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제48장. 마령검 탈혼갑(魔靈劍 奪魂鉀) (5)
진도건은 안효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로 천서은과 함께 관저에서 나왔다.
“어디에요?”
“저쪽.”
진도건이 가리킨 방향은 남동쪽이었다.
처음엔 길을 곧장 가로질러 갔으나 그가 감지한 위치가 성 내에 있음을 곧 알았다. 두 사람은 경공을 펼쳐 아예 성벽을 바로 넘어갔다. 그렇게 공중에 잠시 머물 때, 가까운 호수와 주변을 두른 숲 안에 그 감지된 기운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기예요?”
천서은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묻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빠르게 숲 안으로 진입했다.
그곳은 청룡호(靑龍湖)라고 하였는데 둥그런 담수호라기보단 강처럼 다소간 구불구불한 풍경 속에 중간에는 작은 섬도 떠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마간 강줄기를 따라 걷던 천서은은 위화감을 느꼈다.
“환진이네요.”
“응, 걷어낼게.”
진도건이 손바닥을 펼쳐 바닥을 가리키곤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이내 그를 중심으로 붉은 기류의 돌풍이 일어나 넓은 지역을 단숨에 휩쓸었다.
진도건은 그 실체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어서 영향이 없었지만, 천서은은 시각적인 교란이 다소간 있었는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환진이 진도건의 힘에 사라지자 그녀도 대도등의 위치를 제대로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천서은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거리가 좀 멀어진 진도건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인 거 같은데 아무것도 없어요. 또 환진에 가려진 건가요?”
“그건 아닌 거 같아.”
진도건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시선을 움직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천서은 뒤쪽에 높게 선 나무에 닿아 멈췄다.
저벅저벅…….
그의 발걸음과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천서은도 돌아서서 같이 보았다.
사람 네다섯 명 정도는 둘러서야 손을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굵은 밑동과 주변 나무들에 비해서도 꽤 높이 솟아있는 전나무였다.
“이거예요?”
“그런 것 같아.”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진도건도 확신하지 못한 대답을 한다.
잠시 지켜보던 진도건이 전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어 나무를 만지자 그 우둘투둘한 거친 껍질의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극히 평범했으나 그렇게 잠시 손을 만지고 있자 마기의 흔적이 손끝을 타고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진도건은 곧장 내공을 끌어올렸다. 혈마진기가 그의 손을 타고 나와 나무의 기둥을 따라 갈래갈래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껍질이 갈라지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괴인의 형상.
뿔과 이빨이 도드라지고 거대한 날개들을 몸에 두른 듯한 모양, 괴이한 뿔이나 이질적인 형상들이 몸통부터 다리까지 기괴하게 이어져 무슨 상상력과 의도로 이러한 조각을 하였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아…….”
천서은의 입이 반쯤 벌어져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미 부서진 도등이나 대도등을 보았을 때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형상이었는데 이렇게 나무 속에 숨겨진 기괴한 조각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생긴 건 악귀 같은 인상에 날개까지 있으니 팔부신중(八部神衆)의 야차(夜叉)와 긴나라(緊那羅)를 합쳐놓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그조차 맞는지 의심하게 됐다. 그런 인상은 진도건이 보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전에 부서진 도등을 조합해 보았던 형상과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눈앞에서 그의 키보다 조금 더 높은 크기로 조각된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를 파내어 이런 조각을 만들어놓다니. 그런데 신기하네요. 이렇게 파놓았으면 나무수액이 잔뜩 흘러나왔을 법한데…….”
“환도종의 술법이 이 나무의 생명줄을 틀어버린 것이지…….”
진도건은 대도등 목조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대기 전에 잠시 천서은을 돌아보았다.
“할게.”
“네, 지키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두 사람은 잠시 미소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진도건은 다시 대도등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두 손을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환마의 기운.
환도종의 기운은 대체 무엇일까?
대도등 안에 담겨있던 그것에 마기를 주입하여 접촉시키는 순간, 단숨에 혈마의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항상 보왔던 무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원래 서 있던 대도등 목조상이 있는 그 똑같은 자리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진도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더 놀라운 건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천서은의 모습은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진도건도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 환도라는 것인가 보군.”
들려오는 혈마의 목소리에 고개를 다시 돌렸다. 조금 전 천서은이 서 있던 자리에 그가 있었다.
“무슨 뜻이지?”
“의식과 무의식, 마와 또 다른 마, 현세(現世)와 환세(幻世)를 잇는 매개 또는 통로. 날 현세에 끄집어냈던 것처럼 같은 공간 위에 만들어진 환상의 영역 안으로 의식을 가두는 이 힘을 대체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혈마가 손을 들자 그 안에서 핏빛 기운이 자그맣게 일렁였다.
그것이 하늘로 쏘아지자 일정 위치에서 팍! 하고 터져나가더니 하늘의 청명함이 무너지면서 그 틈 뒤의 어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허허…….”
진도건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이런 환상의 영역을 대도등이 형성한 것 같은데 이것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특히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더더욱 이걸 유지하는 기운들을 갉아먹고 있으니 말이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빨리 물어봐.”
혈마의 말마따나 그의 기운으로 터져나간 하늘의 틈이 점점 더 확산하면서 그 저편의 어둠을 드러내고 있었다. 육신에 대한 진도건의 지배력이 공고한 이상, 그 경계를 허물 환도의 연결이 무너지면 혈마 자신도 계속 깨어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른 것은 탈혼갑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으나 진도건은 그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먼저 하고 싶었다.
“혈마, 네 목표는 무엇이냐?”
“갑자기 새삼스럽게 왜 물어?”
“넌 깨어날 때마다 나의 기억을 이어받고 이렇게 나와 얘기할 정도로 서슴없어지긴 했으나 어찌 됐든 너와 난 하나가 아니라 공존하는 관계잖아. 처음의 넌 살의와 광의로 가득 찬 뒤틀린 인격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뭐,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뭐? 크하하핫!”
“그래도 이젠 다른 신마들처럼 어떤 목적성만 남은 마성이 아닌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영성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야. 나는…… 그리고 너도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겠지만, 나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어. 네가 뭔갈 구상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혈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널 또 잡아먹으려 시도할까 봐 겁이 나더냐?”
“아니. 오히려 네 존재로 인해 내 영혼이 더욱 선명해지는 느낌이라 그건 걱정이 안 돼.”
“뭐?”
“다만 내가 선명해지듯, 너란 존재도 더욱 선명해지는 느낌이라 말이지. 거기에 성도성에서 치렀던 싸움들, 청성산에서 단지운을 상대한 싸움까지 넌 분명 또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어.”
“나에 관한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있을 줄이야. 나 좋아하냐?”
“헛소리. 말 돌리지 말고.”
장난스럽기 얘기하는 혈마에게 진도건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그러나 이내 혈마가 쓴웃음을 짓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이냐?”
“그거 아느냐? 넌 날 수용하기로 했지만, 그건 우리를 나누는 경계를 허무는 주인(呪印)과 같은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 힘이 온전히 갖춰질 때, 언제든 네 영혼과 몸을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영혼 간의 경계를 지워버렸다는 거야.”
“뭐?”
다른 목적으로 불러낸 자리에서 혈마의 느닷없는 말에 진도건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대꾸하긴 했으나 혈마가 한 이야기가 무얼 뜻하는지 아직도 모를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당황스러운 것은 딱히 혈마가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얘길 해주는 이유가 뭐야?”
“이젠 네게 흥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널 대체하는 인간’으로 살기 싫어졌다고 얘기하는 게 내 본심에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이유가 있을 터. 더 얘기해봐라.”
“진도건, 나는 누구냐? 아니, 그 이전에 무엇이냐? 혈마? 아니, 그건 일월신마가 네 머릿속에 덧씌우고 네가 그것으로 나를 인지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그렇게 인식하게 되어버린 이름일 뿐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은 수백, 수천만의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사념이 집약되면서 만들어진 사념체였을 뿐이다. 거기에 일월신마가 의도적으로 특정 방향으로 분출되도록 방향성을 부여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화산에서의 나였다.”
영혼.
영(靈), 성(性), 귀(鬼), 혼(魂), 백(魄).
중단전에 머무는 그것은 여러 가지 환경에서 유무형(有無形)의 다양하고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내재(內在)하고 또 외현(外現)하기도 한다.
인체의 기능은 대단히 조화로워서 영혼의 그릇으로 기능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력이 올바르게 배분되어 운신할 수 있는 근골과 신경계를 구축하고 있다. 또 상단전 혹은 뇌(腦)로 지칭되는 그것에서 지성(知性)이 구축됨으로써 현상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판단한다. 그 심도 있는 고찰의 끝엔 완전함을 향한 갈구로 신성(神性)을 구축하면서 만물의 진리에 가까이 가도록 이끌게 되기도 한다.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 대해 이런 정기신이라 구분되는 각 차원의 중요성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하지만, 존재의 근원을 따지고자 한다면 결국은 정기신의 가치보다 인체라는 그릇, 자연적인 탄생을 논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혈마는 진도건의 ‘수용’으로 인해서 영혼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과 강력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각성하는 진도건을 보면서 문득 자신의 존재의의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아주 깊은 심연의 경계를 구축하여 자신을 가두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문스럽지 않은가?
나는 누구이기 이전에 나는 무엇인가?
오직 혼돈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나는 혈마가 되었다.
손쉽게 살의 등의 원초적 욕망으로 설명되곤 하지만, 이 강렬한 욕망의 폭주도 손톱 너비의 홍천환에 갇혔을 때나 강렬했던 것이고, 파천진기에 쫓겨나 세맥의 틈에 숨었을 때나 분출구를 갖지 못해 응어리질 뿐이다.
결국엔 인체라는 거대한 토양을 만나면 범람했던 본능의 거친 물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흔만을 새긴 채 잦아들어 지하로 스며드는 법이다.
심연에 자신을 가두었음에도 때로는 죽음이라는, 때로는 정신적 자극이라는, 때로는 환도 아래 해방이라는 것을 통해 의식이 인체에 스며들어 깨어나고 외부로까지 발현되는 이런 현상.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들어오는 진도건의 모든 경험까지, 마치 하찮은 본성만 가졌던 인간이 불을 배우고, 이치를 공부하고, 철학을 깨우치는 수백 만년의 진화과정이 응축되어 스며드는 걸 느끼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연적이라 볼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이렇듯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인가?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자연적 섭리 안에서 나는 허용될 수 있는 존재인가?
생명(生命)의 기원(起源), 생몰(生沒)의 기작(機作).
혼돈으로 태어나 혈마라는 정체성이 깃든 지금의 자신이 어떤 기원의 기반 위에서 어떤 기작으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이론은 없다.
다만 분명하게 인지하는 건 마도라는 기치 아래 결집해있는 천마신교라는 조직, 단지운을 비롯한 구주마종의 신마라는 작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과 그 이상의 이질감.
거기까지 가는 과정과 이 분쟁의 끝에 도달했을 때, 어쩌면 답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혈마는 품고 있었다.
“존재의의라. 네 진지한 고심이 그것이었나?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더는 이 몸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네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당위를 설명해주진 못해.”
“아니, 목적은 같다. 천마신교의 멸교, 마도를 무너뜨리는 건 너의 책무일 것이며, 너의 그 행적이 나를 완성시켜 줄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우리의 대립이 있을지도 모르지.”
“크크크! 아니,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언젠가 늙어 죽어버릴 네 몸뚱어리는 관심 없어. 나의 이 깊은 고민을 그렇게 소멸시켜버리고 싶은 생각 따윈 없거든.”
빈정거리는 듯한 혈마의 태도에 진도건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왠지 무시당한 것 같은 섭섭한 기분이 들면서도 혈마가 바라보고 있는 지점에 정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도 궁금해졌다.
상식을 벗어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