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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50화 (250/432)

250화 - 제45장. 스스로 가면을 벗다 (6)

진도건이 벗어나기 위해 단지운의 팔을 흔들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누르고 있던 검의 병두(柄頭)가 팔 안에서 느껴지는 미증유의 힘에 의해 밀려나고 있었다.

까득!

묘한 울림이 붙잡고 있던 팔에서부터 느껴졌다.

원래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단지운의 팔이 부러진 뼈가 저절로 맞춰지면서 더욱 강하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끄으…….”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진도건이 신음을 흘리며 오른손을 들었다. 다시 검의 자루로 찍기 위해서였는데 이번엔 단지운의 왼손에 팔목을 붙잡혀 역시나 벽에 처박혀 버렸다.

“고통스러워 보이는군, 진도건.”

“큭!”

진도건이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쳐봤지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쉽지 않았다.

특히 단지운에게 붙잡힌 곳에서 마기가 침투하면서 고통을 야기하기 시작하자 그도 더욱 격렬하게 저항했다.

“크아아아!”

처절할 듯 토해내는 고함.

하단전에서부터 솟구친 파천신공의 진기가 혈마단에서 변질이 일어나 마기가 되어 밖으로 분출되었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듯 마기가 혈염(血焰)처럼 타오르고 붉은 섬전이 번쩍이면서 코앞의 대적에게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그런 저항조차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면서 단지운은 되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선우도!”

그 외침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이미 선우도는 준비되어 있었기에 전신에 두른 술식의 문신에서 광휘가 충분히 흐르고 있었다.

투둥!

두 손으로 지면을 내리치는 순간, 알 수 없는 울림이 청성산 위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그가 내리친 손에서부터 지면을 타고 자색 광휘가 뻗어 나갔다. 그 종착지는 단지운과 진도건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었으니 그곳에 이르자 원형의 광휘가 솟아오르며 그들을 감쌌다.

단지운이 씩 웃으며 진도건의 적안과 눈을 맞추었다.

“자, 환도가 열렸다.”

“큭, 뭐?”

그렇게 반문했지만, 진도건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깨달았다.

그가 붉은 기운을 거세게 일으켰듯 단지운에게서도 칠흑의 기운이 파도처럼 일어나 이내 그와 함께 주변의 공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가 분출해냈던 기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깊은 어둠만이 오감을 덮을 뿐이었다.

환도란, 의식과 무의식을 사로잡아 길을 여는 의식(儀式).

몸이 붕 뜨는 듯한 몽롱한 기분이었으나 혈마의 꿈틀대는 마성과 의식은 그가 잠들어 버리지 않도록 깨우고 있었다.

‘무의식의 공간인가……?’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공간이었지만, 그의 상태 자체가 워낙 낯설어서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지금 느껴지는 여러 가지 감각이나 기분들이 다른 매개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 같은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멍청한 놈.”

목소리는 분명 ‘내 것’이었다.

“처발리는 꼬락서니가 아주 한심하구나.”

분명 ‘내 것’인 목소리인데 그가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목소리에 담긴 감정들은 마치…….

“쎈 놈 만난 건 인정한다만, 혈마 이름에 먹칠하지 마라. 울화통 터질 것 같으니까.”

진도건은 깨달았다.

비로소 느껴지는 의식 속 영체의 모습은 자신이 틀림없지만, 그것은 순전히 혈마의 것으로서 진도건은 마치 그의 그림자 혹은 의식 이면에 자리 잡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설레발치지 마라. 어차피 무의식의 공간이다. 저것들이 벌인 수작질이 잠시 이리됐을 뿐, 다시 현세에서 눈을 뜨면 원래대로 돌아가 있을 테니.”

혈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콧방귀를 한 번 더 뀌었다.

그의 말을 제대로 믿고 있는지 진도건이 안심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흥! 마음에 안 드는군.”

‘설명해줄 수 있는 게 있나?’

“천마 단지운? 네 무의식의 영역에 다리를 놓아서 날 만나려고 의식을 연결한 모양인데, 쉽지 않을 거야. 어차피 네 의식과 난 경계가 거의 없으니 쉽게 오지 못하도록 미로(迷路)를 깔아놨거든.”

‘무슨 속셈으로? 잡아둘 작정이냐?’

혈마가 턱을 쓰다듬으며 먼 곳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 고심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멋대로 뚫고 오는 걸 보니 의식의 힘이 대단한 놈이군.”

‘놈이 우리를 공격할 것 같은데, 네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내 영체까지 구체화해야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방법이 없겠어?’

혈마가 실소를 머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의식 속 공간이지만, 그 공간 속에 구현된 오감으로 발아래로는 피로 적셔진 땅을 느끼고 머리 위로는 어둠에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반복된 경험 속에서 영체라는 말까지 거론할 정도이니 지난 시간 동안 두 존재가 공유하는 지경의 범주가 또 다른 차원에 이르렀다는 증거로서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놈이 나를 궁금해했듯 나도 궁금했던 건 매한가지.”

그의 말에 진도건도 심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지운천이란 가면을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그 존재감을 향한 의문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온다. 떠들지 말고 얌전히 짜져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

진도건은 혈마의 말에 수긍했다.

의식의 그림자 속에서 진도건이 조용히 침묵하는 사이, 혈마는 다가오는 영적인 기척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간에 균열이 일었다.

갈라지고 비틀리고 모이고 또 발산하고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 현상들이 사라지면서 그 사이로 단지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단지운도 마침내 보이는 진도건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자가 바로 진도건의 모습을 한 혈마라는 것을.

“만나고 싶었다, 혈마여.”

“아아, 나도 만나고 싶었다.”

“네가 나를?”

단지운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도건이 그의 정체를 몰랐듯 혈마가 그를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마진 때문인가?’

구마진도 혈마의 마성을 이은 자.

하지만, 그 근본을 따져보면 두 마성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달리 빗대어 본다면 마치 이란성쌍태(二卵性雙胎)의 존재와도 같았다. 게다가 같은 장소와 같은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오직 같은 건 ‘천혼제정대진’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방식’으로 빚어진 홍천환에서 시작된 마성이라는 점이었다.

동서로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마성이 서로 통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상상을 해보지만, 역시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서서 들었다.

“나를 어떻게 알지?”

단지운은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의문을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큭큭큭!”

혈마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단지운이 가진 최초의 생각처럼 혈마는 그의 존재를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영혼의 존재감은 분명 혈마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무언가와 무척 닮아있었다.

“큭큭……!”

혈마는 웃어넘길 뿐, 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낀 무시당하는 기분에 단지운도 심기가 뒤틀려졌다. 그는 다시 본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혈마여, 그 몸을 차지하고 현세의 주인이 되어라. 너의 마도가 천하에 펼쳐지도록 내가 인도해주겠다.”

“큭큭! 니가 뭔데 날 인도한다 만다 하느냐?”

“나, 천마 단지운. 만마본원의 천마가 바로 나다.”

“모든 마의 근원이 너라는 말이냐?”

“그렇다.”

“그럼 내 아빠가 너냐?”

“뭐?”

“가슴이 절벽인 거 보니 엄마는 아닌 거 같고 말이야.”

단지운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엄마’라는 단어가 그의 신경을 묘하게 긁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일단은 감정을 억눌러야 했기에 단지운은 다시 호흡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모든 마를 굽어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천마뿐이다. 천마에게서 비롯된 마성도, 너처럼 홀로 피어난 마성도 예외는 없었다. 거부한다면 남는 것은 오직 내게 삼켜지는 길뿐이다.”

“오호호! 그럼 내가 여기서 거부하면 즉시 네게 삼켜진단 말이냐?”

조롱조로 가득한 그 말투가 연신 신경을 건드렸다.

“……예외는 없지.”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그에게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칠흑의 안개가 사방을 덮기 시작했다. 마치 이 공간이 자신의 것인 양 무서운 속도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그 광경을 혈마의 그림자에 숨어서 느끼던 진도건도 영혼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크크크……, 크하하하하핫!”

하지만, 혈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 모습에서 단지운은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천하를 아우를 수 있다는 오만하리만치 가득한 절대적 자신감이 거기에 있었다.

천마를 마주한 그 어떤 마성도 예외 없이 고개를 숙여왔거늘.

단지운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 존재를 흥미롭게 여겼다. 일월신마가 폭주시키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본교의 영역 밖에서 태어난 마성이니 명마나 염마처럼 존중해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어. 하지만, 이젠 그럴 의욕이 사라졌다. 어차피 본교에도 혈마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만 소멸하여라.”

단지운이 혈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꽉 움켜쥐었다.

“……뭐하냐, 이 새끼야.”

영혼을 삼킬 듯한 혈마의 귀곡성에 단지운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주 잠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단지운이 다시 손을 펼쳤다가 꽉 쥐었다.

이 무의식의 공간 속에 펼쳐낸 그의 힘이 저 혈마를, 저 마성을 집어삼키고 소멸시켜야만 했다. 그렇다면 남게 되는 건 진도건이라는 현세의 껍데기뿐일 테니 미련 없어진 그의 목을 치는 건 아주 손쉬운 미래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식!

혈마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검지를 펼쳐 단지운을 가리켰다.

“야.”

“……?”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씌어서야 감히 내 의식 속에서 이 혈마를 삼켜보겠다고?”

단지운은 순간 사고가 정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혈마의 손가락과 그 눈은 분명 그를 보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다른 존재에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혈마가 뻗었던 손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칠흑의 안개에 뒤덮였던 의식의 공간이 돌연 뒤바뀌듯 핏빛으로 물들어 끈적하게 온몸을 감쌌다.

머릿속에 드리워지는 살해(殺害)의 그림자를 마주한 순간,

“감히이-!”

단지운이 내면의 거대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기다렸다는 듯이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 물 흐르듯 전개되어 천서은도 사전에 차단을 시도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서은은 불길한 생각은 여지없이 벌어진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안 돼!”

단지운으로부터 칠흑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진도건을 삼켰을 때, 천서은도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초원 위 경험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진, 대(對) 흑풍신마 결전의 말미에 검은 기운이 진도건을 삼켰던 장면이 겹쳐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끝엔 진도건이 야율재의 가슴을 뚫고 나온 피 칠갑한 손으로 그의 척추를 부러뜨리는 끔찍한 장면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오싹한 느낌이 피부를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진도건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구도 속에서 결국 그 손에 제압되어 강제적으로 삼켜지는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천서은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지금 상황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지 않는다면 이 끝에 무엇이 남아있을지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파천신공을!’

하단전의 내공을 격렬하게 끌어올렸다.

파즈즈……!

“우웩!”

벽력의 불꽃이 전신을 타고 흐르려는 순간, 천서은이 다시 무릎을 꿇고 검은 피를 게워냈다. 뒤틀린 기혈을 바로 잡기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면서 달려가는 천서은은 맨주먹으로라도 덤비겠다는 결연함을 아슬아슬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아-!

천서은은 절로 무릎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떨림과 함께 올려다보는 그녀의 동공에 혈마와 천마가 동시에 뿜어내는 두 흑적(黑赤) 마기의 격랑이 비쳤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단지운의 신형이 퉁겨 나갔다가 낭패스러운 얼굴로 공중에서 몸을 세우는 모습까지 보였다.

‘……도건!’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눈으로 진도건의 모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에 마침내 화색이 돌았다.

손으로 목 주변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꺾어 경직을 풀어내고 흑검을 휘둘러 붙잡혔던 오른팔의 상태를 살피는 모습.

“쪽팔리게 하지 마라…….”

순간 섬찟한 음성이 들렸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듯 들리지 않게 되는데 그사이 그걸 들은 천서은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닥쳐.”

“……도건?”

조용히 중얼거리는 진도건의 목소리에 천서은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진도건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이 마주쳤는데, 천서은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 여깄으니까.”

그 지나가 버린 섬찟한 음성이 어쩌면 혈마의 것이었으리라는 상상을 뒤로하며 천서은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그는 분명 진도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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