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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44화 (244/432)

244화 - 제44장. 자천은 다시 창천이 되었으나 (6)

단원진이 소매를 휘젓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의 손에 붙었던 불길과 오두막을 덮은 화염을 모두 날려버렸다. 그러나 그런 광경에 놀랄 새도 없이, 화상에 짓물러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살필 새도 없이 서문질은 차가운 눈으로 단원진을 노려봤다.

“당신이 뭔데 내게 길을 열어주겠다는 거지?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아하하. 그래, 나는 널 잘 모르지. 하지만, 자네가 마음을 연다면 나는 누구보다 자네를 잘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고통을 극복할 힘을 원하지 않는가? 이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으며 자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줄 수도 있을 걸세.”

단원진은 그에게 작은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무척 검고 영롱한 빛을 띠면서 또한 알 수 없는 기운이 풍겨 나오는 그런 구슬이었다.

“그게 뭐지?”

“오래전 내 아버지는 중원 각지에 마도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여행을 했었지. 지금 내가 하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지. 아직 태동하지 않은 마도를 위해 내 수족이 되어줄 만한 야망과 능력을 갖춘 자를 찾고 있네.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마정이네. 이것을 삼켰을 때, 무엇을 선사할 수 있을지는 나조차도 몰라. 하지만, 자네가 아직 원하던 바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이 마정을 삼켜보게. 생을 포기하려 했던 자네를 육신도, 의지도 모두 되살려줄 것일세.”

서문질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 마정이라 불리는 구슬에 고정되어 도통 떨어질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 받아들여. 네가 원하는 경지로 인도해주마.”

마치 그렇게 그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단원진의 손에서 마정이 붕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서문질에게 다가왔다.

마정이 점점 그의 앞에 이르렀을 때, 서문질이 부르르 떨며 입을 벌렸다. 아직 남아있는 한줌의 미련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마정은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꿀꺽!

………….

기나긴 꿈속에서 헤맨 느낌이었다.

불현듯 눈을 떴을 땐, 타다 말아서 새까매진 오두막 한가운데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깜박거리는 눈으로 까맣게 숯덩이가 된 나무판자의 틈 사이로 푸른 하늘이 비추는데 솔솔 불어오는 바람의 시원함은 잊을 수가 없었다.

고통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는 탁 트였고 귀로는 울창한 숲에 존재하는 곤충, 새, 파충류, 짐승 등 온갖 생명의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도 어쩜 이렇게 시원하게 들이마셔지는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자신을 살폈을 때, 그는 단원진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온몸을 덮었던 욕창은 거의 사라져 그 흔적만이 간간이 보였고, 갈라지며 진물과 핏물이 흘러나왔던 피부는 꽤 매끈해져 생기를 되찾았다. 문득 손에 잡히는 서신 한 장을 들어 살펴보니 단원진이 남긴 것임을 깨달았다.

「궁금하거든 천산을 찾아오라.」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나와 가까운 호숫가에 얼굴을 비추자 과거의 멀쩡했던 자신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 꿈같은 현실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서문질은 그날로 천산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소마(甦魔)의 마성을 중단에 품고 있었다.

죽음을 멈추고 생기를 긁어모으는 성질이 자신의 몸속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혈로 무너지는 신체를 다시 복구시키고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원했던 힘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오랫동안 독혈로 인한 죽음에 버티다 보니 어느덧 생존에 대한 열망이 독마신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근소하게 앞섰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두막을 뒤덮은 화염을 바라보면서 단 하루만이라도 멀쩡한 모습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했던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다시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는 단원진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겠다고 한 걸 떠올렸다.

서문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혈을 완성할 수 있는 신체의 그릇을 얻은 것이라고.

진정한 독마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힘을 얻은 것이라고.

이제 남은 건 당문의 독혈경을 취득하여 천하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마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뿐.

“크아아아악-!”

서문질이 원한으로 가득 찬 두 눈을 부릅뜨며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그에 몸에 꽂혔던 금침이 뽑히면서 일제히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그의 피를 타고 흐르는 소마의 마기가 폭주하면서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가 흘렸던 핏물과 진물들이 융합되더니 증발하듯 분진으로 피어올랐다. 극독이라는 죽음을 먹고 살면서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하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부패의 기운을 마구 분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혁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일어서는 서문질을 보면서 그 또한 삼양귀원신공의 십성 공력을 끌어올렸다. 상단전을 개방시키면서 염력과 가까운 힘이 부패 분진이 퍼지지 않도록 서문질 주변 공간을 제약하기 시작했다.

“죽여주마!”

악귀의 발톱이 다시 한번 서문질의 손에서 구현된다.

구음독천마공 영독부골조, 스치기만 해도 부패의 고통 속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극악의 마공이 발현되는 그 순간 당혁수가 하늘에서 흩어지는 금침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의지에 의해 일제히 금침의 예봉이 서문질에게 향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주변에 어느새 별무리를 품은 침강(針罡)이 구현되어 서문질의 사방을 포위했다.

“잘 가라.”

만천화우(滿天花雨) 위락경(蝟絡勁).

차앙-!

침강은 그저 기운을 폭출시킬 기점 역할을 할 뿐. 수백 가닥 무형유형(無形有形)의 침경(針勁)이 저항하는 모든 기운을 뚫고 서문질의 전신을 관통한다. 기운조차 부패시키는 죽음의 발톱은 발톱일 뿐, 심장과 두개골을 관통하는 경력을 막을 수 없었다.

“커헉……!”

고슴도치가 되어버릴 듯 꿰뚫려서는 침경이 사라지자 서문질의 신형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부패로 가득 찼던 기운들도 무너지면서 꿰뚫린 피부, 오장육부와 근골로 그가 쌓아왔던 죽음의 독혈이 스며 들어가며 마침내 서문질을 진정 죽음으로 몰고 간다.

서문질은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생명력을 목소리에 담았다.

“당혁수……! ……독혈… 경은 ……있… 었……지……?”

“내가 가주가 되었던 날, 독혈경은 폐기했다.”

당혁수가 담담하게 내뱉은 그 대답을 서문질은 듣기는 했을까?

애초에 없었던 것을 쫓다가 생을 마감하는, 서문질의 표정은 어쩐지 평온해 보였다.

당혁수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당문으로 돌아가기 위해 경공을 펼쳤다.

부패의 독혈은 이미 죽어버린 서문질의 육체를 거듭 탐했다. 얼굴이 무너지고 신체도 무너졌다. 피부와 근육이 진물과 함께 흘러내리며 썩은 악취를 풍겼다.

시체의 주인이 누군지 잠깐 사이만으로 이젠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 * * *

자천이 걷히고 창천이 열렸다.

온전히 쏟아지는 햇빛과 가벼운 바람이 사투를 벌이던 자들의 열기를 걷어낸다.

무림에 속한 이상 가까이 둬야 하는 것이 자신과 친구의 죽음이겠으나 단 하루, 그것도 수 시간 안에 폭풍처럼 지나가 버린 악몽과도 같기에 작금의 이 현실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들을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는가? 성도에 있던 사천 무림인들은 죽음과 슬픔을 수습하고 산 자들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어찌 됐든 성도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 중심은 결국 당문에 있었다.

외원에 퍼진 죽은 동료들을 수습하는 당문으로 같은 시기에 여러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당문인들은 끔찍한 참상 위에서 자신들의 가주를 맞이했다.

“내가 가문을 지키지 못했구나. 나의 오판으로 이렇게 많은 식솔의 죽음을 초래했구나.”

당혁수는 참담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심했다. 그는 제자들과 식솔들을 위로하면서 또 함께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가까운 부상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천천히 살아남은 아내와 아들에게 다가갔다.

“여보.”

“아버지.”

당혁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얼마나 성 밖에서 전전긍긍했는지 몰랐다. 또 서문질이 끔찍한 짓을 벌였다고 말한 게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조금 안도하기도 했다.

“오면서 서문질을 마주쳤소.”

“어찌 됐어요?”

“그의 목숨을 거두었소.”

진윤지가 눈물을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사혈주와 이런 전쟁은 다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이 사람을 좀 살펴주십시오.”

당한솔은 혼절해있는 야율균은을 당혁수에게 보였다. 그녀가 당문을 방문하고 또 마교 출신이라는 것은 한 차례 소식을 통해 들어서 당혁수도 알고 있었다. 다만 두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도 자신보다 여자를 먼저 보이며 걱정하는 당한솔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잠깐 쳐다보면서 야율균은의 상태를 살펴보고 시작했다.

당혁수가 당문에 도착하고 얼마 뒤, 안효철의 중천과 영은성, 최현걸도 당문에 도착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고, 당혁수와 안효철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당혁수는 안효철에게서 은근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느끼고 그를 경계했다.

“중천의 안효철이 당가주를 뵙겠소. 내게서 느끼는 건 일단 넘어가시오.”

“……당혁수요. 만나서 반갑소.”

두 사람이 인사할 때, 영은성과 최현걸이 진윤지를 보며 달려왔다. 두 사람도 당혁수를 향해 포권으로 예를 갖추면서도 눈으론 진윤지를 보며 궁금한 걸 바로 꺼냈다.

“진 부인, 혹시 진 대형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가 이곳의 싸움을 끝냈어요. 하지만, 이내 어디론가 떠나버렸는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서문질도 그때 같이 사라져버려서 그자의 뒤를 쫓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여보, 혹시 적발 남자를 보지 못했나요?”

“아니, 보지 못했소. 그런데 그가 이곳의 싸움을 끝냈다니, 그럼 이곳의 환진도 그가 없앤 것이오?”

당혁수의 물음에 진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그가 천혈강시의 목을 떨어뜨리자 환진도 사라지고 환도종도 도망쳤으니까요.”

“놀랍군……!”

당혁수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입성하지 못해 절망했던 조금 전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되새겼다.

진도건 일행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만약 곧장 당문으로 돌아왔다면 이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자책도 잠깐 하게 되었다.

잠시 얘기를 듣고 있던 안효철이 입을 열었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몰라도 당장 도움이 시급한 곳이 있으니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겠소. 어쩌면 그가 거기로 갔을지도 모르고.”

“청성산 말이군요.”

영은성이 그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파도 위험한가?”

“그곳에 지운천이란 마교도가 갔는데 아무래도 구주마종의 신마들과 동급이거나 그 윗줄의 인물 같소. 그런데 지금 창천맹주의 금지옥엽이 한발 앞서 청성산으로 떠난 상황인데 분명 위험에 처할 것이오. 기력이 남은 자들은 지금 움직여야 할 것 같소.”

안효철의 설명을 들은 당혁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빠르게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판단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와 안 대협이 먼저 출발합시다. 지운천이란 자가 그만한 고수라고 해도 우리 둘이라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터. 적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막지는 못할 것이오.”

“그럽시다. 자네들이 우리 중천과 함께 와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영은성과 최현걸이 답하는 사이 당혁수가 진윤지를 보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다녀오겠소.”

청성파가 위험하단 말에 진윤지도 걱정스런 마음이 올라왔다. 아직 이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이 덜어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다녀와요.”

영은성과 최현걸이 서충과 접촉하여 안효철의 얘기를 전달하는 사이, 당혁수와 안효철은 곧바로 서쪽을 향해 경공을 펼치며 쏜살같이 날아가 모습을 감췄다. 서충은 20여 명의 낭인을 남겨 당문의 피해수습을 돕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영은성, 최현걸과 함께 청성산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푸르름을 되찾았건만, 여전히 짙은 암운이 빛을 가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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