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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53화 (253/432)

253화 - 제46장. 사투(死鬪)의 종착 (3)

측후방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그들과 달리 진도건은 냉정한 눈으로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조화였는지 무방비로 마비된 듯 섰던 단지운이 안효철에게 일격을 얻어맞는 순간, 그 암안이 다시 개안하는 것을 보았다.

단지운이 뿜어낸 각혈의 양이 진도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놓지 않는 이유였다.

뒤로 밀려 날아가던 단지운의 신형이 얼마 가지 않고 허공에 우뚝 섰다.

그 자체만으로도 당혁수나 안효철이나 경악을 금치 못할 진데 분노에 가득 차 악귀 같은 얼굴로 서자 두 화경의 고수조차 공포가 엄습해왔다.

“다 죽여주마!”

살의에 가득 찬 외침.

두 팔을 활짝 펼치는 순간, 당혁수와 안효철은 사위가 어둠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태양은 아직 서산에 걸쳐 황혼을 뿜어내는데 어둠 자체가 뿜어내는 음습한 기분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일찍이 진도건도 경험했던 마천경.

이번에는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으려는지 단지운이 펼쳤던 손을 앞으로 가져가는 순간, 당혁수와 안효철뿐만 아니라 진도건에게까지 천지사방에 강기로 이뤄진 칠흑의 소용돌이 수십 개가 가득 휘몰아쳤다.

천마신공 파황멸뢰옥이었다.

마치 천하의 모든 게 발아래 있다는 양 그 엄청난 마기의 파도에 당혁수와 안효철 모두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 아래 이러한 신위를 보이는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재앙과도 같은 그 공세를 막아내려는 당혁수와 안효철이었지만, 이미 기력이 다한 진도건은 탈출구가 없어 쓴웃음으로 죽음을 각오한다.

그 순간, 오감을 공포로 몰아세웠던 천지간 마기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씻은 듯 사라졌다.

마천경도 사라졌다.

“크아아악!”

단지운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악다문 입으로 비명을 토해냈다.

그를 중심으로 퍼지는 혈무 속에서 진도건도 똑똑히 보았다.

그의 검격이 만들어냈던 모든 검상이 다시 입을 벌리며 피를 뿜어내는 모습을.

단지운이 마천경을 펼쳐낸 순간, 알게 모르게 그의 몸에 침투하고 있던 혈마기가 함께 반응하면서 상처들을 다시 벌린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맥으로 미치는 기혈의 운로(運路)까지 탐식하며 끊어놓으니 그 영향이 결코 적지 않았다.

온몸에 끔찍한 검상과 더불어 피 칠갑을 한 채 비틀거리는 단지운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낭패스러웠다.

“크하하하!”

실제라고 생각할 정도의 한줄기 환청(幻聽)이 머릿속을 스쳤다.

갑작스레 체내 균형이 무너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단지운은 그 환청이 혈마의 것임을 깨달았다.

단지운은 급히 내력을 끌어올렸지만, 이내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큭, 힘이……!”

내공이 뜻대로 뻗어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강력한 천마신공의 공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없다는 건 곧 위기를 의미했다.

퉁!

안효철의 신형이 단지운에게 쇄도했다. 그가 단지운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 절호의 기회가 다시 올 거라고 기대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활처럼 휘어진 허리에서 전해진 탄력이 전력을 쏟아붓는 파마격으로 이어지며 단지운을 향해 쏘아졌다.

이런 상태를 한번 겪어보지 못했던 단지운의 얼굴에 처음으로 겁에 질린 표정이 떠올르니 쇄도하는 안효철의 동공에 그 모습이 새겨진다.

부웅!

그 순간 단지운의 신형이 사라지며 안효철의 주먹이 허공을 때렸다.

단지운은 어느새 원래 자리보다 더 뒤에 나타났고 대신 하늘 위에서 선우도가 장포를 펄럭이며 안효철을 덮쳤다.

콰앙!

거대한 화염이 화르륵 솟아나며 폭발을 일으켜 안효철을 뒤로 밀어냈다.

잠깐의 틈을 만들어낸 선우도가 급히 신형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길을 내어라!”

그 외침은 세 환마인들에게 향한 것이었다.

이미 성도와 그 근처에서 계획한 전투들이 수포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선우도는 단지운이 격전을 벌이는 동안 비작의 작안술을 통해 사방 인근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서야 당혁수와 안효철의 접근을 알게 된 그들은 이 전장에서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단지운의 절대적인 무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도건과 천서은의 무력이 예상을 상회하는 수준인 데다가 특히 진도건과 혈마라는 존재를 실제로 목격한 선우도는 아주 강렬하게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우도가 외치자 영무, 허룡, 비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술법을 펼쳤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에 은은한 광휘가 흐르더니 그 주변 공간들이 부분부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딜!”

화염의 장벽 너머로 어느새 당혁수가 날아올랐다. 양팔을 휘두르는 순간, 단지운의 주변에 침강이 일어나 눈부시게 반짝였다.

만천화우 위락경.

사혈신마 서문질을 죽였던 그 절세 무공이 다시 한번 펼쳐지는 순간, 여기에 난입한 선우도도 이미 만전의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환마대능력 위상역전술(位相逆轉術).

쇄도한 침강들이 단지운의 일정 거리 바깥을 기준으로 일그러지는 공간 속에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사방 바깥의 여러 부분 공간들이 일그러지더니 그 침강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만천화우 위락경이 워낙 많은 숫자의 강기와 넓은 범위를 공격하는 것이다 보니 원래라면 당혁수에게 고스란히 돌려줬어야 할 것을 사방에 난사하는 수준으로 돌려놓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런 능력 자체도 불가사의하며 경이롭기 그지없다.

“이럴 수가!”

당혁수조차 그 신묘한 현상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위기를 넘긴 선우도가 단지운의 허리를 끌어안고 세 환마인 쪽으로 몸을 날렸다.

후퇴를 의도하고 있다는 걸 직감한 단지운이 발버둥쳤다.

“이거 놔라! 감히 이 천마 단지운에게 등을 보이라는 것이냐?”

“회복도 못 하고 계십니다! 어리광을 막은 대가는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뭣이!”

선우도의 불경스러운 언사에 단지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내 손가락을 튕기려는 당혁수의 모습을 보고 급하게 소리쳤다.

“뒤!”

“칫!”

선우도가 반쯤 몸을 돌리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 앞에 위상역전술이 펼쳐졌고 이내 삼양지의 세 가닥 지풍(指風)이 쇄도했다.

푸푸푹!

“큭!”

받아내어 되돌려 준 것은 한 가닥뿐이었다.

당혁수도 자신이 쏘아낸 삼양지의 지풍에 어깨를 꿰뚫리며 멈칫했고, 선우도도 한 가닥이 옆구리를 꿰뚫고 나머지 하나는 어깨를 패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그의 두 다리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세 환마인이 형성한 환도의 위상공진(位相共振) 위로 뛰어들었다.

슈아아악!

여전히 선우도의 팔에 붙들린 채, 뒤쪽에 시선이 고정되고 있던 단지운의 눈에 횡으로 긴 섬광 한줄기를 보았다. 막힌 세맥이 다시 뚫렸는지 그가 칠흑의 마기를 일으켜 앞을 가로막았지만, 어쩐지 공간이 부족하다.

훅!

“……사라졌다.”

안효철이 놀라 중얼거렸다.

그 옆엔 검을 휘두르고 난 뒤 기력을 다하여 무릎을 꿇는 진도건이 있었다. 마지막 섬광은 바로 진도건이 쏘아낸 참격이었던 것이다.

안효철의 말처럼 단지운을 비롯한 환도마종의 네 사람이 마치 증발하듯 일그러진 공간 변화와 함께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순간적으로 기감을 확장하여 그들의 위치를 추적하려 했던 당혁수가 너무나 먼 거리에서 그들의 기척이 잠깐 나타났다가 재차 사라지는 걸 간신히 포착했을 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잠깐이었지만, 전력을 다하여 공격을 퍼부었던 두 절대고수는 눈앞에서 적이 사라지니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경(死境)의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듯 치열한 격전을 치렀던 진도건의 처지는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앞서 들 수밖에 없었다.

투둑, 툭…….

진도건이 돌부리들이 떨어지는 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담벼락에 기댄 채 사투에 지친 몰골을 한 천서은이 거기에 있었다.

덕지덕지 묻은 핏자국들과 먼지, 헝클어진 단발의 머리카락으로도 그 아름다움이 모두 가려지진 않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안쓰럽고 애처로운 생각만이 가득 드는 모습이었다.

천서은이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진도건도 힘을 내어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서로에게 다가간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를 끌어안으며 서로의 호흡이 아직 살아있음을, 서로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음을 확인했다.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 속에서 대화 한 마디 나눌 기력 따윈 없었다.

풀려버린 긴장감은 끔찍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졌으나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서로를 향한 감각들만이 그 부정함을 덮고 있었다.

“잘했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서도 진도건의 그 한 마디에 천서은은 조용히 눈물을 쏟아내었다.

중요한 순간에 그의 등을 손으로 받쳐서 내공을 흘려보내 주었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진도건의 파천신공은 파천혈마공으로 변질되었기에 천서은이 격체전공으로 내공을 이전한다고 해서 그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상 사파 내공 특성상 정파의 정순한 내공심법과 달리 저마다 특질의 선명함이 너무 짙으므로 완전히 같은 내공심법이 아닌 이상 제 효과를 온전히 기대하기 힘들고 때로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어떤 동질감, 동화감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나 다름없었으니 이렇게 와락 껴안는 중에도 두 사람 모두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둘 모두 힘없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부둥켜 안은 손은 서로 풀지 않고 있었다.

다른 걸 살필 여유가 없었던 두 사람과 달리 당혁수와 안효철은 청성산에 펼쳐진 참상을 찌푸린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청성파의 멸문지화라니……, 마교로 인해 사천에서도 기어이 이런 참극이 재현되었구나.”

당혁수는 참담한 심정에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지리적으로 드넓은 사천분지 안에서 청성파는 서쪽 산지 초입의 청성산에 도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의 사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아미파와 달리 청성파는 적대적 세력을 마주하지 않는 지리적인 이점으로 상대적으로 안위에 관한 관심이 덜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마교의 계략이 그 방심의 빈틈을 파고들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멸문지화의 참극까지 벌어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마 단지운, 마교의 교주. 천 소저가 더 일찍 쫓았어도 막는 게 불가능했겠지.’

적들이 사라지기 직전 그들의 대화를 들은 두 사람은 그 남자가 마교주 단지운임을 깨달았다. 안효철도 오기 전 들었던 지운천이란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운지 오래였다.

안효철은 단지운의 무위를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오싹한 기분이 일었다.

광혈신마 혁무술을 대적하는 과정에서 단지운이 나타나 그에게 가한 일격의 위력도 그랬지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천마신공 파황멸뢰옥의 위압감은 무시무시했다.

천자철갑 착용 이후로 방어력만큼은 절대적으로 가졌던 자신감이 무너질 정도였다.

그런 자를 상대로 꽤 긴 시간을 버텼던 진도건과 천서은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특히 파황멸뢰옥이 전개되기 직전 단지운이 온몸으로 피를 뿜어내면서 그 육신에 드러낸 수많은 검상과 상처들을 보면서 두 사람의 저력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안 대협, 괜찮나?”

당혁수가 부르는 소리에 안효철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자철갑에서 흘러나오는 마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좀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이내 쓴웃음을 짓는 안효철의 표정을 보고 당혁수는 그가 절대 가볍지 않은 문제를 짊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물어봐야 캐묻는 것이 되고 자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당혁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성파의 도관들은 대부분 크고 작은 상처들로 부분부분 무너져 있었고 바닥의 반석들도 거의 다 깨져서 멀쩡한 걸 찾기 어려웠다.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강을 이루었다.

피에 물들지 않은 기물들도 찾기가 어렵고 토양마저 더욱 검붉어져 제 색으로 오인할 정도다.

분명한 현실로 펼쳐진 참담한 광경이 당혁수로 하여금 비통함에 눈물짓게 했다.

“도건!”

그때 천서은의 음성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막대한 진력을 소모한 진도건이 마침내 혼절하여 그녀의 품에서 무너지듯 쓰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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