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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45화 (245/432)

245화 - 제45장. 스스로 가면을 벗다 (1)

“……푸우웁!”

선우도가 눈을 번쩍 뜨더니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오공에서 조금씩 피를 흘려 설마설마했는데 이렇듯 피를 뿜으며 깨어나자 허룡과 영무가 깜짝 놀라며 그를 부축했다.

“신마님!”

선우도가 손을 떨면서 두 사람을 붙잡았는데 손아귀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자 두 사람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이 연달아 물어보았지만, 선우도는 불안한 기색 가득한 얼굴을 덜덜 떨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다행히 그렇게 돌아보면서 자신이 있었던 위치를 떠올리게 되자 떨림도 조금씩 잦아들면서 눈에 간신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찾았다!”

섬뜩한 목소리와 사악한 미소를 짓는 듯한 피로 점철된 얼굴의 잔상이 다시금 눈앞에 어른거리자 선우도가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 쳤다. 그 진홍의 눈빛이 어른거리면서 도통 사라지지 않았다.

“……놈이 봤다. ……여기로 올 거야.”

“누가 말입니까?”

“……천혈강시가 파괴됐다. 환도강마대진계도 무너졌다. 존자께 이를 알려야 한다. 그분은 어디 계시느냐?”

“종전에 청성파로 올라가셨습니다.”

“나를 부축해다오. 존자께 가야겠다.”

선우도는 잠깐 호흡을 고르면서 단전의 기운을 전신으로 보냈다. 기혈이 꽤 뒤틀려버려서 운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당장 운신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걸 빨리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사람도 지운천 뿐이었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중턱쯤 올라갔을 때였다.

정상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분명 싸우는 소리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학살의 현장.

세 사람은 그 소리에 대해선 무덤덤했으나 곧바로 들려온 산 아래에서의 굉음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꽈르릉!

화들짝 놀랄만한 굉음은 마치 천둥이 울리는 소리였는데 며칠간의 소나기 이후의 하늘은 화창해서 무척 의아한 일이었다.

쿠르르……콰앙!

“이게 대체…….”

영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환도강마진계의 장벽 바깥으로 푸른 벼락이 번쩍이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안에 난입한 누군가가 힘으로 깨부수려는 것처럼 보였다.

“천가의 여식이로군. 교도들에게 일러라.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길을 열어주라고. 괜히 억제하려고 들어봐야 다칠 뿐이니까.”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계속 올라가십시오.”

영무가 아래로 내려가자 그 뒷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선우도가 다시 위로 시선을 돌렸다.

“가자.”

천서은은 이미 이화림에서 한차례 당한 경험이 있어서 일찍이 청성산에 펼쳐진 환진의 기운을 읽고 기감을 최대로 끌어올려 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성산 입구에 펼쳐진 환도강마진계는 이화림에 펼쳐졌던 환막음극진보다 한층 더 강화된 것이어서 그녀의 감각에 걸려든 자들은 없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녀는 여기에서 발목 잡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쿠르르르…….

본격적으로 공력을 분출하기 시작하자 요란한 천둥소리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울리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기운에 환진 뒤에 숨어 있던 환도종 마교도들이 숨죽이고 있을 때, 그녀가 본격적으로 기운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파천신공 창천벽뢰.

콰지지직-, 콰콰쾅!

“끄악!”

“으그그그-!”

그녀의 공격에 공간이 흔들리고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들이 효과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제아무리 환술이 강하여 기운의 흐름을 비틀고 여러 조화를 일으킨다고 하지만,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번개까지 완전히 제어할 수 없었다.

스스스!

몇 번 더 방출하자 주변 공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환상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면서 동시에 그녀의 감각을 간지럽히던 이질적인 느낌들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얼마간 앞으로 올라가자 여기저기서 타죽은 시체들이 보이기도 했다.

‘좌우로는 여전한데……. 버티질 못하니 일부러 길을 연 것 같구나.’

자신이 낸 수가 통했다고 생각하자 천서은은 자신감을 더 가졌다. 그녀는 경공을 펼쳐서 길이 열린 곳으로 가면서 빠르게 산 위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조용했다.

굳이 산문 입구를 막고 있는 환진 때문이 아니더라도 올라가는 산길에서 그녀는 묘한 적막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음에도 사시사철 녹음을 유지하고 있는 산림도 어쩐지 어두컴컴한 느낌이었다.

‘지운천.’

저절로 그 이름을 생각하게 만드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천서은은 점점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수풀 사이로 도가 사원들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멈칫했다.

목이 반대로 꺾인 채 나무 그루터기에 힘없이 걸쳐진 시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손엔 부러진 검자루를 놓지 못하고 있었고 면주에서 봤던 청성파 도복 위로는 주인이 시체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피가 낭자하게 점철되어 있었다.

“아……!”

천서은이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챙.

아주 미세한, 그러나 명확한 금속성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면서 연속된 소리가 이어져 들려온다.

그녀는 즉시 자리를 떠나 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하나둘 늘어만 가는 시체와 도관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혈흔들.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농도 짙은 마기가 점점 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청성산 정상에 내려앉아 있는 끔찍한 죽음의 냄새.

경공술을 펼치는 천서은의 신형이 더더욱 빠르게 나아가 그 끔찍한 참사의 현장 한가운데에 올라섰다.

시산혈하(尸山血河).

사천제일의 도량이 그곳을 관리하고 수양하는 도사들의 시체가 산 위의 산을 이루듯 뒤덮였다. 그들의 시체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모이고 모여 피비린내 자욱한 원천을 이루고 다시 강이 되어 흘러내렸다.

초원에서의 전쟁도 수많은 죽음이 있었지만, 야율재와의 싸움으로 잠시 머물렀을 뿐이라 전쟁의 참화를 온전히 마주한 적 없던 천서은에게 이보다 끔찍한 광경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노소정 노군각 경내 위 일단의 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숫자는 모두 여섯.

그중 한 사내가 나이든 도사의 목줄을 한 손에 움켜쥐고 검을 겨누고 있었는데 그의 고개가 돌아가 천서은을 정확하게 내려다보았다.

씨익.

그 사악한 미소를 짓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하다.

그 사내의 얼굴은 천서은도 아는 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며 분노의 화신이 깃들었다.

“지- 운- 천-!”

흡사 사자후와 같은 외침이 청성파 경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지운천이 검을 쥔 손을 빙글 돌려 힘을 주었다.

푹!

“끄윽!”

청성파의 신물인 청유검(靑幽劍)이 하송진인의 심장을 꿰뚫었다. 늙은 도사의 육신은 신음과 함께 잠깐 꿈틀했을 뿐, 이내 눈도 감지 못하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퉁! 슈아아-!

지면이 부서지도록 용천혈에 공력을 실은 천서은의 신형이 어느새 지운천을 향해 날아올라 흑검 숙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운천도 하송진인의 늘어진 육신을 놓아버리면서 들고 있던 청유검 그대로 올려쳤다.

카앙!

검과 검이 충돌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의 강대한 경력이 먼저 충돌하며 사방에 푸른 벼락과 칠흑의 마기를 토해냈다.

카가가각-!

힘과 힘의 충돌, 혼재된 경력의 파열 그 양측에서 분노에 찬 천서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운천이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

“그대의 용모는 화를 내도 참 아름답구려, 후후!”

그의 뻔뻔함은 천서은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든다.

파앙!

지운천이 힘껏 밀어내자 응집됐던 경력들이 터지고 흩어지면서 천서은의 신형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지면에 발을 딛고도 그 여파로 밀려나는데 마침내 멈춰선 발뒤꿈치로 물컹한 감각이 느껴졌다.

뒤돌아 내려다본 천서은의 눈빛이 다시 한번 급격하게 떨렸다.

그녀의 뒷발에 걸린 한 구의 시신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정평자…….’

면주에서 보았던 그를 청성산에서 시신으로 보게 됐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그녀는 새삼 다시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청성파의 멸문지화.

“……네놈들이 한 짓이냐?”

천서은의 살의 등등한 물음에 지운천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거 종남파는 천무방의 손에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이 살벌한 강호 무림에서 이런 일은 평범한 일 아닌가? 뭘 그리 화가 나셨소?”

그 말에 천서은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창천맹으로서 정사가 이념을 초월하여 연맹을 구성하고 있지만, 각자의 은원을 따진다면 정사 간 분쟁의 최전선에 있었던 천무방이 어찌 그런 살업의 과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랴.

하지만, 지운천의 입가에 그려진 비웃음으로부터 그가 한 발언이 당위성을 따지기 위함이 아닌 그저 조롱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네놈들이 한 짓이냐고 물었어!”

피부가 찌릿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가 천서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지운천 뒤에 있던 네 사람도 그녀의 위협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렇다고 두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가?

“크크큭!”

지운천이 조소를 흘렸다.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큰 내상을 입고 부축을 받는 선우도를 포함하여 허룡, 영무, 비작을 차례대로 훑어보고는 다시 천서은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이 넷에겐 분노를 거둬주시오. 이 모든 것은 나 혼자 한 짓이니 말이오, 낭자.”

학살의 참사 위에 서서 조롱을 내던지는 지운천의 모습에 기가 찰 노릇이다.

“왜지?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이지?”

“왜냐니? 이 정도는 해야 나라는 존재를, 그대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을 것 아니오? 아하하하!”

“고작 네 이름 석 자 알리겠다고, 이런 일을 저질러?”

분개에 찬 천서은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운천이 검지를 들어 까닥거렸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명성이 아니오. 그걸 원했다면 처음부터 나서서 당혁수의 목을 쳤거나, 조금 전에 만났던 천하오절이라는 안효철을 죽였을 거요.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그 대목에서 천서은은 적잖이 놀랐다. 천하에 정점에 있는 천하오절과 그 대등한 강자의 죽음을 쉽게 말하는 지운천의 오만함이 믿어지지 않았다.

“난 그저 본교의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창천맹과 중원, 사천 무림의 대응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직접 보고 듣길 원해서 여기에 왔거든. 그런데 하필 만난 게 낭자와 진도건… 이하 떨거지들이었소. 하하하! 사실 낭자의 아름다움이 특별하긴 하지만, 당신은 나의 중요한 문제가 될 만한 인물은 아니오. 내 관심을 끌었던 건 진도건이었지. 그 적발과 적안은 중원뿐만 아니라 새외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이거든.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이곳에 넘어오기 얼마 전에 그와 같은 특징을 가진 또 한 사람을 직접 만나고 왔단 말이지.”

“……뭐?”

“후후후! 역시 낭자도 놀라는군. 지금 내가 한 말이 비단 외형적인 부분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 뭐, 아무튼 난 궁금하오. 역량을 잘 아는 그자와 비교해서 진도건의 역량은 어느 수준인지 꽤 궁금해져서 말이오. 그러려면 적당한 자극과 원 없이 싸울만한 무대를 동시에 충족시킬만한 장소가 필요해졌고…….”

지운천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것이 청성파를 가리키고 있음은 명확한바, 그가 두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거리고 만면에 조소를 그리며 차갑게 속삭였다.

“당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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