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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48화 (248/432)

248화 - 제45장. 스스로 가면을 벗다 (4)

지운천은 잠시 고개를 숙여 뭔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진도건의 적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혈마와 얘기를 나누고 싶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지운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우도가 분명 혈마를 보았다고 했었는데.”

지운천이 뒤쪽에 있는 선우도를 힐끗 보며 말했다.

거리가 더 멀어져 있긴 했지만, 선우도도 지운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조금은 긴장하기도 하고 또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분명 그건 혈마의 모습……. 아닌가? 내가 잘못 느낀 건가? 하지만, 그 소름 돋는 목소리가 저자의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워.’

아직도 똑바로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찾았다!”라고 외쳤던 그 귀신의 목소리와 피로 덮인 얼굴의 잔상이 쉽게 눈앞에서 가시지 않았다. 붉은 기류에 뒤덮인 진도건이었을 거라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진도건이 아니었다.

진도건도 선우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혈강시 너머로 머릿속에 환상처럼 펼쳐졌던 수림 속 가부좌를 튼 노인의 얼굴이 저기에 있었다.

혈마라는 살아있는 의식의 존재를 알아챈 그들이 혈마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무의식 속에 공존하고 있는 그 의식체, 마성을 어떻게 마주하여 대화하겠다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가까운 예시가 있다.

“성도와 같은 환경을 여기에 만든다면 네가 원하는 대화가 가능할 수도 있겠네.”

진도건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마교는 언제나 불가사의한 지점이 많았기에 회피하는 것보다 맞닥뜨려 돌파하는 것이 위험성 대비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하하! 불리함을 자초하는군.”

지운천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히려 환진의 모든 기능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던 진도건이었기에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선우도가 먼저 지운천에게 얘기했다.

“저자는 환도종의 환술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건 또 놀랍군.”

지운천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진도건도 거기에 한 마디 더 던진다.

“날 상대로 요행은 바라지 않는 게 좋아.”

“풉! ……푸하하하하하!”

지운천이 배꼽을 잡고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얼굴을 마음껏 구기며 웃음소리를 길게 이어가고 있으니 진도건의 그 말이 진심으로 웃겼던 모양이었다.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진 공자에게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소. 뭐, 좋아. 어차피 혈마를 마주할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

진도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운천이 피식 웃었다.

“잊지 못했을 것이오. 당신이 일월신마에 의해 혈마로 폭주했던 화산에서의 그때를. 그것이 의미하는 게 뭐겠소?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면 알아서 튀어나올 거라는 의미겠지. 후후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투기가, 칠흑의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숨통을 조여왔다.

도발에 맞도발로 대응하듯, 어차피 이렇게 흘러갈 수순.

진도건도 그만의 날카롭게 벼려진 투기와 진홍빛 혈마의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 상황에서 진도건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지만, 나도 마지막으로 하나 묻지.”

“얘기하시오.”

“……네 정체가 무엇이냐?”

멈칫.

진도건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운천뿐만 아니라 환도신마 선우도와 다른 환마인들 모두 멈칫거리면서 긴장도가 살짝 올라갔음을.

지운천이 피식 웃었다.

“바로 싸울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묻는 근거는?”

“근거는 무슨. 네 기척이 남다른 건 둘째치고 굳이 본색을 감추려는 그 어색함이 우스울 뿐이다.”

“훗! 뭐, 틀린 지적은 아니니. 어디 날 놀라게 할 만한 솜씨를 보여준다면 얘기해주겠소.”

지운천이 손을 펼쳐 언제든지 오라는 듯 까닥거렸다.

진도건이 생각보다 길어진 대화에 굳어진 어깨를 풀기 위해 허공에 대고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죽어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

진도건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군자검을 가볍게 말아쥐고 품 안에서 비스듬히 기울인다. 지면을 가볍게 밀어내는 보법에 신형이 빙글 돌아간다고 느끼는 순간, 보이지도 않을 팔 움직임을 쫓아 참격이 펼쳐졌다.

이미 까딱거리던 손으로 강기의 장막을 올려친 지운천이었으나 섬뜩한 느낌을 마주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팟-!

강기의 장막을 가르고 짓쳐 들어오는 혈광참에 반응하여 청유검을 휘둘렀다. 칠흑의 검강이 동반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날카로운 검기는 때로는 강철도 벨 수 있다지만, 검강은 그 이상의 영역이다.

검강을 벨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밀도 있게 응집하고 예리하게 기운을 유형화시킨 검강이어야 했다.

카앙!

지운천의 검강마저 견디지 못하고 청유검이 반 토막이 나며 그 잘린 검신이 허공에 떠올랐다.

까득!

정말 본능적으로, 연속해서 느낀 섬뜩함으로 인해 찰나 몸을 틀지 않았다면 그 참격의 검기를 정면으로 마주할 뻔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지운천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폭주하듯 뿜어내는 마기 속에서 반 토막 난 검으로 재차 검강을 뽑아내며 달려드는 진도건을 향해 마주 전진했다.

카카카캉!

진도건의 흑검에서도 어느새 핏빛 검강이 형성되어 지운천의 검강과 맞부딪쳐다.

처음 몇 개의 검격에서 천서은을 상대했던 검속이 연상되었다. 하지만, 어지러운 충돌들 가운데, 그 사이를 파고드는 검광에 깜짝 놀랐다.

‘빠르다……!’

극한의 본능으로 몇 차례 피해냈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어느새 호신강기를 일으켜 치명상을 피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검강의 충격을 버텨내는 사이, 문득 그의 시야에 손으로 들고 있는 토막 난 청유검이 보였다.

‘아차!’

수초 간의 짧은 시간 검격의 공방을 나누었다.

검강을 사용한 끈질긴 충돌이 직전의 상황을 잠깐이나마 잊게 만든 것이었으니 진도건의 예리한 눈은 지운천의 미세한 반응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천뢰삼검식 십점타뢰.

사실상 10연속 출검의 찌르기이나 초식 속 내포된 ‘동시’라는 의미를 강호에서 가장 잘 구현할 사람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순간 번쩍했다는 느낌이 들 때, 열 줄기 검광과 그것을 쫓듯 뿜어져 나가는 혈광이 어느새 지운천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푸욱-!

“끅!”

무공의 경지를 이룬 이후로 신음이라는 걸 흘려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일까?

결과적으로 기운은 뒤로 흘리고 검격은 피부 이상을 뚫지 못하게 막았지만, 충격에 떠밀려 물러나면서 자신의 피를 바깥으로 흘리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다.

퐈아아아!

지운천의 전신으로부터 칠흑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갔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일 정도의 위협이니 적인 진도건이 모를 리 없으리라 느꼈지만, 어느새 눈앞에서 그의 기운이 회오리처럼 휘말리는 것을 보았다.

꿈틀!

그가 뿜어낸 기운을 끌어당기는 회오리가 기묘하게 비틀린다고 느끼는 순간, 그 중심에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촤악!

기류의 중심을 뚫고 사선의 원을 그리는 진도건의 검격이 다시 한번 지운천의 육신을 베었다.

명확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검 끝에 있었다.

‘여전히 얕다……!’

분명 호신강기를 가르고 검을 집어넣고 있음에도 그의 검은 계속 지운천의 육신을 제대로 베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육신의 강도가 어떻게 이러한지 의아함을 느꼈지만, 거기에 대해 주저할 여유나 생각할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눈앞에 거대한 손아귀가 진도건의 검광을 묻어버리며 덮칠 듯 날아왔다.

진도건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콰드드득!

지면을 뜯어버리며 다섯 줄기 구덩이가 움푹 패며 돌부리가 튀었다.

아슬아슬하다 생각한 순간, 이미 좌우로 충분한 공간을 점유하며 손아귀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이건 피할 수 없었다.

꽈광!

강기공의 합장(合掌)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나며 그 칠흑의 기류가 휘몰아쳤다.

전신을 억압하는 끔찍한 압력 속에서 진도건을 중심으로 십수 개의 검기가 갈래갈래 솟구치며 폭발의 위력을 분산시켜 버렸다.

그런 그의 눈앞에 새하얀 검광이 번쩍 나타났다.

진도건이 이미 기척을 읽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지운천의 검광이 그보다 더 빠른 듯 머리를 관통한다.

훅!

머리통에 구멍을 내었으나 들려오는 소리는 헛바람뿐, 흩어지는 잔상을 뒤로하고 바로 옆에 진도건의 진체가 나타나 솟구치는 검의 궤적을 그렸다.

채채챙!

연달아 터지는 금속성.

그보다 더 많은 검광이 사이사이에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심경을 재촉하며 더 빠르게 흑검을 뿌렸다. 혈광이 꼬리를 물고 쏟아졌음은 물론이었다.

혈광참이 잔상을 잘랐다.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진 지운천의 기척은 어느새 머리 위에 나타나 검극의 예기를 정수리에 겨누고 있었다.

푹!

내려꽂히는 검극이 노렸던 정수리 대신 땅에 닿았지만, 지운천의 눈은 이미 땅을 구르는 진도건의 신형을 쫓고 있었다.

카카캉!

공중을 휘돌며 반월의 검강을 연달아 뿌리는 지운천과 그것을 땅을 구르는 도중에 맞서서 검을 휘둘러 튕겨내는 진도건의 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타고난 반응으로 받아낸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그 위력에 떠밀려 지면에 처박힐 듯 눌리는 기분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 틈을 지운천이 노렸다.

그는 공중에서도 운신이 완벽하게 자유로웠으니 마지막 검강을 쏘아 보내자마자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터져나가는 강기의 여파를 뚫고 청유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에도 미소 띤 입술과 확신에 가득 차 부릅뜬 눈은 이 공격의 연결에 대해 지운천이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는 찰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주하게 된 것은 뜻밖의 현실.

츄악!

눈앞을 가득 채우는 피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진도건의 핏빛 검기뿐만이 아니었다.

찰나 신경을 관통하는 뜨거운 고통은 머리부터 몸통까지 이어진 직선의 경로에서 비롯된 것.

혈광 속을 일렁이는 물결은 그에게서 흘러나온 진짜 피.

그 모두를 뚫고 나와 진도건의 모습이 드러나니 앞으로 뻗은 손끝과 뒤로 당긴 흑검이 일직선의 경로로 정확히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죽음(死)과 죽임(殺)의 글자가 각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핑!

진도건의 흑검이 지운천의 목을 꿰뚫었다.

선명한 감각이 흑검의 검극을 통해 느껴질 때, 그의 눈이 뒤늦게 목 가장자리를 찢는 데 그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 진도건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까마득한 심연의 어둠을 품은 지운천의 두 눈빛을.

그것은 천혈강시의 죽은 눈과는 달리 해량할 수 없이 깊은 어둠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이, 지운천의 신형이 어느새 일보 접근했다.

콰앙!

“커헉!”

진도건의 신형이 명치를 때리는 장력에 떠밀려 뒤로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가까스로 뜬 실눈으로 지운천의 얼굴과 그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카맣기만 하던 눈이 다시 흰자위와 눈동자가 돌아…….’

일순 기력을 잃어 종잇장처럼 날아갔던 그였지만, 다시 기력을 회복하면서 급히 중심을 잡고 지면을 디뎠다.

치지지지…….

중심을 단단히 잡아 밀려나는 신형을 지면 위에 바로 세우자마자 뜨거운 기운이 속에서 울컥 솟아올랐다.

“우웩!”

진도건이 왈칵 죽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일격을 얻어맞은 명치 부근을 쓰다듬는 그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침투한 마기는 그의 기운에 소멸이 됐지만, 그 과정에서의 통증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진도건은 파르르 떨리는 손에서 행여나 군자검을 놓칠까 꽉 쥐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크크크……!”

분명 검이 제대로 들어갔다고 여겨졌건만, 실소를 흘리며 피 흐르는 상처를 쓰다듬는 지운천의 모습이 그의 눈에는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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