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제45장. 스스로 가면을 벗다 (3)
* * * *
천혈강시와 마침내 접촉하는 순간, 혈마의 기운이 천혈강시의 내부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환도신마 선우도를 감지하고 그 위치까지 찾아냈다.
사지가 모두 떨어져 나간 천혈강시의 몸통에서 마침내 머리마저 쳐내면서 환진이 사라지는 동안 혈마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놈이 거깄다. 가라.”
환도강마대진계가 무너지면서 다행인지 혈마의 의식은 더는 공존한 상태로 있지 못했다. 그래서 길게 설명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진도건도 혈마가 본 것을 똑같이 보고 느꼈기 때문에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서쪽을 바라보며 전력을 다해 암향표의 경공을 펼쳤다.
선풍으로 몸을 가볍게 하고 지면을 밀어내는 발끝에 탄력을 더했다. 스스로 경공이 특기라고 얘기하는 자라도 지금 진도건의 속도를 마주한다면 감히 함께 달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성도성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서쪽으로 달리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다.
익숙한 행색들에 특히 그의 존재를 눈치채서 돌아보는 흰 가면을 쓴 남자의 모습이 이미 눈에 충분히 익었다.
“기어코 쫓아……. 아니, 설마 청성산으로 간단 말인가?”
백기린의 가면 뒤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잦은 환술 사용과 실험으로 극도의 예민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기감은 다른 사방환마뿐만 아니라 선우도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광범위한 지대를 직접 시각으로 탐색할 수 있는 비작의 작안술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술법의 도움이 없다면 백기린의 기감은 환도종 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먼 거리의 진도건을 일찍 감지했음에도 정말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자 꽤 당황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야에도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오기 시작하자 성도에서 봤던 진도건과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진도건의 적발적안의 행색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으나 성도에서 본 그의 모습과 느껴지는 기운은 절대 범상치 않았었다. 환진의 영향을 무시하고 피의 꽃봉오리를 피워내며 천혈강시를 내부에서 파괴해버린 ‘그 존재’는 분명 혈마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감각에 혈마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환진 안에서 마성이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사실 자체부터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환도강마대진계가 그런 환경을 만들어준 셈이라면 지금 여기서 무슨 술법과 환진을 펴더라도 그 상태까지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백기린은 오방환마 가운데서도 가장 촉망받는 환마인답게 본질적인 맥락을 엿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빠르게 회전했고 판단도 빠르게 내렸다.
“환사(幻師)들은 준비해라! 청성산으로 향하는 놈의 발목을 여기서 붙잡는다!”
환도종 마교도 가운데 연배가 있는 자들이 무리의 외곽으로 움직였다. 그들 모두 손을 명치 쪽으로 가져갔는데, 그 부분에서 자색 빛깔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피할 생각도 없는지 똑바로 달려오는 진도건을 기다리던 백기린이 거리가 십여 장 안으로 좁혀지자 바로 소리쳤다.
“환마강진!”
도등 역할을 하는 환사들을 기준으로 환진이 펼쳐졌다.
진도건은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절묘하게 환진 안으로 진입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칼날과 기공이 그를 향해 날아오는데 그의 시선은 줄곧 백기린에게 향해 있었다.
획기중사의 술(獲麒中死之術).
획린형각의 술(獲麟荊角之術).
양팔에 새겨진 서로 다른 술식.
케아아아!
백기린의 왼쪽에서 흡사 용과 같은 괴수의 머리 형상이 튀어나와 포효하는데 정말 실제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환상에 시선이 사로잡혀 있을 때 그는 어느새 오른손으로 지면을 짚고 있었다.
푸훅!
순간 발밑이 부서지면서 날카로운 뿔 같은 형상이 불쑥 솟구쳐 올랐지만, 진도건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뿔은 사라지지 않은 채 측면에서 새로운 뿔이 돋아나며 진도건의 등을 노렸다. 동시에 갈래갈래 가지처럼 뻗어 나가 어느새 사위를 가득 채우자 마치 가시덤불의 늪 속에 빠진 형국이 되었다.
‘환마강진 아래 무한히 증식하는 기린의 뿔. 하지만, 넌 그것에 당하지 않겠지!’
백기린이 몸을 날리며 왼손을 높이 뻗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손을 휘두르자 함께 솟아올랐던 용두(龍頭)가 아가리를 벌리며 그대로 가시진 자체를 삼킬 듯이 돌진했다.
케아아!
사독(死毒).
보통의 독과 달리 환진 속에서 생명력을 갉아먹는 죽음의 독이 용두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사독이 침투하는 경로는 오감에 더해 정신계에도 악영향을 미치니 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본질적으로 쇠약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환술의 연계는 절묘했고, 절대 피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백기린은 한 가지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혈마의 의식이 환진에 의해 깨어있지 않더라도 진도건의 모든 무공엔 그런 혈마의 속성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었다.
“후우……!”
신속의 검기(劍技)와 혈마진기의 파괴력만으로도 그동안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천혈강시를 부러뜨리고 청성산에 있을 미지의 강적을 상대하고자 하는 지금의 진도건은 굳이 여유를 부릴 이유도, 내공을 아낄 이유도 없었다.
파천혈마공 개단(開丹).
혈마단을 열어 하단전에서부터 치솟는 내공과 완전히 혼재되어 폭주한다. 호신강기로써 피부를 타고 흐르던 붉은 마기가 순식간에 사방 천지간에 확장되어 모든 환술을 지워버렸다.
환마강진이 제공하는 상승(上昇)의 기운이 증발해버리듯 사라지는 순간,
백기린도, 다른 환도종의 마인들도 깊은 공허함과 함께 모두 멈칫한다.
거기에 진도건의 군자검이 수평으로 혈광을 입은 흑선(黑線)을 길게 그렸다.
혈광참(血光斬).
참격이 날아드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인지하지도 못했으니 반응조차 없다.
뜨거운 느낌과 차가운 느낌이 동시에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감각이 그들의 마지막 기억.
백기린을 포함한 십수 명의 마교도들의 머리가, 팔이, 허리가 저마다 연결되었던 신체 부위에서 벗어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으아아악!”
“도망쳐!”
수장과 동료들을 잃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도주하는 마교도들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진도건은 다시 선풍암향표(仙風暗香飄)를 펼치면서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청성산으로 지면을 타고 날아갔다.
‘또 환진…… 걸리적거리는군.’
청성산 산문 근처에 깔린 환도강마진계가 그의 눈에도 보였다.
성도에서부터 직전의 상황까지도 반복적으로 환진에 갇히는 기분은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갇힌다는 표현이 무색하긴 하지만, 안에 진입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혈마단의 마기가 요동치면서 마치 혈마의 마성이 그의 영혼에 물들여지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청성산의 산문이 눈에 확연히 들어올 정도가 되자 환진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산문 쪽의 실체적 길이 드러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길을 열어주…….’
일부러 길을 여는 걸 의아하다 여기는 그때였다.
우르르르…….
조용한 굉음의 떨림이 대기를 타고 들려왔다.
경지에 도달한 파천신공 특유의 뇌성(雷聲)이 분명했다.
‘서은이다. 산 정상… 청성파인가? 누구랑 싸우는 것이지?’
산 정상으로 시선을 올리는데 그의 시선과 기감에도 파천진기로 인해 연신 퍼져나가는 푸른 뇌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본질적으로 마기와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의 파괴적인 기운과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낯선 감각, 그러나 기억 속에 명확하게 새겨진 이 기운의 주인.
‘지운천!’
진도건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서은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팽-!
진도건의 신형이 산 정상을 향해 바람처럼 날아갔다.
극한으로 확장된 기감의 범위 안으로 청성산 정상에 있는 자들의 기척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천서은의 기척이 지운천과 맞붙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진도건의 상단전이 그 어느 때보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정신의 집중.
눈의 압력이 높아지고 귀로는 이명까지 들렸다.
산길의 자갈 하나, 흙 한 톨, 흔들리는 나뭇잎과 바람의 결마저 느껴진다.
고작 2, 3초.
이 상태를 지속하고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때마침 그가 걱정했던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
극한으로 발휘된 염력이 공간을 응집하여 화살처럼 쏘아진 검을 일시 세웠다.
그 사이 그의 신형은 어느새 정상까지 이르러 정면으로 날아드는 여인의 신형을 품으로 받아낸다.
입가에 묻은 토혈의 흔적과 좋지 않은 안색을 한 천서은의 상태가 무척 걱정스러웠지만, 조금 전의 검을 막지 못했다면 사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내가 늦었어.”
“콜록! ……괜찮아요.”
내상으로 기력을 많이 소진된 천서은이 피로가 가득한 눈으로 지운천을 노려보았다.
“강해요. 그 흑풍신마보다 더……. 대체 저자의 정체가 뭔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진도건이 말하면서 천서은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천서은의 내부로 침투된 지운천의 마기가 그의 손에 흡수되었다.
‘으음!’
확실히 다른 느낌.
그녀에게 침투된 지운천의 기운을 직접 느껴보니 ‘마기’가 분명했으나 그 기운이 미량임에도 혈마의 기운에 삼켜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이 명료하게 느껴졌다.
진도건은 천서은을 안아 들고 옆으로 걸었다. 그리고 가까운 전각의 단석 옆에 앉혀 등을 기댈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손이 천서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정리될 수 있도록 귀 뒤로 넘겼다.
진도건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녀올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건이 일어나 돌아서면서 군자검을 뽑아 검은 칼날을 드러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서은이 문득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겹쳐져 보였다.
가까이는 흑풍신마에게 끝내 힘에 밀려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나타나 상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더 먼 예전의 기억으론 화산에서 묵허자에게 혼쭐이 났을 때, 일장로 백두기와 같이 나타나 홀로 묵허자와 맞서 싸우던 모습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구도와 그 상황이 연달아 펼쳐지는 게 새삼 다른 기분으로 느껴지면서도 서로의 관계에서 그녀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는 인식이 어쩌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난, 계속 도건을 의지하고 있었어…….’
천서은이 복부를 쓰다듬으면서 조심스럽게 운기하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기력을 되찾아 싸움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느꼈던 지운천의 무력이란 그녀의 부친 천무경의 그것을 떠올릴 만큼 압도적인 인상이었다.
저벅저벅…….
천천히 걸어서 다가오는 진도건의 모습을 보며 지운천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짝이 당했으니 즉각적으로 달려들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진 공자, 내게 할 말이라도 있소?”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후후! 삐딱하시군. 뭐, 좋소. 일단 내가 할 말이 있었으니 먼저 묻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