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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64화 (264/432)

264화 - 제48장. 마령검 탈혼갑(魔靈劍 奪魂鉀) (4)

진도건과 천서은은 그들이 머무는 객잔으로 가지 못하고 안효철과 중천을 따라갔다.

중천은 성도군을 도와서 광혈종과 싸운 공로 덕분에 오래된 병영 시설 하나를 빌려 쓰는 상황이었다.

성도성에 주둔하는 병력이 긴축(緊縮)에 들어가면서 그 세가 줄자 자연스럽게 병영도 안 쓰는 곳이 생겼는데 거길 내어준 것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낭인들은 병영 시설로 돌아갔고 서충, 진도건, 천서은만이 안효철이 쓰고 있는 지휘관용 관저로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서자 안효철은 몸을 감추기 위해 두른 장포와 넓은 바짓자락을 모두 벗기 시작했다.

여자도 들어온 마당에 참으로 민망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안효철의 모습을 본 천서은은 탄식부터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청성파 경내의 시산혈하를 보고서도 이런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천서은이 표정으로 끔찍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고, 그건 진도건이나 서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순히 갑주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갑주를 구성하던 강철의 편린 하나하나가 피부를 파고들고 조직적으로도 연결되어서 말 그대로 한 몸을 이룬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등이 비늘 껍질로 이뤄진 동물 천산갑처럼 얼굴을 제외한, 발아래부터 목에 이르는 전신이 그런 상태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천서은이 계속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아 되물었다.

서충은 참담한지 그만 시선을 돌렸고, 진도건도 상당히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 스승도 이 천자철갑… 아니, 탈혼갑을 입었다가 어느 순간 지금의 내 모습처럼 변해버렸네. 그 뒤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정혈이 모두 빨린 강시 같은 모습이 되어 비명을 달리 하셨지. 그리고 목숨이 완전히 끊어진 그 시점에 이 탈혼갑은 다시 피부에서 떨어져나와 원래 모습을 유지하더군.”

더 충격적이었던 건 스승이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다시 피부에서 떨어져 원래대로 돌아온 당시 천자철갑이 마치 제자인 그까지 유혹하는 듯한 기운을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이 마물과 같은 것을 세상에 돌아다니게 할 수 없다는 사명감을 스스로 부여하는 처지였지만, 탈혼갑을 입은 첫 시작은 그도 스승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그럼 죽기 전엔 벗을 수 없단 말인가요?”

“아마 그렇겠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안효철의 물음에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이 진도건에게 쏠렸다.

진도건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혈마와 마주하면서 정말 평범한 상상력으로는 짐작조차 어려운 상황들을 맞닥뜨렸지만, 안효철의 상황은 그와 또 달랐다.

진도건이 입도 열지 못하고 있자 상대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 고민이 길었던 안효철이 먼저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벗었던 장포를 다시 두르고는 모두 자리에 앉도록 했다.

“자네는 그런 경험이 많은 모양이더군. 자신과 똑 닮은 존재와 그렇게 공존하고 있을 줄이야.”

“제가 죽을 상황이거나 혹은 다른 특별한 조건이 맞춰지지 않으면 깨어나진 않습니다.”

“친해 보이던데?”

“그보단 음……, 공생 관계가 맞는 것 같습니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육신의 지배권까지 뺏겼을 정도로 적대적이었죠.”

거기까지 얘기하자 괜히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문득 옆을 보니 천서은도 배를 쓰다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쓴웃음을 지었다.

이심전심, 서로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을 본 것이다.

“그런 자네가 볼 때 난 어떤 상황이었나? 잠깐뿐이긴 해도 난 거기서 자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네만.”

“뭘 보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 창고에서 부서진 도등을 만졌을 때, 혈마가 잠깐 깨어났었어. 그리고 그 도등 안에 남아있던 환마의 기운을 취해 탈혼갑이 가진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갔거든.”

“안 대협이 아니라 탈혼갑의 무의식이요?”

진도건이 혼잣말할 때, 천서은은 혈마가 깨어났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진도건이 안효철의 등에 손을 대자마자 바로 상황이 해소된 셈이었으니 그저 혈마의 마기를 이용해 어찌해본 정도로만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도건의 입에서 무의식의 영역을 말하자 전해지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창천맹에서 이미 혈마의 무의식에 들어간 적이 있었던 천서은으로서는 그 잠깐의 시간이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을 거라는 가정과 함께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진도건과 천무경이 혈마의 무의식 속에서 묶여있던 시간만 수일이었다.

“나도 그곳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사실상 현실적인 시간 흐름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걸 깨닫고 놀랐어.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시간이 지나고 있었던 거야. 그 안에서의 시간이 절대로 짧지만은 않았거든.”

“으아……!”

갑자기 신음을 흘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보니 서충이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거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군!”

진도건과 천서은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효철도 사실 서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당사자로서 최대한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중이었다.

“처음 마주한 건 분명 탈혼갑의 영체였던 것 같습니다. 머릿속으로 그 정체가 확연하게 들어왔으니까요. 그건 사람의 형상이라 보긴 어려웠습니다. 아니, 사람처럼 두 발로 서고 두 팔과 머리 모두 있었지만, 명확한 형상도 없이 대단히 일그러지고 혼돈에 가득 찬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꽤 놀란 느낌이었는데 집어삼킬 듯이 공간을 자신으로 가득 채워 덮쳤지만, 혈마의 개입으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게 안 대협의 영성이었죠.”

“흐음……. 어려운 이야기군.”

“놈은 그것으로 물러난 건 아니었습니다. 안 대협 스스로 깨닫지 못하시니 그걸 본 제가 더 의문스럽긴 합니다만…….”

“무얼 보았는가?”

“지금 그 갑주의 형상처럼, 때로는 더 일그러진 어떤 덩어리처럼 보이면서 안효철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영혼처럼 보이더군요.”

“……으하하하핫!”

진도건의 설명을 들은 안효철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워낙 호탕하게 웃어버리는 바람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음에도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졌다.

“심각하게 들으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핫! 아니, 심각한 건 이미 당면해 있는데 또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자네의 설명이 너무 공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거야.”

“기왕이면 떼고 나오지 그랬나?”

서충의 물음에 진도건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제 조금 깨닫게 되었지만, 환도마종의 그런 기운이 뭔가 마기나 무의식의 영역 또는 마도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 어떠한 통로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말씀하신 걸 과연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체취한 마기의 양이 워낙 적어서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없었습니다. 맥없이 분리되어 버린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래서 ‘환도(幻道)’인가요?”

“그럴지도.”

천서은의 물음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든 게 짐작일 뿐이지만, 그간의 경험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지금 하는 짐작들이 대개 정확할 거로 생각했다. 성도성에 펼쳐진 술진 안에서 혈마의 의식이 강하게 발현되고 유지되었던 경험이나, 청성파에서 환도신마가 보여준 술법의 기기묘묘한 현상들이 모두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나, 천마 단지운. 만마본원의 천마가 바로 나다.”

단지운에 의해 무의식의 공간에 들어가서 들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모든 마의 뿌리와 근원이 천마인 자신에게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환마는 다른 여러 마도로 연결할 가지와 줄기 역할을 하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편 한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충이 궁금한 게 생겼는지 손을 살짝 들어 눈길을 끌었다.

“계속 얘기를 들어보니 말이야. 결국, 대형의 지금 상태를 풀어낼 만한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 거로군. 그렇지 않은가?”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서충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안효철을 흘끔 보더니 주먹으로 탈혼갑에 둘러싸인 팔을 툭툭 두드렸다.

“이 쇳덩이 마물에게라도 직접 물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서충이 중얼거리면서 괜히 살짝 탈혼갑을 때렸던 주먹을 쓰다듬었다. 일부러 힘주지 않고 때렸음에도 그 반발력에 주먹이 시큰했던 것이다.

짝!

“아하!”

그때 갑자기 천서은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뭐가 말인가?”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탈혼갑에 직접 물어보면 된다고. 이곳 성도에 아직 남아있는 대도등이 있다면, 혹은 사천 내에 환도종이 숨어있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어서 그런 도등이 남아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흐음!”

그녀의 말에 공감했는지 서충이 조금 진지한 표정이 되어 안효철을 쳐다보았다.

“아직 성도에 남은 곳이 있습니까?”

“아직 하나가 남았네.”

“그럼 가서 바로 해보시죠.”

서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쫓아서 일어나려는데 무겁게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진도건을 보자 멈칫했다.

“왜 그러는가? 자네가 한 번 더 연결해주면 아까 전 만큼의 틈은 벌 수 있을 텐데.”

진도건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골몰히 생각했다.

‘……발상은 좋지만, 접근할 대상이 잘못됐어.’

진도건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대협께선 다시는 환도종의 물건 같은 것엔 손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도등의 위치는 저도 느껴지고 있으니 제가 가겠습니다. 혹시 또 정신을 놓으실 수 있으니 안 대협은 여기 계십시오.”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겠나?”

“제 짐작이 맞는다면 대도등에 담긴 환마의 기운은 안 대협과 탈혼갑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도 할 겁니다. 성도성을 감쌌던 거대한 술진을 유지하는 데 쓰인 물건이니 안에 담긴 환마의 기운도 상당했을 겁니다. 안 대협이 직접 그것을 부쉈을 땐, 탈혼갑이 마음껏 그 기운을 흡수했을 것입니다. 그랬으니 결국 그 기운이 누적되어 탈혼갑에 먹힐 뻔한 것이지요.”

“먹힐 뻔했다고?”

진도건의 설명에 안효철의 안색이 굳어지고 서충은 깜짝 놀라 되묻는다.

“그 무의식의 영역에서 보았던 걸 생각하면 역시 그렇습니다. 비록 탈혼갑의 영역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육체적으로 연결되어있으면서 그렇게 자신에게 기생해있는 탈혼갑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주의하셔야 합니다.”

다시 그때의 기억을 되새겨본다면 그가 혈마와 함께 진입했던 그 순간은 분명 탈혼갑이 안효철의 영혼을 완전히 감싼 채 잠식하고 있던 상황이 틀림없었다. 만약 혈마의 마기가 다른 마기를 삼키려 드는 특성이 없었다면 그렇게 진입했다 한들 탈혼갑이 식령(食靈)하려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었다.

‘식령. 그래, 적절한 비유야. 사실상 그 순간 걷어낸 것도 환마의 마기가 거의 전부였을 가능성이 크겠지…….’

진도건이 얘기하는 것들은 여전히 다른 세 사람의 귀엔 어렵게 들렸다.

천서은이 진도건의 팔을 붙잡아 시선을 끌어왔다.

“그럼 혈마와 대면할 생각인가요?”

“응.”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서은이 이야기의 맥을 잘 짚고 물어본 것이었다.

대도등에 담긴 그만한 환마의 마기라면 혈마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무의식의 공간에 진입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서은이 다소 불안한 기색을 비치며 입을 열었다.

“혈마가 탈혼갑처럼 굴진 않겠죠?”

“그의 식성은 마기에 대한 것이니까. 식령의 탈혼갑과는 궤가 좀 다르지. 아마 괜찮을 거야.”

진도건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천서은도 따라 일어났다.

진도건이 안효철과 서충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다녀올 테니 편히 쉬고 계십시오. 안 대협도 다시 안정을 되찾기 위해 하실 일이 있으실 겁니다.”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을 따르겠네. 꼭 돌아와 얘기를 해주게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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