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 제46장. 사투(死鬪)의 종착 (5)
청성파의 참극은 사천 무림을 비롯한 민관 모두에 큰 비보로 알려졌다.
성도의 관군이 동원되어 시신들을 수습하기 시작이었으며 서쪽에 희생자들을 위한 공동의 묘역을 꾸려 제를 올리기로 했다. 청성파와 연이 있던 무림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소식을 듣고 일을 돕고 참배도 올리기 위해 모여들었으니 산문부터 줄지어 오르는 인파의 모습은 당분간 흔한 광경이 될 것처럼 보였다.
무너진 도관과 엉망이 된 경내 시설물들은 수리보수를 위하여 당분간 관이 직접 관리를 하기로 하였다.
비보를 전해 듣고 모여든 청성파 제자들도 있었는데 그 수가 스무 명 남짓했다.
역시나 청성칠자가 모두 참사를 피하지 못함으로써 명망 있는 생존자는 남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마다 책임을 지고 보통의 도관으로서 꾸리기로 중지(中智)를 모았다.
당문과 아미파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아미파가 인적 피해가 있었으나 그래도 일찍 당혁수 등의 도움을 받아 치명적인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반대로 성도성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대대적인 공습을 맞닥뜨려야 했던 당문은 인적, 물적 피해 모두 막심했다.
내원의 기관진은 아주 오래전부터 구축해와 누적된 보수 비용만 천문학적인 금액이 투입된 시설이었는데 일부가 파괴되면서 대대적인 정비가 요구됐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고민을 당문 일가가 하고 있을 때, 청성산에서 돌아온 당혁수가 단호하게 결정하였다.
“내원의 기관을 해체하고 불필요한 장벽들은 허물겠다.”
골자는 이러했다.
당문 내원의 기관진을 비롯한 당성기곡관의 역할은 독혈경을 탐하는 사혈주의 공세에 방어하기 위함이었는데, 가장 강적이었던 사혈신마 독수흉인 서문질이 죽었으니 이젠 역할을 다했다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변화와 결정이었기에 일부가 의뭉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결국 그 의도에 동의하면서 해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혁수를 당황케 하는 일도 있었는데, 성도 내 상황과 민심을 두루 살피기 위해 순찰을 나섰던 당주형이 돌아와 한 말 때문이었다.
“서문질의 시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당혁수는 곧장 당주형과 함께 서문질을 죽였던 남문 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그 장소에 다다른 당혁수는 당주형이 한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너희가 제독을 했느냐?”
“아닙니다.”
당혁수는 서문질을 쓰러뜨렸을 때, 그의 독혈이 육신을 부패시키던 걸 똑똑히 보았었다. 당문의 위험 때문에 직접 제독할 생각은 못 하고 일들이 모두 마무리된 후에 돌아와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제독이 말끔하게 되었는지 악취조차 거의 나지 않았다.
신경이 더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이미 육신의 살가죽이나 근육, 골격이 녹아내릴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는데 이미 지면으로 흘러내려 시간이 지나 말라버린 혈흔들 외엔 그래도 아직 시체 안에 머물러있어야 할 혈기가 눈에 띄지 않았다.
뭔가에 의해 남은 사혈을 모두 빨아냄으로써 반쯤 무너진 육신의 외형이 더는 썩지 않은 채 강시처럼 굳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시신을 건드렸군.”
“강시라도 만들려고 했던 걸까요?”
천혈강시라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경험해버린 당주형이 우려 섞인 질문을 던졌다.
당혁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강시라면 시신을 가져갔겠지. ……아무래도 서문질의 독혈을 노린 것 같구나.”
“독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의 피가 가진 맹독성은 죽는 순간에 곧바로 육신을 무너뜨릴 정도로 지독한 부패독이었어.”
“서문질이 정녕 독마신의 경지를 이루었단 말입니까?”
“……아니, 독마신을 이루었다면 내게 죽기 직전 독혈경의 존재를 묻지 않았겠지.”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당혁수로서도 모든 걸 명확하게 설명할 만큼 아는 게 없었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잠시 서문질의 시신을 바라보던 그는 당주형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런 꼴로 대로변에 두는 게 보기 좋은 일은 아니니 잘 수습해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도록 해라.”
“꼭 그래야 합니까?”
당문의 혈족들과 제자들의 죽음들을 목도한 마당에 그에게 분노를 거두라 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라 당혁수도 그를 토닥여주면서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강호무림에서 갈등이란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고, 죽음이란 것도 늘상 곁에 두는 벗처럼 의연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서문질이나 사혈주가 품은 업이란 본디 당문과 오랜 은원에 따른 것인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흘러가는 바람처럼 보내는 것이 훗날을 위해 더 나은 일이 될 것이다. 보현보살의 덕(德)이 자비의 실천에 있을 진데 아미산에서 공부한 네가 그 가르침을 너무 쉽게 져버리는 것 아니냐?”
“……수양이 짧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되, 저자의 죄는 이루 말할 수도 없으니 비석은 세우지 않도록 하여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도록 해라.”
“예, 그것으로 제 위로를 대신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근처에 있던 군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시신의 처리를 약속한 후에 당문으로 돌아왔다.
당주형이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제자 몇 명을 추리는 사이 당혁수는 외원에 넓게 펼쳐진 천막과 평상 사이를 걸으면서 내원에 이르렀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높게 올린 담장들과 전각들이 만든 그늘이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곧 기관들을 해제하고 위험한 화약들을 제거하는 작업 그리고 불필요한 담장을 허무는 작업이 몇 개월간 이어질 터였다.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가주 직을 이어받은 뒤 언젠가는 이 그늘을 치워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결국 그 뜻을 이루게 되었지만, 그걸 위해 쌓아 올린 희생이 너무 크구나.’
* * * *
사천에 거대한 마의 태풍이 휘몰아쳤던 날.
그로부터 나흘 전, 광혈종과 염황종을 상대로 구룡문이 격전을 벌였던 백제성은 여전히 많은 시신을 쌓아둔 폐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때마침 백제성에 잠시 정박했던 상단이 그 참상을 발견하고는 시신들을 한데 모아 화장하는 등 역사적인 명소를 예우하는 행동들이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난 후엔 지나간 자리에서 새싹이 돋으며 생기가 도는 법이다.
무림인들의 강 대 강 격돌로 인해 여러 곳이 파괴된 백제성은 그 상단에 의해 곧 관부에도 연결되어 보수작업을 위한 계획이 정비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여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도 있었다.
쿠쿠쿠쿠……!
백제성에서 십여 리 넘게 떨어진 북쪽 깊은 산림에서 굉음이 섞인 진동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까마귀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고 근처의 먹이를 찾던 사슴들도 놀라 도망갔다.
우거진 수풀에 가려져 밖에선 잘 보이지 않는 메마른 동굴.
지하로 더 내려갈 정도로 길게 이어진 동굴의 끝에는 빛이 거의 닿지 않아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넓은 공간이 있었다.
산짐승이 숨어 살 법한 지형이지만, 그곳에 있는 건 산짐승 대신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구분이 쉽지 않으나 한 사람은 상체를 드러낸 채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백발의 노인이었고 그 뒤엔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노인의 등에 두 손을 대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쿠쿠쿠쿠……!
또다시 굉음을 동반한 진동이 동굴을 흔들었다.
동굴 주변부만 퍼질 정도이니 지진이라 부를 수 없는 수준이지만, 느닷없는 흔들림이라도 진원이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그 진원의 자리에 바로 이 두 사람이 있었다.
백발노인은 바로 백제성 전투에서 패퇴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천하오절 중 한 사람인 흑사왕 금태하이며, 청년은 구룡문의 생존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창천단의 일원으로서 왔던 청명이었다.
백제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십여 리.
멀다면 먼 거리지만, 가깝다면 또 가까운 거리였다.
지형적으로 심산계곡 심부에 위치한 동굴이었으므로 광혈종과 염황종의 눈을 피한 게 운이 좋다고 할 만한 위치였다. 금태하의 생존 여부에 관심이 많았던 천마신교 입장에선 등잔 밑이 어두웠음이라.
사파의 노회한 절대고수와 정파의 유망한 후기지수, 그 사상의 차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청명이 금태하를 돕고 있는 듯한 이 구도는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으!”
아주 미약한 신음이 금태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쿠쿠쿠……!
이어 다시 한번 진동이 그를 중심으로부터 퍼져나가 동굴을 흔들었다.
이번 진동은 달랐다.
부분적으로 거칠게 울렸던 전의 진동과 다르게 낮고 깊게, 그리고 좀 더 길게 이어지고 있어 심상치 않았다.
두두두두두……!
급격히 확산하는 떨림이 동굴을 뒤흔든다.
어둠 속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금태하와 청명의 얼굴 또한 일그러져 있어서 어떠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꽝!
“큭!”
금태하로부터 청명이 튕겨 나가며 벽에 처박혔다. 워낙 세게 부딪혀서 그런 지는 몰라도 입가로 피를 흘렸고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신음을 삼켰다.
청명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어둠 속 희미한 윤곽들을 간신히 시야에 담았다.
곧 태극신공의 웅혼한 내공이 전신에 퍼졌다.
동굴 속에 스며든 미미한 빛 한 점을 시신경으로 한껏 받아들이면서 동굴 내 모습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금태하의 모습을 보았다.
일순 오싹한 느낌이 등을 쓸어올리며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해낸 순간, 그가 있던 자리로 금태하의 신형이 짓쳐 들며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꽝!
암벽의 파편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처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금태하가 그 돌 먼지들을 뚫고 청명을 향해 주먹을 연속으로 내질렀다.
청명이 두 팔을 펼쳐 적극적으로 태극권을 펼쳤다.
예측하기 힘든 곡선을 타고 물처럼 흐르는 청명의 투로는 금태하의 타격을 차단하면서 그의 의도를 흩트려 놓았다. 하지만, 공격이 보통 억센 게 아니라 청명도 간신히 방어하는 수준에서 그칠 뿐이지 계속해서 구석에 몰리는 느낌 속에 필사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꽝!
금태하의 발이 땅을 굴렀다.
그러자 엄청난 경력이 지면으로부터 솟구치면서 청명이 큰 충격과 함께 공중에 붕 떠올랐다. 공중에서 몸이 반쯤 누울 정도로 중심을 잃었으니 하체를 통해 지력(地力)을 받아야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태극권도 금태하의 억압 앞에선 무용지물이게 되었다.
콰쾅!
강력한 경력을 동반한 장력이 퍼부어졌다.
“큭!”
청명이 신음과 함께 다시 한번 벽에 처박혔다가 튕겨 나왔다. 어느새 품으로 파고드는 금태하를 향해 퇴법을 내지르며 다시 틈을 만들려고 했다.
텁!
하지만, 그것조차 이미 앞서 예측한 듯 금태하는 날아드는 청명의 다리를 그대로 낚아채 버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휘둘러 뒤쪽의 벽면으로 던져버렸다.
쿵!
우르르…….
벌써 세 번째 처박혔다. 하지만, 떨어지는 돌무더기를 뒤집어쓰는 것도 개의치 않고 청명이 서둘러 일어나 자세를 취해야만 했던 건 금태하가 엄청난 투기와 함께 두 손안에 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청명이 경계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그 기의 성질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완연한 마(魔)를 품은 그 기운.
어째서 금태하가 마기를 품게 되었는지 그 영문을 알 도리는 없지만, 당장 청명에게 중요한 건 이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