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51화 (251/432)

251화 - 제46장. 사투(死鬪)의 종착 (1)

무의식의 공간 속에서 혈마를 마주할 때마다 점점 그와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제대로 입혀지기 시작한 마기의 성질과는 별개로 호승심 또는 투쟁심이라 설명할만한 감정이 강하게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본래의 성정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또 원류검결로 성장한 선천지기의 맑은 상태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구도에서 용솟음치는 투쟁심은 반길 만하다.

상대는 천마신교 교주, 현재 무림의 최강의 적을 상대로 투쟁심은 아무리 보충해도 모자랄 터다.

코오오오!

제멋대로 분출하듯 쏟아내던 핏빛 마기가 어느 순간 잦아들더니 진도건의 피부를 타고 감싸 흐르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지만, 밀집된 마기의 섬뜩함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진도건이라는 한 사람이 가진 예리함을 더욱 날카롭게 벼린 듯하다.

천마신공 천지멸뢰옥.

다시 한번 사방에서부터 쏟아지는 강기의 세례.

콰콰콰쾅!

그 무시무시한 공세의 간극을 뚫고 나가 연이은 폭발들을 등 뒤로 둔 채, 진도건이 앞으로 바람처럼 내달렸다.

내외상을 골고루 입은 그의 몰골은 썩 보기 좋은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그전보다 더욱 형형하게 빛나고 있으니 마주 보는 단지운조차 절로 긴장감이 들게 했다.

참격.

차분한 호흡으로 들썩이는 폐부를 가라앉히며 부드럽게 쥔 두 손으로 군자검을 사선으로 내려친다. 시말(始末)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시에 나타난 일직선의 검영 끝에 혈색을 닮은 붉은 기운이 아닌 정말 피와 같은 검기가 뿌려졌다.

촤악!

단지운은 정말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도약했다.

발밑을 스치는 검기가 그대로 전각의 석벽을 베어버리는 걸 보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을 느낄 새도 없이 아래에서 간격 속으로 파고드는 진도건의 신형에 허공을 밟았다.

휘릭!

단지운의 신형이 공중에서 방향을 틀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자신을 추격하는 진도건을 향해 뻗은 손은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거나 방향을 꺾어댔다.

단지운이 강기를 일으켜 공격하는 방법에는 제약이라는 것이 없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위치에서 찰나 간 응집된 기운은 어김없이 칼날과 같이 유형화하여 진도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콰콰콰콰!

공중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는 진도건의 신형은 짓쳐 드는 강기와 확산되는 폭발의 여파를 벗어나 단지운을 쫓았다.

이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고 시위하는 듯 직접 검을 맞대려는 의지가 단지운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진도건의 그런 눈빛을 본 단지운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직접 검을 맞대는 것을 피할 정도로 진도건의 검이 대단히 위력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공력의 우위를 보여주었다 한들 진도건의 검은 그의 기준을 상회하는 날카로움과 속도 그리고 정교함을 가졌다.

허나 그렇다 해도 맞대결을 피하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수치스러울 정도다.

‘좋아, 상대해주지!’

잠깐의 틈을 벌기 위해 좌수를 휘둘러 직접 강기를 방출한다.

콰쾅!

어느새 오른손 안에 끌어당겨 지는 평범한 장검 하나.

그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타오르는 듯한 칠흑의 검강이 표면을 타고 흐른다.

공력의 깊이를 자랑하듯 아무렇게나 뽑아내는 검강이 아니라 대장장이가 검을 정련하듯 정교하게 형성한 검강은 평범한 장검을 절세의 보검으로 만들었다.

천마신공 천마어검(天魔御劍).

언제든 파괴적인 위력을 뿜어낼 검력이 거기에 담겼다.

참(斬)!

카앙!

양측의 참격이 부딪쳤다.

응당 단칼에 잘라내야 할 적의 흑검이 피처럼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그의 마기에 맞서 불사르길 멈추지 않는다.

카카카캉!

두 사람 다 엄청난 검속을 보여주며 검을 맞부딪쳤다.

조금 전의 싸움에선 공력의 우세를 이용해 힘으로 누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천마어검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밀리지 않는 진도건의 저력에 단지운은 내심 매우 놀랐다.

‘무엇이 달라졌기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었지만, 그가 알 수 있는 영역의 해답이 아니다.

그 사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무의식의 공간을 드나들 때마다 진도건과 혈마 사이의 결속은 끝을 모르듯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혈마가 가진 다면성의 봉인을 하나하나 풀어내듯 진도건에게 입혀졌다.

단지운이 휘두르는 연속된 검의 흐름 사이로 진도건의 검이 파고든다.

허투루 흘러가는 검이 아니었다.

위치를 가릴 것 없이 몸에 새겨지는 작은 상처들은 오로지 단지운의 몫이었다.

강력한 마기의 작용으로 피부가 원상 복구에 가까운 회복력을 보여줄 수 있는 그였지만, 공격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무엇보다 마치 귀찮은 고양이 한 마리 달라붙어 할퀴어대는 듯한 통증은 몹시 거슬리기 짝이 없다.

카앙!

억지로 밀어붙여 다시 떼어놓으면서 장검에 응집해 놓았던 천마어검의 힘을 개방한다.

천마신공 천마어검 일천세검(一千細劍).

갈래갈래 갈라져 천 개의 세밀한 칼날을 만든다.

단지운이 장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 모두가 거대한 바람이 되어 진도건을 팔방에서 덮친다.

아무리 그가 쾌검의 달인이라도 그 모두를 막아낼 수 없다. 또한, 단지운과 같은 수준의 공력을 갖지 못한 이상 호신강기로는 수백 개의 보이지 않는 바늘구멍을 만들어 목숨을 위협할 것이다.

츠츠츠츳!

그 순간 단지운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진도건이 전신으로 핏빛 마기를 뿜어내는 순간, 그가 펼쳐낸 천 개의 세밀한 강기 가닥들이 그 마기에 삼켜져 마치 불에 탄 실처럼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빈틈을 노리고 훅 들어오는 진도건의 검 끝을 검을 당겨서 배면으로 사이를 막았다.

까앙!

좀 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지며 파편이 튀었다.

제대로 검강을 구축하지 못하여 평범한 철검이 현철로 이뤄진 흑검의 강성과 진도건의 검력을 버텨내지 못하고 깨진 것이다. 당연히 더욱 깊이 파고드는 진도건의 검을 단지운이 합장으로 붙잡았다.

‘이것은……!’

직전의 세검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는데 검을 붙잡고 나서 더욱 확신했다.

진도건이란 존재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

의식 속 공간을 장악한 그의 기운이 허무하도록 손쉽게 깨버린 혈마의 마기라는 것.

천마의 마기가 지고한 파멸의 속성을 띄고 있다면 혈마의 그것은 마기 본연의 파괴적인 위력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마를 집어삼키려 드는 탐욕스러운 갈증(渴症)의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도건이 과거 대충 중얼거렸던 식마라는 본성을 바로 지금, 단지운이 느낀 것이었다.

두 손을 타는 듯 파고드는 마기의 침투에 단지운은 본능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띄웠다.

“갈(喝)!”

파아아아앙!

그의 손안에서 급격하게 고압의 폭발이 일어나며 두 사람을 동시에 밀어냈다.

“큭!”

진도건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군자검의 강성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단단하게 충격을 견뎌주고 있었지만, 격렬한 떨림은 그의 손바닥을 마구 터뜨려 검 자루를 피로 붉게 물들였다.

‘어떻게 몰아쳐도 결국 상황을 주도하는 건 저자의 몫인가……!’

문득 어릴 적 처음 목검을 들었을 때, 통나무를 반복적으로 가격하여 연습하던 때가 떠올랐다.

껍데기만 벗겨질 뿐 절대 쓰러지지 않던 그 인상을 지금 여기서도 느낀다.

무엇보다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 단지운이 가진 저력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분은 마치 조금의 헤아림도 허용하지 않는 한없이 방대하고 깊은 칠흑의 심연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진도건으로서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전력을 쏟아붓고 있는바, 여기서 무엇을 더해야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지 까마득한 기분을 느낄 때.

그 무한할 것 같은 저력을 품은 단지운이 새로운 조화를 전개(展開)한다.

섬뜩!

천마신공 마천경(魔天境).

섬뜩한 느낌이 청성산 정상 위에 선 모든 자의 감각을 관통한다.

눈 깜짝할 새, 분명 시각적으로는 해 뜬 낮의 산 정상 풍경이 눈에 비치고 있었으나 다른 오감 또는 어떤 초감각들이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는 정보를 뇌에 전달하여 인지하게끔 했다.

한낮의 어둠, 그 공존은 진실 속 허상인가?

아니면 진실 뒤에 숨은 또 다른 진실을 그런 초감각들이 제대로 인지하고 정보를 보내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어깨를 움찔 떠는 그때, 단지운의 차가운 목소리가 진도건의 귀에 꽂혔다.

“이번엔 다를 거다.”

두 손을 앞으로 조금 넓게 펼친 채 선 단지운의 모습을 인식하는 순간, 진도건은 그를 둘러싼 사방의 모든 공간에 거대한 기운의 조류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이건……!”

신음 섞인 탄식이 절로 나온다.

눈에 보이는 공간부터 그렇지 않은 후위의 공간까지 눈에 보이듯 느껴진다.

저마다의 눈을 품고 마기가 소용돌이치면서 오직 진도건만을 노리고 천지사방에서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감옥.

마천경 안에서 천지멸뢰옥은 파멸의 상징으로서 한 단계 진화한다.

“파황멸뢰옥(破荒滅牢獄).”

나직이 중얼거리는 단지운의 눈에서 그야말로 진도건은 바람 앞 촛불이었다.

쿠쿠쿠쿠쿠쿵!

거대한 폭발과 그에 상응하는 굉음에 청성산이 부르르 떨었다.

염라대왕이 어둠을 몰고 나타나 잔인하게 선고하는 듯 천재(天災)에 버금가는 죽음의 조화를 목도한 자들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가 죽음을 확신하고 천서은마저 차마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어 멍하니 여파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모든 일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

마기가 끓어오르다 못해 넘쳐나는 칠흑의 폭발 속에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어둠을 몰아내고 또 집어삼키는 듯 뻗어 나간 혈광과 칠흑의 혼돈은 어느새 단지운에게까지 뻗어 나가 그를 삼키니 이를 본 모두가 무슨 조화가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단지운만이 그 혼돈의 폭풍에 집어 삼켜졌을 때,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붉은 마기를 일으키며 칠흑의 마기를 밀어내는 거대한 사람의 환영.

‘설마……!’

단지운의 눈에 떠오른 불신의 빛.

마치 몸부림치듯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그의 마기를 몰아내고 그에게까지 길을 열어내는 그 환영이 바로 혈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천경은 천마신공으로 발휘할 수 있는 절대적 권능이었지만, 그 근간에는 환도의 조화가 있었으니 혈마를 자극해 깨운 것이다.

혈마는 깨어나자마자 위험을 인지하고 혈마단의 모든 마기를 폭주시켰다. 그렇게 한순간에 진도건의 바깥으로 폭사된 혈마기에 자신의 의식을 투사하였으니, 마치 그가 직접 현세에 현신하듯 사람의 형상처럼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가라!”

한순간 혈마의 난동으로 혈마단이 텅 비는 공허감으로 인해 진도건의 백화(白化)되었던 의식이 혈마의 목소리에 번쩍 깨어났다. 동시에 피와 어둠의 혼돈 속에 뚫린 길로 보이는 단지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진도건은 본능적으로 하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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