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 제46장. 사투(死鬪)의 종착 (4)
* * * *
청성산 북쪽 능선 끝자락의 어딘가.
후아앙-!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들로 인해 자리에서 떠밀린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천도환위의 술(天道換位之術).
위상역전술이 환마대능력으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불가사의한 환술이라면, 천도환위의 술은 둘 이상의 술자를 포함한 위상공진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공간 이동시키는 비술(祕術)이었다. 오직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환도종 내에서도 환도신마 선우도와 오방환마 외엔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것을 준비시켰다는 것은 선우도가 그 순간을 얼마나 위험하게 느꼈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선우도에게 붙들린 채였던 단지운이 급히 좌우를 돌아보는 데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커헉!”
허룡과 영무가 모두 목덜미에서 피를 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
분명 마지막에 눈에 비친 섬광은 진도건이 날린 검기가 분명했다.
급히 공력을 일으켜 마기의 방벽을 선우도의 등 뒤에 펼쳐냈지만, 그 범위가 두 사람에게는 닿지 않은 것이다. 비작은 운이 좋게도 선우도를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단지운의 덕을 볼 수 있었다.
“천마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선우도도 상황을 깨닫고 버럭 소리쳤다.
워낙 급히 준비한 터라 환도를 충분히 연장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경공을 펼친다고 해도 당혁수와 안효철의 경공에 따라잡힐 것 같았다.
대략 가늠해본 정도에 불과했지만, 천혈강시가 죽은 시점에서 두 사람이 청성산에 나타날 때까지 그 시간 차이는 그가 예상한 수준보다 빠른 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불길한 예측들은 아끼는 수하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환마인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에서 광휘가 흘렀다.
이것이 생애 마지막 펼칠 환도술이었음을 영무와 허룡 모두 알고 있었는지 그들의 눈빛엔 체념이, 피를 머금고 악다문 입술에선 결의가 느껴졌다.
후아아앙!
눈앞이 광휘에 휩싸이며 주변 공간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다시 광휘가 사라지면서 천도환위의 술에 의해 다른 공간에서 나타난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발아래 광활히 펼쳐진 산림과 북쪽 가까운 지점에 보이는 호수로 착각할 만한 거대한 강이었다.
그들은 공중에 나타나 그대로 낙하하는 중이었다.
‘저긴 도강언(都江堰)의 민강인가……?’
선우도가 북쪽을 가늠해 살피며 생각했다.
진(秦) 소양왕(昭襄王) 시기에 촉의 태수로 임명된 이빙(李冰)의 주도로 수리공사가 이뤄진 지역이 바로 도강언이었다.
그것으로 계산해보았을 때, 천도환위의 술로 이동한 거리가 30여 리가 넘어 개인의 기감을 벗어나기 충분하다 여겨졌다. 이 정도면 단지운이라도 파악하기 힘들 만한 거리였기에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듯했다.
“놔라.”
단지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선우도를 가볍게 밀치며 몸을 떼었다.
푸스스스!
곧 산림의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을 뚫고 내려와 마침내 모두가 지면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니, 허룡과 영무만이 목에서 쏟아내는 출혈을 막지 못하여 힘없이 무릎을 꿇고 간신히 숨을 헐떡일 지경이었다.
“끄윽……!”
“크륵, 과……광명… 대……처…… 언!”
그나마 목젖까지 베어지지 않아 피 끓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말을 잇던 영무의 움직임이 뚝 끊어졌다.
그 모습을 찌푸린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단지운이 입을 열었다.
“그만 보내주어라.”
선우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주검이 되어버린 영무를 안아 들어 허룡의 곁으로 갔다. 눈물을 지으며 바들바들 떠는 허룡을 잠시 안쓰럽게 쳐다보던 선우도가 단도를 뽑아 목을 확실히 그었다.
허룡이 숨을 거두자 선우도는 두 사람의 옷 앞섬을 풀어헤쳤다. 바깥으로 드러난 그들의 명치 부근엔 보랏빛을 머금은 결정 같은 것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결정은 바로 이들에게 형성된 마정이었다.
몸에 새겨진 문신은 바로 이 마정을 중심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사지로 뻗어있는 형상이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달라서 그 역할이나 능력이 상이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우도는 두 손을 두 사람의 마정 위에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집중하자 손등과 팔의 문신에서 희미한 광휘가 흐르면서 마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환도신마 선우도는 환도마종의 종주이자 모든 환마(幻魔)의 태반(胎盤) 같은 존재.
같은 마도의 마정을 거둘 수 있는 건 오직 환마뿐이었다.
허룡과 영무의 명치에 자리한 마정에서 기운들이 넘실거리며 저항하듯 요동쳤으나 이내 점점 선우도의 두 손을 통해 빨려 들어갔다. 그가 일을 마치고 손을 거두자 마정이 있던 자리엔 일그러진 피부와 파괴된 근골 조직의 끔찍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단지운이 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황은?”
“쫓아올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비작은 작안술로 청성파 도관 근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을 네 사람의 기척이 아직 거기에 머물면서 추격을 피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뒤따랐다. 하지만, 작안술을 해제하고 단지운의 표정을 보았을 때, 그도 표정에 조심하며 시선을 무겁게 내렸다.
결과론적으로 싸움에서 패해 도망간 꼴이 되었으니 자존심에 상처가 생긴 단지운의 분노는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단지운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기의 흐름에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최초 싸움이 벌어지기 전이라면 기꺼이 네 사람을 동시에 상대할 것이라고 호기를 부렸을 수도 있었다. 스스로 한계가 어디인지 부딪치고 싶은 용기와 그에 어울리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당혁수나 안효철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벅찰 거라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혈마.’
무엇보다 아쉬운 건 결국 혈마의 진의가 무엇인지, 그 근원이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진도건의 목숨을 끊어두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 같은 우려도 있었다.
그런 본래의 의도에 따른 맥락과 달리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격전 속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경험했다.
그 생사의 간극 속에서 치솟는 분노로 찰나 의식이 미약해지는 때가 있었다. 이런 증상이 원래도 있었지만, 이만큼 한 싸움에서 자주 발생한 적이 없었기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거대한 힘이 썰물처럼 휩쓸고 빠져나간 그 여파가 주는 단상이란,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의문이 한겹 한겹 쌓이고 있었다.
‘오늘의 이 수치는 반드시 배로 갚아 주겠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은연중 흘러나오는 살기에 선우도와 비작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괜찮으십니까?”
선우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단지운이 그를 힐끔 보았다가 남쪽 멀리 보이는 청성산 정상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멀리까지 떠나온 이상 미련을 남기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가자.”
단지운이 돌아서서 북쪽의 민강 도강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선우도와 비작이 그 뒤를 따랐다. 비작이 허무하게 죽은 허룡과 영무의 시신을 흘끔 돌아보며 안타까워했지만, 백기린조차 청성산과 가까운 평야에서 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은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 * * *
3년 전의 그때보다 더 거대하고 강력한 태풍이 사천 지역, 특히 사천삼정을 중심으로 잔인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당문과 아미파는 당장 전날의 전력과 비교하면 모두 5할에 가까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청성파는 말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그나마 남은 명맥이란, 사천 각지에 퍼져있는 아주 소수의 명성 낮은 제자들뿐이니 그들이 곧 닥쳐올 비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창천맹과 제갈무문은 사천무림의 위기를 예상하고 지원을 계획했으나 천마신교 교주 천마 단지운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을 거라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치명적인 변수였다.
사천삼정의 한 축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대가는 두고두고 사천무림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청성파 정상에서 벌어진 그 참극과 절대고수들 간의 격전이 전쟁의 끝은 아니었다.
정상에서의 사단이 결말지어졌을 때, 일다경쯤 뒤에 인근에 도착한 영은성과 최현걸 그리고 중천은 단지운과 선우도 등이 후퇴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환도종 마인과 충돌했다.
그들의 환술과 환진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영은성과 최현걸이 이미 경험이 있었고 중천 낭인들의 무공도 뛰어나 쉬이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현장에 당도한 당혁수와 안효철로 인해 환도종 마교도 대부분이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그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영은성과 최현걸도 진도건과 천서은을 만날 수 있었다.
당혁수는 ‘만천화우 허무위락경’의 기법을 응용하여 무형사를 사침(絲針)으로 삼아서 진도건의 뒤틀린 기혈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의 의술이 매우 뛰어났으니 다행스럽게 진도건도 혼절 상태에서 깨어나 영은성과 최현걸을 서서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진된 기력을 당장 회복할 도리는 없었으니 당혁수는 족히 한 달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대형, 고생하셨소.”
“고생은 저 청년들이 했지.”
서충이 격려를 위해 다가왔지만, 안효철은 진도건과 천서은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공을 돌렸다.
서충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광혈신마 상대할 때, 대형에게 일격을 때리고 떠난 그자가 천마신교의 교주였을 줄이야. 저들이 살아남은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마교주, 엄청 강하다며?”
“아아, 단신으론 절대 이길 수 없다. 저들이 가한 누적된 피해가 마교주에게 없었다면 아마 나나 당가주도 무사치 못했을 거야.”
“역시 희망은 파천무봉 천무경뿐인가?”
“글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안효철의 태세에 서충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에게 안효철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중천의 대형이라면 천무경은 신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말은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어쩌면 진도건 저자가 마교를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일 지도 모르겠다.”
“헤엑?”
더더욱 믿을 수 없다는 듯 기겁하는 서충의 반응은 안효철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안효철은 잠시 오른손을 들어 내려다보았다. 천자철갑으로 감싸져 이제는 완전히 피부처럼 느껴지는 검은 강철의 손은 겉보기엔 몰라도 적어도 그의 시선과 그 속은 끔찍한 고통에 얼룩져 있었다.
‘이 천자철갑에 버티기 위한 힘까지 쏟아부었다면 과연 파마격으로 마교주를 죽일 수 있었을까?’
잠시 종전의 격돌을 떠올렸으나 이내 미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털어내었다.
다시 진도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다른 어느 때보다 좀 더 각별하게 변해있었다.
마공을 익힌 자, 마기를 품은 자.
모두가 적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딱 한 명의 아군이 바로 저기에 있었다.
마교주를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진도건이라면, 어쩌면 그의 고통을 덜어낼 방법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조심스레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