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 제47장. 혼돈의 씨앗은 여전히 잠재하다 (2)
청명은 성내 주변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지나간 모양이군요.”
성내로 들어서자 사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성문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확인되었는데 격전이 끝난 이후, 장강을 지나던 자들이 백제성과 백제산의 피해를 목격하고 다녀갔다는 걸 의미했다.
격전을 치른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부서진 전각이나 시설, 성벽 등의 상태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부서진 파편들을 구석에 몰아놓는 등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새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듯 계속 머문다면 곧 관군의 감시하에 놓일 것이었다.
청명은 금태하의 앞에 서지 않고 옆이나 뒤편에서 다니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 싸움이라도 떠올리는 건가?’
여전히 여기에 다시 온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금태하라면 궁금한 것이 상당히 많을 것 같았다.
무당산이나 창천맹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또는 퇴각했던 구룡문 생존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전황의 말미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청명만이 알 수 있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물어볼 법도 한데 금태하는 그가 생각했던 인상과는 많이 벗어난 모습으로 침묵과 함께 걷기만 하고 있었다.
성내를 둘러보던 금태하는 성벽 위에 올라 그가 왔던 북쪽 외의 다른 방향도 살펴보았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 때쯤엔 석양도 어느덧 서쪽 산자락 끝에 걸려서 붉게 타올랐던 하늘도 점점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금태하는 다시 성내로 돌아와서는 북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명은 처음엔 그가 당시 전장 상황을 복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 따라다니면서 지켜본 결과 뭔가를 찾고자 했던 게 분명했다.
청명은 정파의 인물이다.
여기서 그가 궁금해하는 건 어째서 금태하가 구룡문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같은 편, 내 사람에 대한 안위를 걱정하고, 묻고,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이 그가 공감할 수 있는 타당한 사고방식이었다.
금태하가 북문을 나서고 나서 북동쪽이 아닌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자 청명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구룡문주님. 구룡문으로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전 창천단과 함께 구룡문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었고, 결국 제자이신 황사열 공을 포함한 그 생존하신 분들이 여기서 북동쪽으로 창천단의 보호를 받아 후퇴한 걸 알고 있습니다.”
“노부를 더는 구룡문주로 부르지 마라.”
금태하가 우뚝 멈춰서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청명은 적잖이 당황했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그 말에서 금태하가 마치 자신의 문파를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청명은 뭐라 묻고 싶어도 어떻게 물어야 좋을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말꼬리를 끌었다.
마치 그의 걱정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금태하가 돌아서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몸은 무림 최강이 되고 싶었다. 구룡문을 사파 최강, 무림 최강의 문파로 성장시키고 싶었어. 그것을 위해 내 무공의 성취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난 실패했다. 지금의 내 꼬락서니가 그 증거지. ……화경에 이르렀음에도 주화입마에 빠졌다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실패한 길이었단 걸 증명하는 꼴이지만, 네놈 손에 구제를 받은 지금 상황에서 노부가 할 일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의문에 대해 답해줄 자를 찾는 일뿐이다.”
“이렇게 사셨으니 구룡문으로 돌아가 다시 부흥을 이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클클클! 아니, 구룡문은 머지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금태하의 냉담한 말에 청명이 깜짝 놀랐다.
분명히 이 백제성 전투에서 구룡문의 피해는 매우 컸지만, 금태하가 이렇게 죽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구룡문이 무너지는 꼴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걸 금태하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게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금태하의 얼굴에 쓴웃음이 잠깐 흘렀다.
그걸 본 청명은 그가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걸 깨닫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사문, 자신의 제자에 대해 의식적으로 완벽하게 절연한 모습은 가히 상상도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어떻게 일문의 문주라는 자가 자신의 문파를 그렇게 버릴 수 있습니까? 사제지간의 연이라는 건 그토록 가벼운 것이었습니까?”
청명이 화가 나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금태하가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이 터졌다.
“크하하하! 누가 무당파 도사 나부랭이 아니랄까 봐 아주 고리타분한 소리를 잘도 늘어놓는구나. 쓸데없이 훈계할 생각이걸랑 입 다물어라. 네 건방을 참아주는 것도 여기까지이니.”
그 고압적인 태도와 협박성 발언이 진심임을 청명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정사 간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의 간극이 존재한다고 해도 지금 금태하의 태도는 인간의 도리라는 부분에서 그가 생각하기에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청명은 금태하를 살린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당신을 구해준 게 몹시 후회됩니다. 천하오절이란 명성도, 일대종사의 품위도 이토록 깃털처럼 가벼운 자는 처음 봅니다. 창천맹주도, 마교주도 당신을 우습게 알 것입니다.”
“닥쳐라!”
우르르르르-!
금태하가 노기를 드러내며 소리치자 백제성 일대 전체가 지진이 일어나듯 흔들렸다.
살기 짙은 투기와 소름 끼칠 정도로 어둠을 닮은 마기가 금태하로부터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병약하고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그 기세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였다.
그 두려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옥죄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청명의 정명한 눈빛은 흔들림 하나 없이 금태하를 쏘아보았다.
청명이 천무경을 언급한 것은 다른 어떤 말보다 강하게 금태하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른 건 그 아래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가 손을 들자 엄청난 기세로 마기가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었다.
금방이라도 손을 휘둘러 공력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그 어둠이 흐르는 눈빛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목에 칼을 들이미는 듯한 섬뜩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거두고 공력도 거두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기백에 휘날리던 바람도 가라앉아버리니 바짝 긴장했던 청명도 당혹스러운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금태하는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청명도 지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주제에 노부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
금태하가 쏘아붙이듯 말하며 그대로 돌아서서는 원래 가려 했던 북서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청명은 정사가 공존하는 창천맹 안에서 나름대로 사파인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알게 됐다고 생각했다. 맹주 천무경을 보면서 천하오절이라는 명성에 어울릴 만한 존경스러운 모습을 사파인도 갖출 수 있다고 느꼈다.
이런저런 견해의 차이나 이권 등이 정사를 갈등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중재자 아래서는 그런 이견을 좁힐 수 있을 만한 기반의 상식이나 공감하는 도리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작자가 천하오절로서의 무위와 명성을 거머쥘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친놈.’
평생 거친 언어를 써본 적 없는 청명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 말이 떠올랐다.
차마 입으로 뱉진 못했다.
혼란스럽도록 파도치는 머릿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금태하의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따라오느냐?”
그의 물음에 청명은 절로 자신의 두 발을 내려다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금태하를 쫓아갔는지 어느새 성문에서부터 꽤 멀리 따라 나온 상황이었다.
청명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본디 도문의 자비를 배운 제자라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구제한 중생이 끝까지 안위를 구가할 수 있는지 관심을 둬야 하는 법입니다.”
“자비? 하! 이 애송이가 건방지게 끝까지…….”
금태하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자 청명이 헛기침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원시천존. 흑사왕께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해줄 자를 찾는다고 하셨으니 과연 어디로 가는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청명은 금태하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금태하의 눈에도 청명이 그러했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를 봤나? 그래서, 노부를 따라오겠다고?”
“그렇습니다.”
“하!”
금태하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청명이 한 마디 더 얹었다.
“기왕 길을 가기로 하셨다면 끝은 보실 생각이시겠지요? 또 주화입마에 빠져 그 뜻마저 이루지 못하신다면 죽어서도 원통하기 그지없으실 테니 제 도움이 필요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애송아, 귀신에라도 홀린 게냐? 주화입마에라도 든 게냐?”
“원시천존의 가르침을 모시는 무당파의 도사로서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저 제 손으로 구해준 중생의 길이…….”
“선 넘지 마라.”
“원시천존.”
청명은 도호를 외면서도 금태하의 목소리에서 그가 노기를 꽤 가라앉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시시콜콜 말장난 치듯 대꾸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설마 주화입마 탈출을 돕다가 정말 자신이 영향이라도 받았는지 아주 잠깐 의심이 들기도 했다.
금태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는 주화입마를 겪으면서 몸 상태가 결코 최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동굴 속에서 손속을 겨뤄본바 청명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라면 청명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를 죽이기는커녕 쫓아낼 만한 기력은 없었다.
“……애송이, 노부를 따라오려거든 수발이나 들어라. 정파인을, 그것도 무당파 도사 놈을 곁에 두는 것조차 불쾌하기 짝이 없거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면 수발 드는 정도의 노인공경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
“소도가 궁금해하는 것을 답변해주신다면 밥상 수발 정도는 들어드리겠습니다.”
“뭐가 그리 궁금하더냐?”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사문과 제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는 그 선택의 발로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지요.”
“하아, 이 애송이 새끼가…….”
금태하가 골이 지끈거리자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청명의 고지식한 고집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금태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청명은 잠시 뒤를 돌아 백제성을 바라보며 다시 도호와 함께 죽은 자들의 넋을 달래었다. 그리고 금태하와 너무 가깝지는 않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신강 천산.”
그 말에 청명도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이역만리(異域萬里) 새외의 땅.
게다가 신강 천산이라 하면 천마신교의 본산이라 추정되는 곳이었다.
금태하는 어째서 그곳으로 향하려는 것일까?
“설마 주화입마의 원인에 마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청명은 물어보면서도 스스로 허황된 말이라는 걸 인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