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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42화 (242/432)

242화 - 제44장. 자천은 다시 창천이 되었으나 (4)

절초를 쏟아붓기 위해 공력을 집중하는 시간은 수 초면 충분한 일이었으니 독기를 사방에 흩뿌리며 기운을 폭주시키는 서문질은 그야말로 만전의 상태였다.

그조차도 환도신마가 이 정도까지 조건을 만들어줄 줄은 몰랐으니 이미 준비된 공력쯤 기꺼이 쏟아붓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후아아악!

그 순간 서문질이 두 눈을 부릅뜨며 전방에 장력을 때렸다.

콰앙!

진도건을 노리지 않고 무작정 날린 헛방이었다.

나아가던 신형은 멈추었고 두 다리는 황급하게 몸을 직전의 자리로 돌리기 위해 지면을 밀어냈다. 그리고 핏빛 검기가 휘몰아치는 걸 보면서 서문질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지가 제각각 튀어 올랐다.

이미 죽은 신체의 것이기에 분리된 자리에서 흘러나와야 할 핏물 따위는 없었지만, 오히려 넘실거리면서 휘감아오는 붉은 기운의 파도가 그 허전한 빈자리를 채워주는 듯했다.

툭!

진도건이 머리만 달린 천혈강시의 몸통을 땅에 내려놓고 그 앞에 똑바로 서서 그 붉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천혈강시의 턱이 움직이면서 죽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들려오는 소리는 섬뜩한데 그 속에서 당혹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게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조종하고 있는 선우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서문질과 같은 마교도들 뿐이었지만, 진도건의 적안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천혈강시의 검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인형으로 부린 수작질치고는 쓸만했다.”

흠칫!

천혈강시의 텅 빈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 반응은 강시의 것일까, 뒤에 숨은 자의 것일까?

푹!

진도건의 흑검이 천혈강시의 목부터 심장까지 깊숙이 꽂혔다.

천혈강시의 턱이 떨리며 까드득 거리는 소리가 턱관절에서부터 들려왔다.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끄어어어어……!”

희미한 죽음의 소리가 천혈강시의 반쯤 벌어진 목청 사이에서 흘러나올 때.

주변을 맴돌면서 넘실거리던 혈광의 파도가 일순간 진도건과 천혈강시를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이며 휘감겼다.

혈화봉(血花峯).

마치 그건 피에 흠뻑 젖은 꽃봉오리 같았다.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러나 기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지할 수 있는 선명한 살기와 파괴적인 기운을 느끼리라.

그는 무엇에 이끌렸던 것일까?

퉁!

서문질의 신형이 혈화봉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응집된 기운은 심상치 않았지만, 만약 진도건이 천혈강시에게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때가 바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순간이지 않냐는 가정에서의 본능적인 도전이었다.

직전에 한껏 끌어올렸던 공력을 흩어놓지 않고 있던 그였다.

이미 화살은 활시위에 팽팽하게 당겨진 채 그대로였고 손을 놓기만 하면 되었다.

음독한 기운과 예리한 경력을 실어 두개골을 두부에 구멍을 내듯 할 수 있는 구음백골조에서 발전시킨 초상승의 절초.

악의로 발현된 삼귀수(三鬼手)의 발톱은 극한으로 치닫는 독기가 유형화된 강기마저 부패시켜 다시 그 형태를 문드러지게 하니 어설프게 강기로 방어하려 들면 가차 없이 찢어발기리라.

구음독천마공 영독부골조(永毒腐骨爪).

슈라라라-!

다섯 자락의 부패하는 조강(爪罡).

세 방향에서부터 파고들어 모두 열다섯 줄기의 발톱들이 동시에 휩쓸어버리듯 내려꽂혔다.

콰콰콰콱……!

조강이 혈화봉을 관통한 순간, 서문질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퍼부었던 강기들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어 산산이 흩어지자 실패를 직감했다.

‘……빌어먹을!’

모든 일은 순간의 연속.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열리며 사방으로 혈기의 파장을 퍼뜨린다.

샤샤샤샤샤-!

날카로운 바람에 올라탄 수십 개의 붉은 검기가 비상하고 천지간에 피의 안개가 흩뿌려져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도건이 천혈강시의 몸에서 흑검을 뽑더니 머리를 붙잡고 목을 베어버렸다.

그 순간 진도건에게서 붉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피로 점철된 사람의 형상을 띄었다. 그것은 나타나자마자 이내 거대하게 커지듯 부풀어 오르다가 하늘 높이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퍼져나갔다.

“이럴수가……!”

당주형과 싸우던 백기린이 급히 그를 뿌리치고 물러났다. 그가 주변의 아직 남아있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철수하라!”

백기린의 명령에 환도종 마교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갑자기 도주하는 이유, 바로 환도강마대진계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백기린은 도주하면서도 시야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진도건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엔 불신의 빛이 역력했었다.

‘천혈강시를 베어버리고…… 대도등을 직접 부수기 전까진 절대 부술 수 없는 최고의 환마강진까지 해체시켜 버리다니……. 도대체 저자는 뭐란 말인가!?’

진도건이란 이름.

혈마라는 상징.

단순히 그 두 이름만으론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줄 수 없다.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성도에서 탈출하듯 빠져나가는 백기린과 환도종 마교도의 영혼엔 이미 혈광의 상흔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 * *

천혈강시와 환도강마대진계가 무너지기 10여 분 전.

성도 북동쪽 전장의 전세도 치열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영은성이 호상의 기병대를 통솔하여 돌격진형을 구사하고 최현걸도 여기에 합류를 하면서 반복된 싸움에 지쳐있던 광혈마종의 마인들도 기세가 크게 꺾였다.

으레 절정고수들의 싸움은 언제나 쉽게 결판을 짓기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사수인 가운데 광구쌍조 막손과 주귀웅 태량이 각각 형산도귀(衡山刀鬼) 이막수(李寞水)와 양의도(兩儀刀) 변양(邊襄)의 칼에 목이 날아가며 중천이 전장을 주도할 분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전장의 승패를 결정할 싸움은 안효철과 혁무술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혁무술보다 상대적으로 더 깊이 갖고 있던 안효철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필생의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끄아아아아아……!”

귀를 의심할 정도의 고통에 찬 끔찍한 비명이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옷가지가 다 터져나가 멍들고 땀에 젖은,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은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혁무술조차 열기 속에서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격전을 벌이는 전장의 구성원들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한껏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안효철을 보며 혁무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대체 뭐냐…… 어떻게 저놈에게 이토록 순수한 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마기가 안효철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함도, 치우친 특성도 없이 그저 자체만으로도 시야를 어둠에 물들고 숨통은 옥죄며 감정을 무너뜨릴 것만 같은 마기가 은근하게 퍼지고 있었다.

털썩.

안효철이 비명을 멈추고 무릎을 꿇으며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몸 여기저기를 쥐어뜯듯 잡아채느라 항상 두르고 있던 장포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휘이이잉!

때마침 바람이 불면서 장포가 안효철에게서 붕 떠올랐다가 좀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졌다. 그리고 천자철갑을 착용한 안효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장내에 드러냈다.

그의 검은 갑주는 이미 안효철에게 있어 하나의 상징처럼 됐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 위에 장포나 기타 옷가지를 덧대면서 부분부분 가려놓아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안효철의 모습을 바라보던 혁무술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체격이 줄어들었다……?’

안효철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의 체격이 꽤 크고 두꺼워 단단한 인상을 준다고 얘기한다. 갑주의 크기나 그 두께 등을 고려했을 때, 당연히 나올 수 있는 평이었고 혁무술이 받은 인상도 거기에서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안효철의 모습은 키는 비슷해도 체격 자체는 줄어든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갑주가 몸에 제대로 밀착된 느낌 혹은 그것에 더해 더 얇아진 느낌.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이상 겉보기로는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무슨 일을 벌인 거냐?”

혁무술의 물음에 안효철이 고개를 들었다.

목까지 덮은 갑주가 불편한지 손으로 만지작거리는데 혁무술은 왠지 모르게 맨살을 만지는 것처럼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결국, 저주를 내 몸에 심고야 말았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안효철이 싸우기 위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혁무술도 경계하면서 자세를 낮추는데,

쿵!

진각에 대지가 울리고 안효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기척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핏!

흑갑의 철권에 볼이 스치면서 피가 튄다.

고개를 틀면서 그대로 몸을 기울여 주먹을 휘두르자 곧추세운 무릎에 막혔다.

순식간에 십수 합을 치고받는 공방.

‘빠르다……!’

혁무술의 맨몸이 안효철의 권각과 충돌할 때마다 천자철갑의 반발력이 뼈를 울려댔다. 무쌍류의 타격이 혁무술의 반응에 맞춰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듯 연쇄적인 공격이 퍼부어진다.

퍼퍼퍽!

삼연속의 순격(瞬擊)에 혁무술의 허리가 꺾이고 내려오는 턱을 노리며 다시 철권이 솟구친다.

빠각!

“크윽!”

혁무술의 머리가 꺾이듯 젖혀지며 동시에 잠깐 정신이 끊어졌다 돌아왔다.

‘……호흡이……!’

다급히 호흡을 들이마시는 순간, 안효철은 잠깐의 틈도 주지 않으려는지 이미 앞축을 땅에 꽂아 다리부터 허리까지 차례로 회전력을 주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연결되는 동작의 끝에 안효철의 어깨가 혁무술의 명치에 꽂혔다.

퍼엉!

“끅!”

신음과 함께 쓰러질 듯이 밀려나는 혁무술을 향해 안효철이 다시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면서 주먹과 팔꿈치, 무릎, 발차기를 물 흐르듯이 쏟아 내는데 반격하는 혁무술의 동작 중간을 모두 잘라내며 연격을 모두 퍼부었다.

퍼퍼퍼퍼퍽! -쿵!

그 육중한 거체가 멀찍이 날아가 땅에 처박히며 굉음이 들려왔다.

“크아악!”

혁무술이 비명과도 같은 날숨을 토해내며 몸부림치듯 일어났다.

안효철의 무위에서 힘, 속도, 반응 등 무엇하나 향상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치 내가 천산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낸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 저 갑주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씨팔, 고작해야 천하오절의 말단이 아닌가? 그런데도 내가 밀리다니……. 인정할 수 없다!’

광무혈폭마공의 십성 내공을 운기하자 단전에서 마기가 용솟음치며 전신세맥으로 뻗어갔다. 그 기운들이 신경계로도 이어지며 강력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틱…… 틱틱!

그 순간 알 수 없는 미세한 파열음이 그의 뇌리를 울렸다.

‘이, 이건……!’

혁무술이 뜻밖의 상황에 주춤하는 사이, 그 기회를 포착한 안효철이 한껏 당겨진 육체를 그 거대한 품속으로 내던지듯 파고들었다. 그리고 중후한 경력을 품은 철갑의 두 주먹이 혁무술의 복부로 무자비하게 꽂혔다.

무쌍류 파마격(破魔擊).

꽈앙!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경력과 천자철갑의 반탄력이 만나 이전에 없던 충격을 선사한다.

어떤 타격에도 방어와 반격의 동작을 상시 보여줬던 혁무술도 이번에는 맥이 풀린 모습으로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진다.

승패를 결정지은 일격이었다.

혁무술의 육중한 몸이 멀찍이 날아가 전장 한가운데 떨어졌으니 싸우던 자들도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널브러진 모습이 거의 무방비 상태나 매한가지였는데 이 싸움을 주시하고 있던 채모조가 달려와 부하들과 함께 적들의 접근을 막았다.

“오규! 퇴각한다!”

채모조가 오규를 부르며 혁무술의 상태를 살폈다. 기혈이 뒤틀려 언제 마기가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거무죽죽하게 불거져 올라와 있었다. 광혈신마의 마정은 바로 그 신경계에 구축되어 있었는데 누적된 피로에다 안효철에게 연속으로 타격을 허용하면서 균열이 가버린 것이었다.

광혈종이 그 다수를 이용하여 혁무술을 중심으로 방진을 구축하자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오규가 달려와 혁무술을 업고나니 광혈종 전체가 북쪽으로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겼다!”

병사들과 중천 낭인들에게서 승전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중천의 낭인 중 하나가 남서쪽을 바라보고는 크게 소리쳤다.

“성도성의 환진이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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