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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62화 (262/432)

262화 - 제48장. 마령검 탈혼갑(魔靈劍 奪魂鉀) (2)

당혁수는 성문을 지나자마자 대로변을 피해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당문에 이르자 여전히 많은 환자가 치료받고 있는 외원의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원들과 무림인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외원을 지나친 당혁수는 한참 철거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내원에 들어섰다.

하루 바쁘게 움직인 그가 오늘 하루 마지막 일을 하기 위해 들어선 곳은 바로 아들의 방이었다.

끼익.

당혁수가 천천히 문을 열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깐 반쯤 열다 말고 피식 웃으며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문을 마저 열면서 안으로 발을 넣었다.

“오, 오셨습니까?”

당한솔이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어색한 어투로 부친의 입실을 맞이했다.

“뭐하고 있었느냐?”

당혁수가 씩 웃으며 묻는데 시선은 당한솔이 아니라 침상 한쪽에 작은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야율균은을 향하고 있었다.

“아, 그냥 얘기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스럭거리면 이 아비가 괜한 걸 물어본 것 같지 않느냐?”

“하,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당한솔이 멋쩍게 웃으면서 야율균은을 흘끔 보았다. 괜스레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숨기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밖으로 흘러나와 버렸다.

“다리는 어떠냐?”

“진통제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역시 힘듭니다.”

당혁수가 얇은 이불을 걷자 당한솔의 다리를 부목으로 지지한 채 붕대를 감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혁수는 잠시 상태를 살피곤 다시 이불을 덮고 아들의 이마까지 손으로 짚었다.

“열이 좀 있구나.”

“안 그래도 오시기 조금 전에 해열제를 먹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답답하겠지만, 잘 참아라.”

“예, 아버지.”

당혁수가 시선을 야율균은에게 돌렸다.

“몸은 좀 어떤가? 운기에 막힘은 없고?”

“예, 살펴주신 덕분입니다.”

야율균은이 사혈신마 서문질에게 크게 당한 후, 상당히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진도건이 마기와 독기를 거둬가지 않았다면 정말 목숨이 위험할 뻔했었다. 물론 내상도 절대 가볍지 않았는데 그녀가 온전히 안정될 때까지 당혁수는 정말 첫 이틀간 치료에 매진했었다.

그건 아들인 당한솔을 지켜준 일의 보은이었으나 정성이란 게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재단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야율균은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야율 소저도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내 아들의 허드렛일까지 거들어주고 있으니 참 미안하네.”

“별말씀을요.”

야율균은이 칭찬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절이 몸에 덜 배어서 그렇겠지만서도 눈빛이나 태도에는 진심이 보여서 당혁수도 그녀가 꽤 마음에 들었다.

“병시중 드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또 없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아는 게 많으니 소저를 막 귀찮게 하진 않을 것이네. 다만 그래도 걱정인 건 내 아들이 워낙 숙맥이라서 이렇게 곁을 지켜주는데도 조용히 입만 다물거나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는 거 아닌가 해서 말이야.”

당혁수가 당한솔을 보며 말했다. 입가에 씩 미소를 그리는 것이 다분히 의도적이다.

당한솔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볼이 빨개지는데, 야율균은이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마님도 그렇고 가주님도 그렇고 일부러라도 절 배려해주시니 오히려 그게 부담스럽습니다.”

“아하, 그런가?”

당혁수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소가주님이 아는 게 많아서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만…….”

“다만……?”

“제 성정이나 출신이 그렇다 보니 말 걸 때, 우물쭈물하지 않고 바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역시 초원의 전사들처럼 자신감이 있는 쪽이 더 좋거든요.”

“아하하하!”

야율균은이 미소를 머금으며 당돌하게 얘기하자 당혁수가 흡족해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한솔이 멋쩍게 웃으며 이마를 긁적이는데 눈은 계속 야율균은을 흘끔거리면서 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미 당혁수 일가나 야율균은 모두 이심전심인 수준이니 서로가 각자의 마음을 빙빙 돌려 말해도 거의 직설로 들릴 정도였다.

당혁수는 옆의 탁자에 펼쳐진 의서에 손을 뻗어 덮었다. 그리고 괜히 그걸 들어서는 당한솔의 머리를 툭 쳤다.

“읏!”

“이 아비는 네 어머니와 늦은 나이에 만났어도 정말 불꽃 같은 사랑을 했는데 넌 이 당혁수의 피를 잇고 대체 뭘 그리 쩔쩔매느냐? 이렇게 기회 주는 경우도 흔치 않은 일이거늘.”

“제 상황이 어찌 아버지와 같겠습니까?”

괜히 머리까지 한 대 맞자 당한솔도 조금 울컥해져서 대꾸했다.

다리에 장애가 있다 보니 여인들과의 인연이란 게 정말 거리가 멀었는데 부러지기까지 한 상황이 너무 억울했던 것이다.

그런 뜻을 야율균은도 알아들은 것일까? 그녀가 당혁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 사랑이 그만큼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괜히 자기 못난 부분부터 돌아보게 되고……. 그런 걸 역으로 생각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그렇죠, 가주님?”

당한솔은 처음에 그녀가 당혁수에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곧 자신에게 하는 소리임을 깨닫고 당황스러웠다.

당혁수는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좋은 지적일세. 그러니 한솔이 너도 정신 차리고 소저가 실망하지 않도록 그 억울한 생각 따위들은 그만 버리거라.”

“하……!”

“이 아비가 네게 숙제를 하나 주마.”

“갑자기 숙제요?”

“그래, 앞으로 이 두 다리가 나아서 다시 외출할 수 있을 때쯤이 되면 여기 야율 소저의 입에서 가주님 대신 다른 호칭이 나올 수 있도록 해라.”

당혁수가 아들과 눈을 마주치며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얘기하니 당한솔과 야율균은은 동시에 멍해졌다.

끼익!

그때 밖에서 기척과 함께 문이 덜컥 열리면서 진윤지가 방 안에 들어왔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손바닥으로 당혁수의 등을 때렸다.

찰싹!

“어이쿠!”

“어휴, 이 양반이 초를 치려고 아주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야율균은이 깜짝 놀란 얼굴로 진윤지와 당혁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기품 넘치던 당문의 안주인과 사천제일의 화경 고수 당혁수의 위엄이 사적인 공간 안에서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걸 목격하고야만 것이었다.

곧 야율균은의 얼굴에 웃음이 넘칠 듯 끓어오르자 민망해진 진윤지가 당혁수의 팔을 끌었다.

“당신, 쓸데없이 굴지 말고 어서 나와요. 낭자, 미안해요.”

안 나가려는 당혁수를 억지로 끌어내면서도 야율균은에게는 다시 기품있는 몸짓으로 사과하는 진윤지의 모습은 정말 반전이었다.

야율균은이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당한솔은 부모의 민망한 모습에 그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진윤지는 키득거리는 당혁수의 손을 끌고 부리나케 밖으로 바로 나갔다.

곧 만발하며 터져 나온 야율균은의 웃음꽃에 함께 있던 당한솔도, 바깥의 가주 부부도 서로를 마주 보며 흐뭇한 미소를 공유했다.

물론 등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당혁수가 웃음을 머금은 눈가를 살짝 찡그리곤 있었지만 말이다.

* * * *

진도건과 천서은이 단지운을 상대하며 입은 내상은 아주 심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바깥의 객잔에 숙소를 잡고는 당문으로 내원하면서 당타 당부순에게 진료를 받았다.

내상을 다스릴 침술과 뜸치료 등을 진행하고 이후엔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탕약을 처방받아 마셨다. 단지운을 상대한 싸움은 그야말로 한계를 시험하는 격전이었으므로 내공 소진이 정말 컸는데 이를 돕는 것만으로도 내상은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소견이었다.

“이젠 내원할지 말지는 알아서 결정해도 되네. 오면서 잘 쉬면 회복을 더 당길 수 있겠지만, 굳이 와서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무리만 하지 않으면 운기행공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회복될 게야. 자네들은 그만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말이야.”

“한 주 간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어르신.”

진도건이 꾸벅 인사를 하자 천서은도 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당부순은 수염을 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허리를 세우는 진도건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몸은 정말 놀랍구먼. 내 비록 무학의 경지가 얕긴 하지만, 가주의 몸 상태를 자주 진찰하는 편이라 내외공의 발전에 대한 식견은 얕지 않다 자부한다네. 그런데 자네 몸은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사람이 가진 그릇에 대한 여러 추상적인 한계점들을 아득히 뛰어넘었어. 솔직히 자네의 내상은 천 낭자보다 심했음에도 벌써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이 빨리 되었어. 이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그런 몸을 만들었나? 특별한 탄생의 비결이라도 있었던 겐가?”

뭔가에 꽂힌 듯 한꺼번에 쏟아내는 말의 홍수에 진도건이 멋쩍게 웃었다.

복잡한 삶의 굴곡을 몇 마디 말로 어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당부순은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가까운 침상에 같이 앉혔다.

일흔일곱의 노의원이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양인데 듣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직전 같은 질문은 사실 진도건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 난감했다.

“이렇게 물어본들 한두 마디 대답 정도로 이해할 수준은 아니겠지. 그거 아는가? 강호무림에서 무공의 경지를 이루고 그 위상이 높아질수록 얻는 건 자유보단 책임 쪽에 가깝다네. 그리고 그 책임을 엉뚱한 방향으로 방종(放縱)한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당타 어르신의 지혜를 일러주십시오.”

“지혜랄 게 뭐가 있겠는가? 가치를 중심에 두고 단단히 하는 것만큼 훌륭한 지혜는 없는 것일세. 강호인들은 무공을 통해 더 큰 힘을 추구하지만, 거기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많은 죽음을 부를 수 있어. 아무리 그것이 강호의 냉혹함이라 하더라도 결국, 세상의 정의는 더 많은 죽음을 막기 위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네. 가치와 책임을 상실한 살인마가 되지 말게. 어차피 죽음을 안고 가야 하는 것이 냉혹한 숙명이라면 더 많은 죽음의 조류를 막기 위한 책임을 기꺼이 안을 수 있어야 해.”

“무거운 말씀이군요.”

“정파와 사파, 마도 모두 저마다의 정의를 두고 다투고 있지만, 이 전쟁의 끝이 어디에 이를지, 누가 승리할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이 노구가 보기에 자네는 앞으로도 더 큰 힘과 책임이 그 거대한 그릇에 담길 거야. 결국, 세상은 자네의 판단을 요구하고야 말 걸세.”

당부순의 두 손이 진도건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손아귀의 힘이 진도건을 강하게 붙들면서 그 열의를 전달하는 듯했다.

“한번 자신에게 되물어보게. ‘난 여기까지 잘 온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의 기준과 가치를 흔들림이 없도록 다져두게. 그렇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수정해야 할 것이네. 안이한 선택이 더 많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를지도 모르니 말이야.”

옆에서 듣던 천서은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당부순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부담을 그렇게 크게 주시면 오히려 더 실수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희야 창천맹의 지시를 수행하는 것일 뿐인데요…….”

당부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화불단행이라, 재앙은 번번이 겹쳐서 온다고 하였어. 마도는 거병을 일으키면서까지 큰 전쟁을 획책하고 있고 정파와 사파는 연맹을 구성하여 반격하고 있네. 수많은 죽음이 뒤따를 거야.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사태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강호라는 건 결코 무림의 것이 아닌 모든 세상과 연결된 추상적 공간이야. 무림이 이 정도로 혼란스럽다면 민중들이나 황실, 관부도 혼란스럽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는가? 태평성대는 지나간 지 오래고 황실은 간신들이 넘쳐나 중원에서의 영향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네. 동북방에는 금국의 위세가 점점 커지고 있고 가까운 서쪽의 서하국도 호전성이 매우 높은 나라야.”

“전쟁이…… 일어날 거란 말인가요?”

“글쎄,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리 멀지 않은 일엔 나라 간에도 큰 전쟁이 벌어지게 될 게야. 만약 강호무림에 잠재된 이 거대한 재앙을 끊어내는 데 실패한다면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정도의 재앙이 초래할지도 모르네. 아직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얘기하는 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훗날 돌이켜봤을 때의 오늘을 후회해선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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