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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43화 (243/432)

243화 - 제44장. 자천은 다시 창천이 되었으나 (5)

중천의 낭인들을 비롯한 다른 병사들의 시선도 일제히 성도로 쏠렸다. 그리고 괴이했던 자색 장막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두 확인하게 됐다.

서충이 경공을 펼쳐 달려와 안효철에게 다가왔다.

“안 대형!”

“잠깐…….”

안효철이 서충에게 손바닥을 보이면서 접근을 막았다. 그를 오래도록 봐왔던 서충도 안효철의 상태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대형, 설마……?”

“그래, 나도 스승님의 전철을 밟게 생겼다.”

안효철이 넋두리처럼 힘없이 대답했다.

천자철갑.

그 대단한 방호력을 경외하여 강호의 소문이 붙여준 이름이었지만, 안효철의 스승이었던 사중호(司衆虎)는 그것을 귀신의 ‘악피흑갑(惡皮黑鉀)’이라 불렀다. 물론 이것조차 진짜 이름인지 의뭉스러웠지만, 어쨌든 이것이 가진 저주는 그 착용자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니 그는 광혈신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자신의 생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셈이었다.

천자철갑의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서충이 안효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안효철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자꾸 몸속으로 침투하려 드는 흑갑의 마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화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광혈신마와의 싸움에서 기혈을 모두 빨려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이 귀물이 스승과 제자 둘 모두 잡아먹겠구나…….’

서충은 속으로 한탄을 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안효철의 몸을 덮어주었다.

두두두두!

그때 영은성과 최현걸이 말을 타고 안효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가까이 이르자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와 안효철에게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중천의 장께 강호의 후배들이 인사드립니다. 전 화산파의 영은성입니다.”

“저는 개방의 최현걸입니다.”

“제갈 군사에게 들은 친구들이로군.”

“혹시 저희 형수님. 아니, 창천맹주님의 딸인 천서은 낭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같이 싸우시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다시 보니까 어디론가 가버린 듯합니다만?”

“청성산으로 갔네. 지운천이란 자가 거기에 있다던데…….”

“지운천!?”

최현걸이 놀라며 영은성과 눈을 맞췄다.

“자네들도 아는 자인가?”

“어쩌다 보니 사천으로 오는 여정에 잠깐 같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 그자와 자네들 간에 뭔 일이 있긴 했나 보군. 그자는 마교도. 그것도 구주마종의 신마들보다 동급이거나 더 높은 위치의 인물로 여겨지네. 청성산에 뭔 짓을 벌이려는 것 같은데 천 소저가 그걸 막으려 하는 모양새야.”

영은성과 최현걸이 안색을 굳히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영은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성도에 진 대협이 먼저 갔으니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청성산으로 가야겠습니다.”

“우리도 가지. 당문의 안위도 확인이 필요하고…….”

영은성과 최현걸은 안효철의 중천과 함께 흩어진 말들을 수습하여 바로 성도로 달렸다. 호상이 이끄는 기병대도 그 뒤를 따라 즉시 회군하기 시작했다.

* * * *

“빌어먹을! 젠장!”

서문질은 황망한 얼굴로 다급하게 성의 남문 쪽으로 경공을 펼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진도건의 검기로 난자당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상처가 나지 않은 데가 없었고 너덜너덜해진 옷가지 사이로 상당한 출혈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존재다. 어떻게 대도등까지 세운 최대의 환마강진까지 무너뜨리고 천혈강시마저 벨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아아! 당문의 내원까지 길을 뚫어냈건만 이렇게 물러나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쏟아지는 검기 속에서 천혈강시가 산산조각이 난 걸 보자마자 그 즉시 도망쳤다. 그 자신도 환진 속 천혈강시는 무적이라 단단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관점을 완전히 깨뜨린 진도건에게 자신으론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망치던 중에 성을 덮은 환도강마대진계도 사라져버리자 더더욱 가망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기랄! 이만한 기회가 언제 또 올 수 있다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 예고되어 있었으니 그의 목소리엔 절망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성의 남문 부근에 도착한 순간, 그는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아차! ……아무리 당황했기로서니 길을 돌아갔어야 했거늘!’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성문 쪽에서 걸어오는 남자의 정체를 너무 늦게 눈치채버려 이미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도망치기도 힘들었다.

“서문질.”

“……당혁수.”

백발을 휘날리면서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부르는 당혁수를 보며 서문질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큭큭! 젠장,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성동격서의 계책에 제대로 당했다는 걸 인정하겠다. 그래서 원하던 걸 얻었나?”

당혁수의 목소리, 발음 하나하나에 서슬 퍼런 살의가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서문질이 악의 가득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아아, 천혈강시를 이용해 내원을 모두 개박살을 내놨지. 당문에 살아있는 생명이 남아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마라. 네 아들은 나의 혈독(血毒)을 주입한 후, 말라비틀어진 다리를 지붕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네 마누라를 내 독사들의 먹이로 만들어 자식새끼가 보는 앞에서 죽게 했지.”

쿵!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당혁수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환진 따위에 발목 잡혀 밖에 머물렀던 그 시간이라면 정말 서문질이 일을 벌이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혁수가 어지럼증을 느끼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비틀거리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스스스…….

그때였다.

서문질의 신형이 소리도 없이 어느새 당혁수의 머리 위로 날아와 있었다. 연사미보(淵蛇微步)는 사혈주 최고의 보법으로 못 위를 건너는 뱀과 같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몸을 날리니 지척에서 마기를 전면 개방, 폭발시켜 손끝에 담았다. 그 음독한 구음백골조의 손톱이 당혁수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순간 당혁수의 신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을 눈부신 광휘가 가득 메웠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려오면서 먹먹해지는데 그 속에서 폭음같은 게 아주 조용히 웅웅 울려댔다. 그리고 온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오면서 사지가 마비된 듯 뻣뻣해지는 느낌을 가져간 채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으어어억!”

서문질이 고통에 신음하면서 뻣뻣해진 몸으로 꿈틀댔다. 부들대는 몸으로 겨우겨우 다시 등을 땅에 누이는데 그의 온몸엔 수백 개의 금침이 꽂혀있었다.

“널 끝내기 위해 특별히 설계한 천뢰구다. 혈독을 중화하는 약침을 채워놨지.”

당혁수가 차갑게 읊조렸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어도 서문질의 기척을 너무나 명확하게 읽고 있었다. 서문질이 덮치려는 순간, 그는 즉각 이형환위로 자리를 벗어나면서도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천뢰구를 놓아 즉각 격발시켜버렸다. 상단전을 통해 공간을 강력하게 통제하여 그 폭침이 모두 서문질에게 쏟아지게 하였으니 그의 몸 전면부에 금침이 빼곡하게 꽂힌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서문질인 온몸을 채웠던 혈독이 중화되는 고통을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독에 중독되었을 때 고통을 느끼지만, 그에겐 해독제가 극독인 셈이었다. 경구로 투약되는 것이든, 분진으로 호흡기에 밀어 넣는 일이든 그의 무공 수준에선 누구도 감히 시도해볼 수 없는 일이지만, 더 강한 자가 이렇듯 침을 통해 기혈에 강제로 투여시켜버리면 그로서도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 나의 독마신(毒魔神)의 꿈이……!’

서문질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살가죽이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 이따금 기포가 터질 때면 중화되기 시작한 독이 뿜어져 나오며 악취를 풍겨댔다. 갈라진 틈으론 피와 고름이 밀려 올라오니 당혁수의 시선에서도 그토록 끔찍한 게 없을 정도였다.

서문질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고통의 기억이……!’

독마신의 경지라는 꿈을 좇은 대가는 참혹했다.

피부는 갈라지고 온몸에 욕창이 올라왔다. 눈은 점점 멀어 가고 다른 감각도 기능을 상실해갔다. 뼈는 구멍이라도 생기는지 비가 내리고 바람만 불어도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그의 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으로 우물 정도는 쉽게 극독으로 오염시킬 수 있는 독혈을 얻은 대가였다.

나약했던 스승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하여 운남의 영약들을 끌어모아 섭취해서 내공도 크게 증진하고 나서야 독혈을 연성한 것이지만, 독혈은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당문의 독혈경만 있었다면……!

짧은 역사 속 사혈주의 개주조사(開州祖師)는 당극(唐剋)이라는 자였다. 극독 연구에 미친 자였고 그 연구의 끝은 인간이 진정한 독인이 되는 독혈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라 여겼던 자였다. 과거엔 당문도 독인을 연구했었지만, 포기를 선언하자 당극은 격렬히 반대했다. 그리고 당문은 당극을 파문시켰다.

당극은 운남에 내려와 흩어진 독문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사혈주를 만들었다. 그는 굴복시킨 수장들과 그 제자들 모두 자신의 제자로 거둬들이고 그들을 통해 독혈을 실험했다. 물론 하나같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 미친 짓은 대를 거듭하면서도 이뤄졌는데 당극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서 남겼던 말이란, ‘독혈경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이란 한탄이었다.

독에 대한 인체실험보다 내공을 통해 길을 열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서문질의 스승 양요기(羊妖奇)였다. 자신에게 독혈을 인체 연성한 사람 가운데 그래도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이 개주조사인 당극이었기 때문에 무공부터 높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없었고 그 가정을 제자이자 타고난 무재를 가진 서문질에게 남기고 죽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서문질도 그것조차 틀린 길이었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끝에 밀려오는 참담한 회한은 그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스로 늪지대의 오두막에 격리한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밖으로 나와 오두막을 불 질렀다. 하늘 높이 검은 그을음을 뿜어내며 활활 타오르는 그 뜨거운 불길을 보며 어차피 고통에 몸부림치는 참혹한 삶, 불에 타죽는 고통 속에 몸을 덮어 자신과 사혈주의 명맥을 끊어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한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이글거리는 광염(光焰)에 애처로운 한 몸 맡기려 손을 뻗을 때였다.

“독혈이라는 흥미로운 도전을 하는 자들이 이런 오지에 있다고 하여 왔더니만, 이거…… 실망스러운 꼴만 보고 돌아가게 생겼군.”

청각마저 거의 상실한 채 이명으로 고통받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또렷이 들려오는 음성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뻗었던 손에 불이 붙어 타고 있음에도 그 고통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뒤를 돌아본 것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함이었다.

“당신은……!”

힘겹게 꺼내는 목소리는 목구멍과 혓바닥마저 녹아내려 발음조차 불분명했지만, 아직 남아있던 눈알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수염,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노인을 보고 있었다. 그 하얀 피부에 대비되어 도드라지는 붉은 입술이 움찔거리며 그 또렷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내 이름은 단원진, 어쩌면 자네가 찾던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는 사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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