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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63화 (263/432)

263화 - 제48장. 마령검 탈혼갑(魔靈劍 奪魂鉀) (3)

벌써 미래에 큰 재앙이 닥친다고 예단하는 건 경거망동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흔일곱 번의 해가 바뀌는 동안 당부순이 쌓아온 삶의 깊이란 어쩌면 서른 살도 안 된 두 남녀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일지 몰랐다.

이곳 성도와 당문이 마주해야만 했던 마교의 기습을 당부순은 대단히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작금에 벌어졌던 사태가 해결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사람이 바로 진도건이었기에 정말 진지하게 자신의 우려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일흔일곱 노인의 시선에서 진도건은 꽤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주는 모습이었다.

진도건이 차분히 미소를 지으면서 당부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철없던 시절엔 그저 귀한 소녀의 곁을 호위하는 정도가 제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주제넘은 기연도 몇 번이나 마주하고 나니 제 삶이 이젠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더군요.”

천서은은 당부순이 너무 부담을 준다고 여겼는데 진도건이 화답하는 말의 내용을 듣고 내심 깜짝 놀라 쳐다보게 되었다. 언젠가 진도건이란 사내에게 아쉬워했던 태도에 대한 기대치를 훨씬 초월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젠 흔들리지 않습니다. 언제고 닥쳐올 죽음의 조류를 막기 위해 많은 영웅이 저마다 노력하고 있으니 그 속에서 제게 역할이 있다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달리다 보면 기대했던 날이 꼭 오겠지요. 오직 그것만을 보고 살고 있습니다.”

당부순과 천서은이 놀란 심정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당부순은 진도건이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 잘 깨닫고 있기에, 그리고 천서은은 진도건이 그녀가 생각하지 못했던 더 높은 영역에 서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 어색함에 놀라고 있었다.

“하아! 노인네의 허황된 걱정이 태산처럼 높아 부담만 주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보잘것없는 기우에 불과했구먼. 오히려 위로를 받았어.”

진도건이 씩 웃는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 노부야말로. 부디 이 절망적인 혼란의 끝에서 자네와 우리 모두가 기대했던 날을 맞이할 수 있길 빌겠네.”

세 사람은 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하면서 작별을 고했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천막에 나와 당문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어쩐지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진도건의 팔을 감싸 안고 꼭 붙어 걸어가던 천서은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기대했던 날이 뭐예요?”

진도건이 그녀와 눈빛을 맞추었다.

“그건 왜 물어?”

“오직 그것만을 보고 살고 있다면서요.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요.”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너와 혼인해서 함께 사는 날.”

천서은의 볼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당부순에게 이야기하던 그 진지한 고민 끝에 그녀가 있다는 생각에 감동하면서도 과거 그의 기준을 낮춰 보던 자신을 몰래 책망하게 되었다.

천서은은 화답할만한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괜히 진도건의 눈빛을 피해 앞을 바라보았다.

“방주께서 말씀하셨잖아. ‘환란이 지대하니 책임을 다하라. 당장의 혼약은 사치스러운 일이다.’라고 말이야. 난 그 분부를 반드시 지키고 당당하게 널 데려갈 거야. 그렇게 함께 살면서 아들, 딸 다섯은 낳아야……, 이크!”

진도건이 아파서 펄쩍 뛰었다.

천서은이 그의 팔을 세게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칠까 봐 손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으니 볼까지 꼬집는 그녀의 혼쭐을 벗어날 방도도 없었다.

하지만, 아파도 즐거운 순간이었다. 이런 행복이 있기에 냉혹한 현실의 무게도 버틸 수 있으니.

그건 천서은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운으로 인해 불편했던 감정적 요소들이 충분히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진도건과 천서은은 성도 안에 잡아놓은 객잔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진 공자, 천 낭자!”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사방으로 갈라지는 대로의 동쪽 길에서 한 사내가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들도 익히 안면을 터놓았던 사람이었다.

“서 부장.”

그는 중천의 낭인 서충이었다. 다가와서 보니 당황한 안색과 더불어 대단히 조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좀 도와주게. 아무래도 지금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대형의 상태가 위급해 보여.”

서충이 빠르게 늘어놓는 말을 듣자마자 진도건도 바로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십시오.”

“고맙네.”

세 사람은 곧장 경공을 펼치면서 지붕을 넘어 빠르게 성의 동부로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동쪽 성문 근처 성벽이었다. 서충은 앞장서서 동쪽 성벽 위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그리고 성벽을 따라 움직이는데 다른 중천 낭인들이 병사들과 함께 서 있는 걸 보였다.

그들은 이내 성벽 내부로 통하는 계단을 찾아 내려갔다. 두 개의 방을 지나 벽 내부 지하로 계속 내려가서 도착한 곳은 군비 물자가 저장된 지하 창고였다.

지면 아래 만들어놓은 공간이라 성벽 너비를 아우를 정도로 제법 넓은 공간이긴 했으나 많은 병장기를 채워두어 실상 사람이 움직일 자리는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안에 있던 몇 낭인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걱정이 잔뜩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안효철에게 향해 있었다.

“어서 좀 봐주게.”

진도건은 서충의 재촉을 흘려들으면서 안효철 가까운 자리에 파괴된 목조상부터 살폈다.

한 낭인이 옆에서 진도건이 안효철이 아닌 목조상부터 살피자 다급히 재촉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충이 바로 눈치채고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청성산 싸움 이후 지난 열흘 사이 중천과 진도건 일행은 안면을 텄다. 그리고 서충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진도건에 대한 이런저런 활약상이나 겪었던 일들을 들은 바 있었다.

안효철이 갑작스럽게 발작하면서 꼼짝도 못 할 지경이 되었을 때, 그가 간신히 내뱉은 세 글자가 바로 진도건이었다.

그간 찾아들은 설명들과 지금 이 자리에 벌어진 일의 맥락을 미루어봤을 때, 중원 무림에서 마교와 마도의 본질에 대해 가장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 바로 진도건이었다. 그리고 안효철에게 일어난 상황까지 해결할 유일한 사람도 그밖에 없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 천자철갑을 벗길 수도 있지 않을까……?’

서충은 오히려 더 한 기대를 품고서 진도건이 하는 걸 숨죽여 지켜보았다.

진도건은 목조상의 파편을 만지면서 그 안에 잔재한 마기를 느꼈다. 그건 일전에 이화림에서 파괴했던 도등에서 느꼈던 마기와 유사했다. 그런데 목조상의 크기가 그때 보았던 것보다 훨씬 커서 그 느낌이 더 선명했다.

‘이 마기는 환도마종의 그것과 닮았군.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어.’

진도건은 이 목조상이 성도성을 휘감았던 환도강마대진계를 발동하고 유지한 대도등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였다.

“크크크! 이건 또 무슨 상황이냐?”

혈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어떻게 하면 되나?”

진도건이 바로 물었다.

“안 놀라는군.”

“이미 한 번 겪어봤는데 놀랄 리가. 뭘 하면 되는지 얘기해봐라.”

진도건이 시큰둥하게 대꾸하면서도 왼손을 뻗어 안효철의 등에 대었다.

“누구에게 얘기하는 것이오?”

서충이 당황해서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천서은이 그를 툭툭 건드려 부르더니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었다.

“쉿.”

서충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천서은만이 진도건이 자신의 안에서 다시 깨어난 혈마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때 진도건의 눈살이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혈마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릿속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핫! 이거 놀랍구나! 저 대도등에 남은 기운들을 모두 회수해라. 환마의 기운이 저것과의 길을 열 것이다.”

혈마의 말을 듣자마자 진도건이 손을 뻗어 대도등 목조상의 파편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두 손을 펼쳐서 파편들을 향해 뻗는 순간, 붉은 기운이 일어나 파편들을 한 차례 크게 휘감았다가 손안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진도건은 곧바로 안효철의 등 뒤로 움직이고는 두 손을 다시 등에 대었다.

그 순간 그의 두 손에서부터 파문이 일어나며 잠시 보랏빛 광휘가 맴돌았다. 그러더니 안효철이 웅크렸던 몸을 풀면서 입을 쩍 벌렸다.

“커허헉……!”

눅진해진 침과 같은 비말이 한가득 차올랐던 신음과 함께 토해졌다.

“대형!”

서충이 놀라 급히 안효철에게 다가가 안위를 살폈다.

그때 진도건도 안효철에게서 손을 떼며 일어나는데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비틀거리자 급히 천서은이 다가가서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괜찮아요?”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에 갑자기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자 중천의 낭인들은 모두 안도의 미소를 지으면서 안효철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진도건이 무슨 수로 안효철의 상태를 풀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진도건의 찌푸려진 미간이 쉽게 사라지지 않자 천서은도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진도건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잠시 기다려달라는 눈빛이었다.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도건이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고는 안효철에게 다가갔다. 그는 잠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안효철을 내려다보다가 그 옆의 서충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 부장,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좀 설명해주시지요.”

“응? 아아, 대형이 갑자기 마기의 기척이 느껴진다고 제거해야겠다면서 밖을 나가길래 여기 동료들과 함께 따라 나왔네. 마기의 기척이라고 하길래 숨은 마교 잔당들인 줄 알았는데 막상 따라와 보니 이런 목조상뿐이었어. 그렇게 이곳까지 와서 다섯 개째 박살 내는데 갑자기 이 지경이 되었던 거지.”

“안 대협이 직접 부쉈겠군요.”

“응? 확실히 그랬지. 그게 문제였단 말인가?”

“내 문제였지.”

서충의 물음에 대답한 건 안효철이었다. 몸 상태가 괜찮아졌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척 가빴던 호흡이 안정되어 있었다. 얼굴의 혈색도 제법 돌아왔고 눈의 초점도 선명하게 진도건을 향하고 있었다.

그 말에 공감하는지 진도건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안효철이 자조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이 천자철갑 때문에 반쯤 홀려있는 상태였지. 아무래도 마기를 더욱 탐하려는 특성이 있었던 모양이네. 내 정신을 홀려 이걸 찾아낼 정도면 말이야.”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화경의 경지에 이른 자신이 천자철갑이라는 마물에게 정신이 홀려버리는 추한 꼴을 보였다는 사실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컸다.

그건 바로 옆에서 얘기를 듣던 서충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형이……, 홀렸다고요?”

그 말이 시사하는 바가 컸는지 다른 낭인들조차 잠깐 기뻐했던 건 잊어버리고 금방 걱정스러운 기색들을 보였다.

청성산 전투 이후로 안효철은 중천 내 몇몇만 알고 있던 천자철갑과 관련한 내용을 동료들 모두에게 공유했었다. 그 자세한 내막까지 일러준 건 아니었지만, 광혈신마와의 싸움 이후로 천자철갑이 신체에 직접 연결되면서 언젠가는 결국 목숨이 위험해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얘기한 것이다.

그래도 모두가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건 안효철이 화경의 고수이기도 했거니와 ‘언젠가는’이란 말이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털어놓은 지 며칠 만에 이런 상황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진도건은 안효철의 얘기와 서충의 놀란 반응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천자철갑이란 이름은 안 쓰는 게 좋겠습니다.”

서충은 진도건이 느닷없이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말에 수긍했다.

“……그렇지. 세평으로 붙여진 이름 따위…….”

“아무래도 안 대협과 전 그 ‘탈혼갑’에 대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진도건의 입에서 분명하게 튀어나오는 천자철갑의 정체.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충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좀 더 편해진 얼굴과 눈빛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단 돌아가서 진지하게 얘기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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