제갈무문도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게 대체…….”

제갈무문과 안효철은 과거 첫만남에 악수를 하면서 천자철갑에 감싸져 있는 그의 손과 손바닥을 모두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안효철의 손바닥이란, 강사로 조직된 망사가 손가락 사이부터 손목까지 손바닥을 덮고 손가락들을 개별적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피부와 결합 되어 일그러져 있어서 보기에 끔찍했다.

“이 탈혼갑은…… 자네가 천자철갑으로 기억하는 이것은 마물이었네. 전엔 감히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지만, 이젠 확실히 길이 잡힌 느낌이야. 이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물건, 내겐 이걸 파괴해야 할 의무가 있어.”

“그 길이 진 공자의 길에 있습니까?”

“그렇다네.”

제갈무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안 대협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겠습니다.”

“고맙네.”

제갈무문이 진도건을 돌아보았다. 그는 옆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제갈무문의 얼굴엔 안쓰럽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아, 자네는 대체 어떤 길을 가는 건가?”

“그러게 말입니다.”

제갈무문의 반응 때문에 혈마와의 대화를 떠올린 진도건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오히려 무슨 이유를 묻거나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을 거로 생각했던 제갈무문은 진도건의 그런 반응이 너무 뜻밖이어서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허……!”

옆에 있던 천서은도 제갈무문과 비슷한 느낌을 받고 진도건의 표정을 살폈다.

혈마와의 대면을 끝낸 진도건이 그녀에게 공유한 내용들이 무척 뜬구름 잡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진도건이 그녀에게 뭘 숨기려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기에 옆에서 계속 지켜봐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지 멀쩡한 건 이제 확인했고, 내상은 어떠한가? 마교주와 제일 치열하게 싸운 사람이 두 사람이니 그 속이 겉처럼 멀쩡할 리는 없을 텐데.”

제갈무문이 진도건과 천서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당타 어르신이 직접 살펴주신 덕분에 내상은 이미 안정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1, 2주 내로 모두 회복하지 않을까 싶어요.”

“내상보다는 저나 서은이 모두 기력의 손실이 큽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보니 언제쯤 만전의 상태에 이를 수 있을지는 예상이 되지 않습니다. 싸움 이후로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단전이 허허롭습니다.”

제갈무문이 당혁수와 안효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화경의 고수에 당혁수는 의술까지 정통하니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어떨 것 같습니까?”

“그건 의술과는 다른 영역이니……. 게다가 나도 그렇게 한계까지 드러내며 싸워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진단하기 힘들군.”

당혁수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자 시선이 안효철에게 쏠렸다.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천 맹주와는 꽤 지칠 때까지 비무를 벌인 적이 있네. 그때 회복하는 시간만 두 달 정도 걸린 것 같군.”

“그렇습니까? 그럼 한두 달은 더 잡아야 하겠습니까?”

“그것보다는 내적 공부에 더 집중하는 게 좋겠지. 두 사람 모두 이제 남은 문턱은 한두 개밖에 없어 보이는데, 단전이 비워진 이 기회에 내면을 잘 관조해보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벽을 넘는 순간에는 회복 이상의 선물이 돌아오는 법이니까.”

“적절한 충고로군.”

당혁수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들의 조언대로 할게요. 그런데…… 어떠셨어요?”

“뭐가 말인가?”

“제 아버지와의 비무요.”

천서은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천하제일인의 딸이니 뭔가 뿌듯한 기분 같은 걸 느끼고 싶다는 욕심이 눈에 훤히 보였다.

안효철이 피식 웃는데 당혁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궁금하군. 자네도 천하오절의 한 사람이라 이런 질문이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천하제일을 논할 때면 창천맹주와 검림 총수는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들 아닌가?”

“흐음, 제가 마교주를 상대로 보여준 가주님의 무공을 보고 대단히 놀랐는데, 저 대신 천하오절에 이름을 올리셔도 불만이 없을 정도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게 가주님께 더욱 실례라는 생각도 들지만, 제가 겪어본 그는 한계를 모르는 무적자(無敵者)입니다.”

당혁수는 흥미롭다는 듯이 물어보긴 했지만, 안효철의 대답에는 표정이 살짝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천상 무인이므로 천하오절이라는 거대한 명성 앞에 호승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또 그만큼 자신감도 있었는데 안효철의 말은 마치 우열이 분명하다는 의미에 가까웠기 때문에 심기를 거스른 건 당연했다.

“마교주랑 비교하면 어떤가?”

뿌듯해하는 천서은의 표정을 뒤로 한 채, 당혁수가 조금 심통을 부려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그녀가 다시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단지운과 가장 치열하게 다툰 당사자들이었고, 당혁수와 안효철 모두 잠깐뿐이긴 했으나 범접할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었다.

단지운이 기꺼이 네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려 들겠다고 드러냈던 그 패기는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확실히 그건 어렵군요.”

안효철의 반응에 천서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녀도 단지운의 무력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반면 당혁수는 기분이 조금 풀려서 입꼬리가 싹 올라갔다. 무림공적으로 협공이라도 해서 처단해야 할 단지운과 달리 천무경은 정파와 사파라는 차이가 있긴 했어도 정당하게 겨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낮춰 보고 싶은 반발심리 같은 게 그의 심리적인 기저에 존재한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안효철의 중얼거림에 입꼬리를 다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천 맹주가 쉽게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요.”

어쩐지 어깨가 살짝 처지는 당혁수의 뒤에서 천서은이 진도건을 보며 입꼬리를 싹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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