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 제47장. 혼돈의 씨앗은 여전히 잠재하다 (1)
어둠 속에 어둠이 깃든다.
단순히 시각적인 효과였지만, 신외지경에 드러내는 기운 자체만으로도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성질을 가졌으니 한순간 동굴 안이 완전한 암흑으로 뒤덮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청명은 과감하게 눈을 감아 시각을 차단하고 기감을 포함한 나머지 감각으로 촉각을 곤두세웠다.
짓누르는 듯한 어둠의 압력.
위협적인 기세가 그에게로 쏠리는 순간, 청명도 두 손을 펼쳐 공력을 전개한다.
태화무극권 무위나이(無爲挪移).
그것은 공간을 아우르는 무한의 소용돌이.
금태하가 일으킨 모든 기운을 담아낼 수는 없었으나 오직 그에게 쇄도하는 기운의 흐름에만 집중하여 그 심원을 잡아챈다.
파도처럼 쏟아지는 마기의 기세 속에 청명의 두 손이 무한의 호를 그리며 다시 명치 앞에 모인다. 공격의 의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금태하의 마기는 그렇게 청명의 두 손안에서 격렬하게 요동친다.
감히 그것을 담아두고 단 1초도 견디기 어려웠다.
“크학!”
청명이 크게 신음 섞인 호흡을 토해내며 두 손을 앞으로 떨치자 갇혔던 마기가 날뛰면서 동굴 사방과 금태하를 향해 퍼부어졌다.
콰콰콰쾅!
정말 앞뒤 재지 않고 일단 펼쳐 본 것인데 불완전하긴 하나 기운의 흐름을 틀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청명의 얼굴에 잠깐이나마 환희가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으니 폭발을 뚫고 나온 금태하의 손아귀가 그의 얼굴을 움켜쥐곤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쿵!
“큭!”
암벽이 박살 날 정도로 머리가 처박혔지만, 호체진기 덕에 두부내상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닥쳐오는 금태하의 쌍장에 달리 절묘한 수를 낼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퍼버벅!
다급하게 권각으로 몸통을 가렸지만, 그의 방어는 여지없이 해체당하며 금태하의 장권이 흉복부를 두들겼다.
그 공격을 얻어맞는 순간, 청명은 생각보다 충격이 작아 당황스러웠다.
손속에 사정을 둔다는 것은 드디어 금태하가 정신을 차렸다는 의미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애송이가 건방지게…….”
불쾌함이 가득한 칼칼하고 무거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금태하가 뒤로 빠지는데 그가 있던 자리에 사방에 무너졌던 바위 파편들이 공중에 떠오르는 광경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도 청명의 눈에 또렷이 보였다.
그것들이 일제히 청명을 노리고 날아갔다.
쿠쿠쿠쿵……!
동굴 속 오르막에 벽면을 짚어가며 올라가자 안으로 스며들던 빛의 양도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손톱만 한 양의 빛으로도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경지였지만, 그렇다고 어둠의 그늘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 속 존재하는 평범한 동굴을 빠져나오기 위해 걸어 올라가는 길에 불과했다. 그러나 금태하는 그 길 속에서 직전까지 자신을 휘감고 옥죄던 무한의 암흑 속에서 빠져나온 기분을 다시 되짚는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불쾌함으로 한측을 장식한 건 무한의 암흑 속에 보았던 한줄기 서광이 ‘웬 무당파의 애송이’의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동굴 내로 스며들어오는 빛이 구불구불한 내부 지형 때문에 한동안은 더 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모퉁이를 돌자 다음 모퉁이로 더 많은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빛을 따라 계속 걸어 올라가니 마침내 동굴의 초입부에 이르렀다.
저벅저벅…….
어둠 속에 꽤 오래 있어서였는지 강렬한 눈부심을 느끼고 손을 들어 얼굴을 잠깐 가렸다. 쏟아지는 햇살이 머리 위 수풀에 대부분 가려져 많은 그림자를 제공했음에도 그 정도의 자극이었다.
햇살의 온기가 손바닥에서 얼굴로 그리고 온몸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근골과 신경을 두들기는 통증도 그 온기에 반응해 일제히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금태하는 완전히 동굴 입구 밖으로 나와 온몸으로 햇살을 맞았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살짝 젖히면서 몸을 늘리자 고통이 더욱 강해졌지만, 덕분에 살아있음을 환기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햇살 아래 비친 그의 모습은 매우 엉망이었다.
광혈신마와 염황신마를 동시에 상대한 여파를 고스란히 몸에 입고 있었다.
넝마가 되어버린 고급 장포, 여기저기 생긴 화상과 피멍들, 먹지도 못한 채 내상에 신음하면서 상당히 말라버린 모습까지.
저벅저벅……!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의 것이었다.
호되게 얻어맞은 탓에 청명의 몰골도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뒷모습만 봐도 엉망인 금태하보다는 조금 찢어진 도포와 흙먼지를 진하게 뒤집어서 더러워진 정도에 불과했다.
“원시천존,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청명이 도호를 외며 금태하를 걱정했다.
말을 하면서도 되돌아올 말이 좋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건방진 것! 감히 나에게 개입하다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금태하의 목소리에 청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제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구룡문주께서는 주화입마로 목숨은커녕 이성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금태하가 빙글 돌아서자 넝마가 된 장포 자락과 산발한 백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 본 청명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금태하의 좋지 않은 몰골은 눈이 가지 않았다. 핏발 서듯 검게 드러난 갈라짐이 이마를 타고 아래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탓인지 눈에 짙은 어둠이 흐르는 듯하여 보기에 무척 괴이했다.
금태하가 코웃음을 쳤다.
“흥! 차라리 그랬다면 남은 미련을 털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말속에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금태하의 변화에 더 주목이 갔다.
“아직 주화입마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입니까?”
분명 눈으로 보기에 심상치 않았으니 청명도 다시 불안감이 들어 물어보았다.
금태하는 먼 산 보듯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서 잠시 호흡했다.
뭔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있는 건가?
그의 입술이 반쯤 떼어졌다 붙었다 반복하며 주저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윽고 조심스럽게 토로하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짙은 후회가 묻어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입마(入魔). ……이젠 완연히 마경에 들어서 버렸다. 그것을 피하고 싶었음에도.”
꿀꺽!
청명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그의 기운이 마기처럼 느껴졌던 것인가? 그런데 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후회란 대체…….’
금태하가 내리깔아보듯 청명을 쳐다보았다.
순수함을 드러낸 인상에 눈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깊은 현묘함을 품고 있었다. 그의 주화입마 상태에 개입해 기가 도통했으므로 금태하도 어렵지 않게 그가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무당파의 도가 느껴지는군. ……네가 청명이냐?”
“……그렇습니다.”
“무당이 봉문 뒤에 숨어 잘도 칼을 갈았군.”
청명의 대단한 재능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이다.
일찍이 무당파가 광혈종의 습격을 받은 구룡문을 도울 적에 단연 돋보였던 소요자란 이름은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때 무당파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결과 청명이라는 다음 세대를 이을 걸출한 재능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화경의 경계선에 발을 반쯤 걸친 아직 설익은 수준이긴 했지만, 자연의 이치와 기운을 관조하고 다루는 본능적인 감각이 충분히 열려있는 상태였다.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정종의 무당파 내공심법만으로는 사파 최강 암연소혼신공의 특질을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청명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금태하가 입을 열었다.
“왜 날 구했느냐?”
“원시천존. 구룡문주께선 무림의 가장 큰 전력 중 한 분이신데, 어찌 두고 본단 말입니까?”
“큭큭큭! 우습구나. 정파에 대한 나의 적의는 지난 역사 위에 쌓인 것이거늘. 내게 죽을 뻔 해놓고도 그런 소리를 뻔뻔하게 하다니.”
“결과적으로 죽지 않았지요. 오히려 손속에 사정을 두신 건 구룡문주시고요.”
“날 농락하느냐?”
“고맙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교라는 무림 공적 앞에서 경험하지도 못했던 지난한 오랜 은원을 내세워 적대하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안이한 생각이야말로 이 냉혹한 무림에서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이니라.”
“하지만,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원시천존!”
“클클클, 이 건방진 애송이가…….”
금태하로부터 일순간 투기가 일어나자 청명이 어깨를 움찔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급히 방어하려는 자세를 취하려는데 그를 압박했던 투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청명은 재차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면서 경계를 마저 풀지 않았다.
그런 청명을 보던 금태하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는 잠시 하늘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구룡문주님, 어디 가십니까?”
청명의 물음에 금태하가 걸음을 잠깐 멈추고 흘끔 돌아보았다.
“백제성.”
“예?”
청명이 깜짝 놀랐다.
구룡문의 패배가 새겨진 곳.
그조차 금태하를 돕느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는데, 적이 남아있을 수도 있는 곳에 다시 가겠다는 금태하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금태하가 다시 걸어가자 청명이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동굴이 있는 위치에서 가까운 산길을 찾아 산등성이 방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공 한번 펼치지 않았기에 산마루에 이를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려서 태양도 서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
높은 곳에서 창창한 하늘과 산바람을 맞으며 사방을 차례로 살피던 두 사람의 시선에 남쪽의 백제산과 성터가 눈에 들어왔다.
염황종으로 인해 성채와 주변 산림의 일부가 불길로 잿빛이 되어버린 흔적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다.
금태하는 그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별 고민하지 않고 백제성을 시야에 둔 채 바로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는 청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꾸준한 속도로 걷는 것임에도 확실히 일반인들의 등산 속도보다 발걸음이 빨라서 금방 백제성 가까이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경공을 펼치지 않은 만큼의 시간을 보내면서 하늘은 서서히 석양에 의해 조금씩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원시천존…….”
청명이 침통한 음성으로 도호를 외웠다.
백제성에 가까워짐에 따라 수습되지 못한 시체들도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격전의 날에 내렸던 폭우로 인해 대부분 젖은 진흙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한두 구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성에 가까워질수록 시체 숫자도 많아져 도저히 눈뜨고 가만히 지나치기 어려웠다.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청명은 개의치 않고 도호를 외는 것으로 사망한 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비록 서슬 퍼런 칼날 위에 서서 죽음과 가까이 사는 것이 강호무림의 숙명이라지만, 그래도 상호 사후 명복을 비는 것 정도의 인간성은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반 생각이었다.
청명과 달리 금태하는 무심한 발걸음으로 다수의 죽음이 자리한 현장을 그대로 지나쳤다.
분명 구룡문 각 계파의 무복을 입은 사체들도 보였지만, 그는 거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청명과 거리가 벌어지면서 먼저 백제성의 북쪽 성벽에 이르렀다.
금태하가 지금까지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경공을 펼치며 가까운 감시탑 지붕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격전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내의 풍경을 담은 두 눈에서 그의 일생 단 한 번도 비치지 않던 회한이 흘렀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다가 석양에 하늘이 더욱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아래로 뛰어내렸다.
때마침 청명도 성내로 들어오면서 탑에서 내려오는 금태하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