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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59화 (259/432)

259화 - 제47장. 혼돈의 씨앗은 여전히 잠재하다 (4)

처음 봤을 때도 그렇지만, 단원진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양자성은 영혼마저 떨게 만드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와 한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알게 되는 건 그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그런 본능적인 느낌이 전신 신경 하나하나에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도무지 그 앞에서 무공 한 수 펼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게 정상일 텐데, 또 그가 하라면 하게 되는 어떤 의지의 상승이 느껴졌다.

‘천하제일의 마공을 손에 거머쥐었지만, 그의 마성을 이어받은 이후로는 포로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양자성이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단순히 밖을 나가지 못하는 답답함 이상으로 거기에 대한 불안감이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았다.

자유의지로서 검림을 나와 선택한 것이지만, 오히려 자유의지를 빼앗긴 느낌.

극히 작은 느낌 하나만 가지고 논리를 비약해 자신에게 제약을 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단원진을 마주할 때마다 느껴지는 지점들은 오히려 불안감을 조금씩 키워주는 모양새였다.

양자성은 입공으로 천마신공을 운기하면서 기운을 분출시키기 시작했다.

단원진, 단지운과 똑 닮은 듯한 칠흑의 기운 속에 은은한 백무(白霧)가 흘러서 은근히 잿빛에 가깝게 느껴지는 건 그가 수련했던 백양소혼신공의 영향 때문인 듯했다.

‘흐음.’

그 모습을 보면서 단원진은 잠깐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단원진이 양자성이 혼자 수련하도록 하는 건 이 두통 때문이었다. 두통이 심한 건 아니었으나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마치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찝찝한 느낌이 남는 것이었다.

“덤벼보아라.”

단원진이 손을 까닥거리자 양자성이 곧장 권장을 펼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천마동 안에 굉음이 연신 울려 퍼지면서 칠흑의 강기가 휘몰아쳤다. 큰 내공 소모가 요구되는 강기들을 쏟아내면서도 품으로 파고들어 권각으로 함께 초수(招數)를 만들어내는 운용의 묘는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이것은 천마신공의 시전자가 할 수는 아니었다.

대등한 수준의 상대조차 마도 정점 천마의 마기를 토대로 찍어누를 수 있는 패도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천마신공을 손에 넣고도 다른 신마들에 못 미치는 수준의 위력을 보여주는 건 오히려 스승인 단원진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일과 같았다.

날아오는 강기공들은 아예 단원진 가까이 닿지도 못하고 폭발과 함께 소멸되었다. 양자성이 펼쳐내는 권각은 그저 보법과 움직임, 한 손으로 충분히 막고 피할 정도였다.

‘이 녀석이……?’

단원진은 순간 화가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그래도 이전에는 강기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직접적인 공방은 좀 더 치열하게 다투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세마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주먹을 내지르던 양자성은 순간 단원진의 장심이 어느새 명치에 와있음을 느꼈다.

쩌엉!

“컥!”

반응할 틈도 없이 얻어맞은 양자성이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밀려난 것에 비해 생각보다 고통이 적었다.

손속에 자비를 두었다는 걸 두고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든 양자성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제자가 미진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주십시오.”

“권 각주를 따라서 예까지 올 때까진 열망이라는 게 보였는데 이젠 완전히 식어버린 모양이구나. 널 거두겠다고 한 나의 결정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소, 송구합니다.”

“천마신공의 성취는커녕 처음 봤을 때의 그 날카로움도 사라졌으니…….”

양자성은 정말로 두려워 부들부들 떨면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끊어지고 침묵이 길어지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는데 단원진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양자성은 단원진이 무엇을 보고 저리 멈춰 섰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단원진이 보고 있는 뒤쪽을 살피려는데 단원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검이라…….”

단원진의 중얼거림처럼 그가 바라본 방향, 양자성이 좇아서 살핀 방향엔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 들고 왔던 검이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타다닥!

갑자기 검이 흔들거리더니 양자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헛!”

양자성은 급히 손으로 땅을 밀면서 날아오는 검을 받기 위해 몸을 틀었다. 다행히 공격이 아니었는지 자루가 먼저 정면으로 날아와서 용케 오른손으로 잡아챌 수 있었다.

얼떨결에 일어난 건 덤이었다.

“오랜만에 검 다루는 솜씨나 구경 좀 해보자.”

“예? 예…….”

단원진의 느닷없는 요구에 양자성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검을 손에 쥔 게 정말 오랜만이군.’

검림의 제자로서, 백령신검 강정학의 제자로서 그는 줄곧 검객으로서 살아왔다. 마공 특유의 괴이함과 강력함에 취해 여기까지 와서 결국 천하제일의 마공 천마신공을 손에 넣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검법을 위한 무공이 아니었다.

백양소혼신공은 백령검법을 위해 만들어진 신공이었지만, 천마신공은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기운 자체를 다루는 무공이라 볼 수 있었다.

듣기로 천마어검으로 불리는 천마신공의 단계가 존재한다고 들었지만, 여기에 이르기에는 그의 성취가 너무 부족했다. 또 듣기에 이기어검술을 상징하는 듯한 명칭이라 어떤 초식의 오묘함을 품은 검법으로 보기엔 부족할 것 같다고 짐작되었다.

사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천마신공을 연성하기 시작한 이후엔 검을 잡아본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새삼 어색하면서 반가운 느낌이 드는 건 그래서일까?

“감상은 충분히 되었나?”

단원진이 양자성의 침묵을 잠시 기다려주다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단원진이 들어오라 손짓하자 양자성이 바로 백령검법을 전개했다.

슈슉!

단원진을 직접 노리고 검을 찔렀지만, 역시나 닿지 않았다.

아무렴 좋았다.

오랜만에 전개하는 초식이었으나 다행히 몸과 검이 뜻대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꺾인 날개를 다시 단 것처럼 백령검법의 변화가 양자성의 검 끝에서 만개하듯 펼쳐졌다.

양자성을 상대해주는 단원진은 확실히 그에게서 직전의 무기력함과는 다른 날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원하는 건 아니지.’

몇 합을 받아내자 양자성이 본격적으로 천마신공을 운용하면서 그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천마신공을 운기하면서 흘러나온 마기가 종전에 펼쳤던 강기보다 더 날카로운 검강을 형성하면서 기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마치 몇 개의 파도가 서로 다른 곳에서 넘어와 한 곳에서 겹쳐지는 것처럼 사방에서 휘몰아쳐 날아드는 검강이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카카카칵!

폭넓게 강기의 벽을 세워 막아내는데 확실히 전과 다른 충격이 전해지자 단원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단원진의 눈빛이 빛났다.

검을 휘두르게 함으로써 기세가 살아나는 것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만마본원.

그의 눈은 양자성 안에 뿌리내린 마성을 변화를 감지한다.

마기를 운용할 때마다 칠흑의 광휘를 벗어던지고 잿빛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양자성의 기색(氣色)의 변화로부터 마침내 그는 영혼 깊숙이 각인된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만!”

단원진의 목소리에 양자성이 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막 방출되었던 강기는 단원진이 일으킨 무형의 벽에 막혀 소멸하였다.

단원진은 양자성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법을 전개하는 동안 잠깐 들뜨기까지 했던 양자성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나 싶어 조금 긴장되었다.

단원진이 가까이 다가와 검지를 들더니 그의 이마를 짚었다.

느닷없는 상황에 양자성도 적잖이 당황하는 사이, 이윽고 이마에서 손을 뗀 단원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보고 그 연유가 궁금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단원진은 씩 웃고 바로 대답해주지 않은 채 잠시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양자성을 지나쳐 걷더니 천마동 입구 반대편 벽면을 올려다보았다.

천마동 벽면 대부분은 손바닥으로 다지고 손가락에 쓸려서 생긴 물결무늬 같은 게 많았다. 하지만, 상당히 넓은 공동 내부를 안에서 볼 때나 그런 것이지 천마동 입구에서 바라보면 사뭇 다른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어있었다.

입구의 맞은편 벽면에는 사람과 같은 형상이 지면부터 천장에 이를 때까지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 모습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자만이 보이길 방해하는 구조로부터 살필 수 있는 풍경이었는데 양자성조차도 최근에서야 그런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걸 알았다.

뭐랄까.

어찌 보면 날카로운 인상의 노고수가 장포를 두르고 검을 든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산발하여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다수의 뿔처럼 착각하게 되어 짐승의 날개같은 것으로 몸을 반쯤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비스듬히 기울어진 검은 검신의 표면이 구불구불하고 기이한 형상을 띄고 있어서 과연 검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들어올 때 유심히 살펴야 그런 풍경들이 보이는 이유는 요철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벽의 흐름에 맞게 윤곽만을 새긴 듯한 모양이기 때문이었다.

양자성은 그 모습을 천마조사 단용후라고 생각했다.

단원진에게 특별히 들은 바는 없었지만,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그를 기리기 위해 천마동에 새겨놓은 게 아닐까 짐작하는 것이다.

그 이상으로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천마신공 연성 초기 발동됐던 천혼제정대진의 술진과 술식이 지면과 벽면에 광휘처럼 흐를 때, 벽면 조각의 형상과 관계없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별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쿵!

단원진이 발에 기운을 담아 땅을 구르자 그의 칠흑의 광휘를 품은 마기가 공동 전체로 흘러갔다.

기색이 달랐지만, 흘러가는 시작의 양상은 같았다.

하지만, 몇 차례 천혼제정대전 안에서 무공을 연성하던 양자성은 그 술진과 술식의 형태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천마동 중앙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벽면 조각과 단원진 사이를 연결하는 양상으로 펼쳐지는 걸 보았다.

‘오직 태상교주만이 재현할 수 있는 술진이란 말인가?’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는 광경 속에서 다음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놀란 양자성의 입이 절로 반쯤 벌어졌다.

단원진이 구른 발 앞에서 술진을 구성하는 광휘보다 더 짙은 칠흑의 광휘가 지면을 타고 뻗어 나가더니 벽면 조각의 중심을 관통하듯 흘러 올라가 양 눈으로 갈라졌다. 이윽고 두 눈에서 새하얀 광휘가 흐르더니 조각의 윤곽을 따라 뻗어 나가며 또 다른 술식이 그 위로 떠 올랐다.

파스스스…….

그 순간 사선으로 기울어진 검 조각의 중심 부분이 빛을 강하게 뿜어내면서 그 자리의 바위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을 가득 채우던 술진의 빛무리가 일거에 모두 사라졌다.

‘이럴 수가……!’

정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천마동 안에 또 하나의 공간이 조각 뒤편에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전에 주백자를 상대로 펼쳤던 공간을 괴리시키는 술진도 경악할 만한데 물리적 구조물의 봉인을 술진으로 이뤄내는 광경은 무척 놀라웠다. 분명 환도마종의 술법일 텐데 그들의 서열이 구주마종의 여덟 번째에 그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찌 보면 천마신공보다 더 놀라운 불가사의한 힘을 품은 게 환도종의 술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와라.”

“예.”

단원진이 앞장서서 벽면에 생긴 틈으로 걸어가 몸을 기울이며 넘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안의 공기가 밖으로 바람처럼 흘러나와 양자성의 얼굴을 때렸다.

두근!

그 순간 심장이 격렬히 맥동했다.

양자성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 안에 자리 잡았던 천마의 마성이 요동치고 있음을, 그리고 그의 영혼이 틈 안으로 보이는 어둠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떤 숙명(宿命)’을 강하게 갈구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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