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제47장. 혼돈의 씨앗은 여전히 잠재하다 (3)
주화입마란 쉽게는 내외의 특정 상황으로 인하여 운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폭주함으로 설명하곤 하지만, 그 기저엔 오욕칠정(五慾七情)에서 비롯된 번뇌가 정기신의 조화를 무너뜨리는 데 있었다.
주화입마에 빠지면 때때로 자기 착란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주화입마를 경험했다가 운 좋게 살아남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군가는 환청을 듣기도 하고, 누군가는 귀신을 보았다고 얘기하는 자도 있었다. 심하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도 내공은 폐해지고 정신은 귀신들린 듯 헛소리만 나불대다 끝내 여러 이유로 죽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 번뇌라는 건 어떤 영향에 의해서건 자신에게서 싹트는 것이므로 외부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금태하씩이나 되는 사람이 생각할 만한 발상이 아니다.
그런 생각의 흐름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금태하가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송이, 넌 아느냐? 역사적으로 주화입마에 빠졌다가 멀쩡히 생존한 사람은 석가여래 외엔 없었다, 그 녀석을 제외하면.”
“……그 녀석… 이 누굽니까?”
“진도건.”
그 석 자 이름을 듣는 순간, 청명의 머릿속엔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잠깐 멍하니 생각에 잠겨서야 어째서 금태하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홍천환과 함께 일월신마에 의해 강제적 주화입마에 빠진 진도건과 그 이후 혈마검귀의 명성을 품고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지금의 진도건, 이 양면의 연결성에 빗대어 금태하도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보려는 것이 분명했다.
명확히 드러나는 차이가 있다면 홍천환 복용의 유무일 텐데, 그렇다면 금태하는 무엇이 홍천환의 대체재로써 자신에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청명은 불현듯 처음 금태하를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확장된 기감 속에서 청명은 백제성에서 떨어진 아주 먼 곳에서 너무나 명확한 존재감을 감지했다.
찰나의 순간마다 때로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바람에 휘날리는 촛불처럼, 때로는 폭발하는 활화산처럼 혼돈에 가까운 존재감은 마치 알 수 없는 운명적 손짓을 하면서 청명이 다가올 수 있도록 끌어당겼다.
청명은 그렇게 창천단에서 이탈하여 그곳에 이르렀고 거기서 그를 발견했다.
거의 반쯤 이지를 상실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며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금태하의 모습을 말이다.
청명은 금태하가 주화입마에 빠졌음을 알았고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금태하의 공격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상당한 경력이 실려있긴 했으나 근본적인 기력이 무척 쇠하였기에 청명은 아예 그를 점혈해서 제압한 후,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청명은 점혈이 주화입마 상태의 기혈을 해칠 수 있기에 다시 풀고선 강제로 가부좌를 틀도록 한 후, 곧바로 금태하의 뒤에 앉아서 장심을 등에 대고 운기를 돕기 시작했다. 내공의 근간이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가 미친 짓이었지만, 그는 태극신공의 정순함과 최근의 깨달음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게 닷새의 시간이 흘렀다.
정말로 무아지경(無我之境)인 상태로 운기를 도왔는데 정신이 들기 직전 그는 금태하의 정신적 영역 안을 엿볼 수 있었다.
청명은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무의식의 영역 전체를 타고 흐르는 어떠한 성정(性情)을 빨아들여서 마침내 뭔가로부터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금태하의 영체를 말이다.
‘그게 바로 마성이었던 걸까?’
청명으로선 처음 본 양태를 규정지어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왠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 속에 잠재된 그 성정을 엿보았을 때, 청명은 무수히 많은 감정의 파고와 함께 어떠한 영혼의 격(格)을 느꼈다. 그것이 설령 헤아릴 수 없는 혼돈과 더불어 흉악한 저의와 같은 것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가…….”
“직감이다. 마도의 본산을 뒤져보면 내가 납득할 만한 뭔가가 내 앞에 나타날 것 같다는 직감…….”
금태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청명도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청명이 스쳐 지나갔던 정보들로 인해 정리되지 않은 혼란을 느끼고 있다면 금태하는 1년 전부터 내면에 잠재되어있음을 느낀 어떤 씨앗이 마침내 발아하여 순식간에 자신의 영혼을 물들였음을 느끼고 있었다.
마교의 두 신마를 상대하면서 피부로 느꼈던 그들의 마기와 그 성정.
같은 마기라도 서로 다른 그 특질의 근원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금태하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두 신마와 같은 양태를 느꼈다.
그가 연성해온 무공, 암연소혼신공의 특징과 너무나 닮은 어떠한 영성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분명 마교가 이야기하는 ‘마성’과 똑 닮아있었다. 그리고 주화입마의 시간 동안 금태하는 마성에 잠식당하는 대신 청명의 지원으로 인해 마성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본다면 진도건처럼, 혹은 다른 신마들처럼.
‘그’는 스스로 암마(暗魔)라 하였다.
보다 근원적인 힘을 지배하는 자신의 권좌 앞에 무릎을 꿇으라 했다.
금태하의 성정상 청명같은 정파의 애송이가 대드는 걸 절대 가만두고 볼 위인이 아님에도 그가 청명이 곁에 머무르려고 하는 걸 굳이 고집스럽게 밀어내지 않는 건, 아직도 자신의 마성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청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암마를 수용할 수 없이 그저 혼돈에 빠져 먹혀버렸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건 완전히 수용했다는 자신감이 없어서일 것이다.
청명은 그 도호처럼 금태하가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어둠 속의 등불 같은 존재.
정과 마가 함께 하는, 보통의 시각으로 상상하기 힘든 기이한 조합을 이룬 노소(老少)는 그렇게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 * * *
정말 오랜만에 본 천산의 산줄기는 여전히 눈부시도록 희었다.
이렇게 반대편 산지에 올라 태양이 밝게 떠오른 청명한 날에 멀찍이 바라보면 흡사 신선경으로 가는 구름이 세상 끝에 모여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게 하는 천산의 풍경이 작게 보였다.
청의향을 떠난 지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유변과 사마월 두 사람은 청해와 신강의 경계를 이루는 산마루를 관통하는 산길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막을 건너기 위해 출발하기 전에 잠시 바위 아래 드리워진 그늘에 앉아 그렇게 천산을 바라보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지치진 않으셨습니까?”
오는 길 대부분은 말을 타고 오긴 했으나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산을 오르기 위해선 아무래도 걸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다 내공이 깊어서 이런 거로 지칠 리는 없겠으나 백 세를 훌쩍 넘긴 초고령인 유변이 구마진에게 내상을 입었던 게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으니 사마령으로서는 그를 걱정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구마진 녀석은 곧 빙청탑에 금제당하겠구나. 도착하면 녀석 얼굴이나 구경해야 쓰겄다.”
사마월이 걱정하는 이유를 유변도 잘 알기 때문에 괜스레 구마진이 처한 형벌을 언급하며 툴툴거렸다. 그리곤 사마월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괜히 예까지 나와서 맑은 차 한잔 마실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 게 아쉽구나.”
유변의 그 말에 사마월도 그와 함께 정자에 앉아 폭포 소리를 들으며 찻잔을 기울이던 정취가 떠올랐다.
꽤 오랫동안 누려왔던 그 평온한 일상은 그가 나타남으로써 변화가 일었으니 어쩌면 지금의 이 여정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강선, 그자가 나타나면서 대마의 어르신의 삶의 방향이 바뀌어 버렸어.’
사마월이 딱히 조강선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유변의 평온이 깨졌다는 건 그의 평온도 깨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후로 그는 매 순간순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태상교주님과 무슨 얘기를 나누실지는 생각하셨습니까?”
청의향을 떠난 지 닷새쯤 되었을 때도 사마월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유변의 대답은 ‘생각 중이다.’였었다.
유변은 바람에 흔들리는 긴 흰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실눈을 뜬 채 천산을 바라보았다. 내상을 입은 뒤로 주름진 얼굴에 감돌았던 사색(死色)이 이젠 많이 사라졌지만, 보름간 계속 외풍을 맞으면서 전보다 더 늙어 보였다.
“아직 고민 중이다.”
“그렇군요.”
별로 달라진 것 없는 대답에 사마월도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왠지 단 태상이 내게 이야깃거릴 먼저 던져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천마조사부터 태상교주까지 대마의 어르신의 덕을 보지 않은 분이 없으니 오랜만에 만나면 분명 크게 반겨주실 것입니다.”
“내 덕이라. 결국엔 각자의 실리를 위해 살다 만들어진 관계인 것을……. 자네도 날 존경하거나 할 필요 없네. 끌끌끌! 과해, 이 사람아.”
유변이 실소를 흘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마월도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하는 그 뒤를 따라나섰다.
‘대마의 어르신이 평소에도 자기 공치사에는 욕심이 없으셨지만, 지금 하신 말씀은 자기 객관화하는 경향이 더 강하게 들린다. ……두렵다. 이분의 뒤를 따라서 본산으로 되돌아가는 건 내 선택이었지만, 무엇을 마주할지 알 수가 없어서 두렵다.’
여전히 이주에서 보름 남짓한 남은 여정 속에서 사마월은 자신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빨리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속내를 쉬이 드러내지 않는 유변과 청의향에 나타남으로써 직접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는 교주 단지운, 그리고 교주 단지운과는 독립적인 구조로 은밀함을 영위하고 있는 태상교주 단원진까지.
어쩐지 폭풍의 한가운데로 노를 젓는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을 쉬이 지울 수 없었다.
* * * *
천마신공을 연성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천마의 마성을 이어받아 수용하였지만, 어느 정도 한계선에서 쉽사리 성취가 오르지 않아 고민이 짙었다.
어쩌면 정신적인 피로도가 심해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산 박격달봉 아래 숨겨진 용암공동에 들어와 시간 대부분을 천마동에서 보내고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으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햇빛조차 보지 못하고 있으니 검림에서 강정학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보다 답답함이 더욱 컸다.
“쯧쯧! 이젠 정신 집중을 아예 못하는군.”
날카롭게 질책하는 목소리에 양자성이 움찔 떨었다.
뒤를 돌아보니 단원진이 백포를 펄럭이면서 천마동 안으로 들어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마동은 용암공동에서부터 긴 통로를 지나 들어오면 아래로 크게 공간을 내놓은 동굴이었다. 벽면과 천장은 순수한 산의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인위적인 양강의 공력으로 지반을 누르면서 다진 듯한 흔적이 기이한 물결무늬로 남아있었다.
그런 지형적 특징 때문에 양자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도 천마동 입구의 단원진을 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송구합니다.”
사실 양자성의 경지는 본래 자신의 성취에 비교하면 대단히 향상되어 있었다.
단원진은 단순히 그에게 천마신공을 전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품고 있던 마성의 편린을 떼어 양자성에게 심어놓았다. 그로 인해 훨씬 빠르게 마성을 마주한 양자성은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내공의 성질을 완연한 마기의 그것으로 바꿔버렸고 공력의 증진도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편린 수준으로는 그가 기대한 만큼의 화학적 반응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런 폭발적인 증진도 초기 며칠 간의 과정에 그쳤을 뿐,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성장세가 더뎠으니 이 정도로는 다른 신마들과 비교하면 그 수준이 많이 모자라다 할 수 있었다.
“흐음…….”
단원진도 다른 일 때문에 양자성이 알아서 수련하도록 방치한 편이긴 했으나 기대치에 못 미치자 다른 판단을 내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도 큰 부작용도 없이 잘도 마성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검림의 내공 기반 때문이라 보긴 어려울 텐데……. 그동안 다른 녀석들 상대로 다 먹혔던 방법이 저놈에게서 끗발이 떨어지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군.’
단원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성취를 보자.”
단원진이 그 말과 함께 양자성이 선 곳으로 몸을 떨어뜨리자 양자성도 긴장이 바짝 올라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